2024년 12월호

북·러 연대, 세계질서 흐름 앞엔 결국 ‘찻잔 속 태풍’

[특집 | 北 ‘폭풍군단’이 몰고 올 한반도 대폭풍] ‘일진’이 사회 나오면 힘 못 쓰는 이치

  •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前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입력2024-12-0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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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패권 다툼·핵 경쟁… 세계질서 격변

    • ‘反 서방의 축’ 형성해 맞서는 현상 변경 세력

    • 강하고 싶은, 강한 척하는 ‘마초’들의 국제 정세

    • 아무리 강한 나라여도 ‘시장’ 앞에 굴복

    • 한국, 러시아와 ‘강 대 강’으로 맞서선 안 돼

    11월 5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10월 말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 등으로 세계질서는 격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 [동아DB]

    11월 5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10월 말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 등으로 세계질서는 격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 [동아DB]

    세계질서가 격변하고 있다. 핵보유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침공했고, 새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미국 중심의 기존 국제질서에 ‘다극 질서’라는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러시아, 중국, 이란, 북한은 이른바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을 형성해서 서방 중심 세계질서에 선을 긋기 시작했으며, 이에 미국은 이들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다.

    저항의 축 국가들은 모두 핵보유국이거나 잠재적 핵보유국인데, 서방 국가들의 핵은 유럽과 미국에 분산 배치돼 있다. 이마저도 핵을 가진 강대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에 국한된다. 아울러 디지털혁명과 인공지능(AI) 혁명은 세계를 거대 디지털 플랫폼으로 가르기 시작했고, 이 플랫폼을 석권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세계질서는 과연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가

    이러한 가운데, 갑자기 10월 북한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북한군의 성격, 규모, 역할 등을 정확히 알기 위해선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이지만 북한군이 러시아군을 도와 전쟁을 러시아에 유리한 방향으로 종식시키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에 대해 윤석열 정부는 ‘살상 무기 지원’이라는, 강한 카드를 내밀 가능성을 내비치는 등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만약 우리나라가 북한군 파병에 대응해 전투 병력 혹은 살상 무기를 보낸다면 러시아로서는 자국을 향해 전쟁의 수위를 높이는 행위, 즉 에스컬레이션(escalation)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이 북한과 군사적 대치를 넘어 러시아 간 전쟁 에스컬레이션 문제를 맞이하게 됨을 의미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와 국제사회는 핵을 가진 러시아와의 에스컬레이션 문제에 극도로 신중한데, 우리나라는 초강수에 가까운 카드를 거침없이 던지고 있는 셈이다.

    한편 러시아는 미국 중심의 서방 국제질서에 대항할 요량으로,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해 러시아 카잔에서 브릭스(BRICS)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BRICS엔 반서방 혹은 비서방 강대국들이 모여 있다. 브라질·러시아·중국·인도·남아프리카 등이 주도하고 있고, 올해 1월 이란을 포함한 4개국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여서 현재 9개의 회원국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 9개 회원국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44.8%이며,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전 세계 36% 수준이다. 또 이번 회의에선 ‘파트너국’이라는 지위가 신설돼 13개 국가가 이름을 올리면서 그 규모가 더 커졌다.

    반서방 저항의 축은 러시아, 이란, 북한이 가장 적극적으로 끌고 가고 있다.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은 축에 발을 걸치고 있지만 매우 신중한 행보를 취하는 양상이다. 러시아와 함께 미국에 날을 세우는 것이 중국 경제의 미래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이 미국과 서방 주도의 질서와 시장에 다른 국가보다 더 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즉 시장이 시진핑과 중국의 앞날을 좌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복잡하고, 격변하는 국제질서를 보노라면 의문점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줄줄이 나온다. 세계질서는 과연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 북한의 파병은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지정학적 변수가 될 것인가. 북한은 이 시점에 왜 파병했고, 이는 제3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되는 걸까.

    또 미국의 대선 결과는 세계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핵무기가 사용되는 날이 올까. 미국과 중국은 군사적으로 충돌할 것인가 등이다. 필자는 이러한 질문에 기초적이나마 답을 하고자 한다. 물론 모든 질문에 맞춤형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수준엔 이르고 싶다.

    강해지고 싶은 자들이 꿈틀대는 국제정치 격변기

    10월 28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주요 격전지인 북동부 하르키우주 보우찬스크에서 우크라이나 군 장교가 참호에서 탄약을 점검하고 있다. [AP 뉴시스]

    10월 28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주요 격전지인 북동부 하르키우주 보우찬스크에서 우크라이나 군 장교가 참호에서 탄약을 점검하고 있다. [AP 뉴시스]

    세상은 강한 자가 지배하고, 만들고, 흔든다. 이 점은 국내 정치와 국제정치에 차이가 없다. 강한 자들이 어떤 마음을 먹는지, 강해지고 싶은 자가 어떤 일을 벌이는지, 강하지 않은데 강한 척하는 자들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 과연 이들을 규제할 수 있는지가 앞으로의 세상을 예측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지금의 국제정치가 격변기라고 하는 것은 이런 강한 자들, 혹은 강해지고 싶은 자들이 꿈틀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저변에는 과거의 영광·기억·강함이 깔려 있다. 우선 미국을 보자. 11월 미국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한 트럼프가 내세운 구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강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MAGA)”였다. ‘강대국’을 영어로는 ‘Great Power’라고 쓰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저기서 ‘위대하게’라는 말은 ‘강하게’로도 쓸 수 있는 말이다. 그의 구호는 ‘과거와 같이 강하고, 존경받고, 위대한 미국을 복원하자’라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서 트럼프 당선인은 미국을 약하게 하는 국내외의 제반 요소를 다소 과격하게 고치고, 조정하려는 처방전을 제시한다. 이러한 양상은 민주당의 해리스가 당선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구호·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미국의 전반적 정서가 그렇다.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중국의 대전략 구호로 내세우고 있다. 중국의 위대한 지위를 되찾고 다시 부흥하자는 뜻이다. 즉 ‘과거의 위대한 중국을 복원하자’는 의미이므로, 트럼프의 구호 ‘Make America Great Again(MAGA)’에 빗댄다면 ‘Make China Great Again(MCGA)’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이미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데, 군사 전력도 강화해서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의 위치로 나아가고자 한다.

    과거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드넓은 영토를 차지한 제국이었다. 냉전기에는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제국을 건설해서 미국에 버금가는 초강대국의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이후 나라가 축소됐고, 그간 누적된 경제적 병폐가 드러나 군사력·핵 능력을 제외하고는 강대국 반열에 들기 어려운 위치로 급전직하했다. 하지만 에너지 시장의 활황을 타고 다시 경제력이 살아났고, 푸틴이라는 중앙집권적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과거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푸틴이 과거 러시아 제국의 한 부분이었던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 역시 서방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위대한 러시아 제국의 지도자임을 보여주기 위함으로 볼 수 있다.

    러시아가 비록 새 국제질서에서 경제적으로 미국, 중국만큼 부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 강대국임을 보여주고 싶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린 넓은 영토, 문화, 자원, 역사, 핵무기가 있는 국가이니 우리한테 함부로 굴지 말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보이는 것으로 봐야 한다. 푸틴 역시 ‘위대한 러시아의 재건’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그의 구호는 “Make Russia Great Again(MRGA)”라고 할 수 있다.

    이란과 북한은 러시아, 중국과 함께 이른바 저항의 축을 구성하는 국가다. 이란은 과거 거대 제국인 페르시아의 후예이고, 중동의 패권을 노리고 있다. 비록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적응하지 못해서 경제적으로 강대국 반열에 들지는 못하고 있지만 페르시아 제국과 이슬람 제국의 영광을 복원하고자 한다. 이란이 조만간 핵을 보유하게 되면 강대국으로서 행동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은 더 커질 것이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강성대국”을 외쳐왔다. 역사상 언제 강자였는지 알 수 없으나 강한 국가로서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고른 길이 핵 보유 및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길이다. 러시아로 파병하고, 곧이어 성능이 향상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한 것도, 미국의 다음 대통령에게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인지시키려는 조치다.

    유럽은 시장·기술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실기함으로써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세계시장의 위압감을 극복하려는 조치로 극우적 구호가 등장하고, 극우 정당도 여기저기서 약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과거 제국주의와 같이 팽창적이라기보다는 방어적이고, 혁신적이라기보다는 통제적이다. 디지털 시장과 AI 분야에서 약진하지 못하고 있고, 규제로 많은 일을 해결하고자 한다.

    강대국도 시장 앞에 자유롭지 못한, 자유주의 국제질서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이렇듯 강한 자, 다시 강해지고 싶은 자, 강해 보이려는 자, 강자를 규제하려는 자 등이 꿈틀대면서, 세상을 자국에 유리하게 만들려고 하는, ‘마초 국가’들의 세계다.

    그런데 과거 국제정치와 현재 국제정치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지금의 마초 국가는 국제질서에 의해 심한 구속을 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고했던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엔 더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바야흐로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던 새 세계질서가 만들어졌고, 그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면 아무리 마초 국가라도 뒷걸음치고, 위기가 올 수 있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라고 하는 질서는 지구가 다자주의로 묶인 ‘자본주의 국제사회’의 형성을 의미한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진 지구상의 국가들이 모두 모여 다 같이 동의하는, 하나의 국제 제도로 묶인 국제질서·국제사회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엔 교통·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한 제국에 멀리 있는 다른 제국이 구축한 세계는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예컨대 로마제국이 중화제국의 일을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주변의 이른바 ‘야만인’들만 잘 관리하면 됐다. 바닷길로 무역을 하던 유럽의 제국들도 타 지역에 거점을 구축하거나 식민지를 만드는 정도였지, 무역 파트너 국가들을 모아서 하나의 세계시장을 구축하지 않았다.

    20세기 말이 돼서야 산만하고 분절된 국제질서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바야흐로 하나의 국제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국제시장 질서에, 다수 국가가 합의한 제도·규범을 따르며 참여하기 시작한 때다.

    이젠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도 세계무역기구(WTO) 자유무역 체제에 들어오면서 기존의 자유 진영과 합쳐지고, 다자주의 제도·규범이 지배하는 국제질서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본질이고, 이 질서를 법·규범 기반 국제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라고도 한다.
    이제 국가는 시장질서에 잘 적응해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 시장에서 실패하면 아무리 강대국이었다 하더라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는 미국과 중국에도 해당된다. 무섭게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이 국가들을 구속한다.

    같은 뜻, 다른 행보 ‘마초’ 국가들

    이제 다시 마초들의 세계로 돌아가 보자. 세계시장에서 월등히 강했던 미국, 세계시장에서 미국을 넘볼 정도로 강해지고 있는 중국, 과거엔 강했지만 세계시장에 적응하지 못해서 강대국 대접을 못 받는 러시아와 이란, 세계 시장에 아예 들어오지도 못해서 핵 하나로 승부를 걸어온 북한, 뭉쳐서 승부를 겨루다가 더는 진전하지 못하는 유럽.

    이들은 “다시 위대해 지자”는 구호를 내걸고 있으나 과거처럼 전쟁이라는 ‘군사적 싸움’이 아니라 시장에서 ‘경제적 싸움’을 해야 한다. 예컨대 시장에서 벌이는 경쟁에 실패한 러시아는 옛날 방식인 전쟁으로 제국 확장이라는 수단을 택했지만, 제재에 의해 시장이 막히면서 작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도 고생하고 있다. 결국 미국 정권교체기에 맞춰 전쟁 국면을 급속도로 전환하기 위해 북한에마저 손을 벌리는 신세가 됐다.

    중국은 세계시장에서 2위 지위를 갖고 있지만, 세계시장이 공산당이라는 권력을 억제하려 하니 역으로 시장을 통제하려고 들면서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시장을 이기는 국가가 나오기 힘든 것이 지금의 국제질서다.

    중국은 시장의 영향력을 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탓으로 보며 그에 대한 불신을 더 키우고 있고, 이에 세계시장에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라는 선이 그어지고 있다. 하지만 시장은 단순히 선을 그어서 절단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협력을 하지 않기가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시장에서의 경제대국’인 중국과 서방국가들은 계속 ‘밀당’을 할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강자로 인정받고 싶은 이란과 북한은 결국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나 중국에 붙어서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시장에 잘못 들어가면 정권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러시아가 가까워진 이유도, 북한이 러시아에 전투 병력을 보낸 이유도 ‘동병상련의 고통 분담’과 ‘살길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마저도 중국은 시장에서 성공한 국가이기에 시장에 불만이 있는 러시아, 이란, 북한과 일정 거리를 두면서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는 형국이다.

    미국은 다시 위대해지기 위해 미래의 시장을 자국 중심으로 개척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미래 시장의 핵심은 디지털 변환, 녹색 변환, 인공지능 등 과학기술에 달려 있다. 독점적 성향을 나타내는 이 시장을 중국이 선점하면 미국이 다시 위대해지기 어렵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에 이 시장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기조를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존재감을 잃은 유럽은 새 시장에 규제로 대응하면서 변화의 속도와 변화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한국, 군사적 대결 구도 조성은 하책 중 하책

    재차 말하건대 현재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세계는 시장에 의해 돌아가기에 시장의 구속을 벗어나기 어렵다. 러시아, 중국, 이란, 북한으로 구축된 ‘저항의 축’은 서방의 시장 질서에 맞서 다시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자존심의 축’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보려 노력해도 시장에 영원히 저항할 수 없으며,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경제적으로 더 힘들어질 것이다. 이들도 그걸 알고 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브릭스 등으로 살길을 모색하지만 결국 그 길도 시장의 길이다. 아예 사회주의국가로 돌아가는 수준의 대안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세계시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이 ‘자존심의 축’을 상대하기 위해 냉전 때와 같이 군사적 대결 구도를 만드는 것은 하책(下策) 가운데 하책이다. 시장의 역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 세계질서상 땅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적 침략을 감행하는 등 땅·지리에 연연하는 지정학적 전략은 시장의 복수를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시장의 복수에 너그러울 국민은 없다. 오늘날 국민에게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현 국면에서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한 것은 ‘자존심 연대’에 붙어가는 전략으로 봐야 한다. 물론 북한이 파병을 해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작지 않은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유 진영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야 하겠지만 러시아와 전쟁에 뛰어들려 하는 것은 시대를 잘못 읽는 일이다. 결국 ‘자존심 연대’는 시장을 이기지 못한다. 러시아와 북한이 세계시장 질서에 저항하고 독자 노선을 고집한다면 경제적 문제로 인해 러시아·북한 국민의 불만이 커져만 갈 것이다.

    러시아는 이번 우크라이나와 벌인 전쟁을 통해 전쟁으로 자존심을 회복하는 방법이 더는 용이하지 않은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을 테다. 조금 먼 장래의 일이 되겠지만, 어찌 보면 북한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개혁·개방은 시장경제로 돌아가는 러시아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러시아와 독자적으로 성급한 대결을 벌이기보다는 러시아가 시장경제에 잘 적응하도록 국제사회와 함께 유인하는, ‘중장기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유럽의 약화로 생긴 빈 공간을 한국이 메울 수 있고, 또 그러기를 바라는 국가도 많다. 한국이 강대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북·러 간 자존심 연대는 국제질서를 뒤흔들 나비효과를 일으키기 어렵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더 나은 대안을 못 찾는다면, 결국 이 마초들도 시장에 의해 통제될 것이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이른바 ‘일진’ ‘짱’들도 졸업 후 사회에 나오면 위세를 잃음과 같은 원리로 돌아가는 것이 작금의 세계질서다.

    이근
    ‌● 196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위원회 의장
    ●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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