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28 19:15최종 업데이트 24.12.2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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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국민들이 궐기할 때는 대부분의 보수 언론도 언제 그랬냐는 듯 논조를 바꾼다. 정권의 부조리에 적지 않게 기여한 그들도 소리 높여 규탄한다. 진보 언론은 진보의 가치가 위협받을 때 진보의 선명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반면, 보수 언론은 보수의 가치가 위협받을 때 보수의 선명성을 던져버리곤 한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면 그 선명성을 다시 들어 올린다.

그런 속성을 비판한 이들이 3·1운동 뒤에 도쿄에서 공부하던 독립운동권 학생들이다. 그중 하나가 훗날 4·19혁명 교수단 시위의 주역 중 하나인 변희용(1894~1966)이다. 정치 지도자 박순천(1898~1983)이 그의 부인이다.

변희용성균관대학교

동학혁명 진압을 빌미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갑오경장(갑오개혁)을 개시한 해에 출생한 변희용은 23세 때인 1917년에 게이오대학으로 유학 가 1919년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그 뒤 경찰에 구금됐다가 풀려난 그는 진보단체인 효민회·코스모구락부·전진사그룹·시월회·북성회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일본지부 등에서 활동했다. 신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전진>도 창간했다.

그런 그가 1924년 1월 '민족적 경륜'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시리즈를 일본에서 접하게 됐다. 관동대지진 및 한국인 대학살(1923.9.1.)과 그 직후의 언론 통제 속에서 한국인들의 민족감정이 끓고는 있었지만 3·1운동 때만큼 폭발하지는 않은 때였다. 조선총독부가 한국인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던 이 시점에 <동아일보>가 신년특집으로 내보낸 시리즈를 변희용과 그 동지들이 보게 됐던 것이다.


연일 톱기사로 나간 '민족적 경륜'은 1월 2일 첫 기사 서두에서부터 한국인들을 호되게 나무랐다. 민족적 계획이 없어 세상의 조소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었다. "우리 조선민족은 지금 이 조소 밧을 무계획상태에 잇는 것"이라고 기사는 꾸짖었다.

다음날 2회에서는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규정한 뒤 "조선민족은 지금 정치적 생활이 업다"고 진단했다. 기사는 그 원인을 2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해 정치활동을 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뒤 제2요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병합 이래로 조선인은 일본의 통치권을 승인하는 조건 밋헤서는 모든 정치적 활동 즉 참정권·자치권의 운동 갓흔 것은 물론이오. 일본 정부를 대수(對手)로 하는 독립운동조차도 원치 아니하는 강렬한 절개 의식이 잇섯던 것이 제이인(第二因)이다."

식민통치 밑에서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는 방법도 있고, 일본을 상대방으로 인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방법이 있는데도, 한국인들은 강렬한 절개의식에 사로잡혀 그런 방법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인들이 정치 부재라는 위기를 겪는 것은 일본이 정치활동을 금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의 절개의식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진단이다.

기사는 그런 2가지 요인으로 인해 한국의 독립운동은 "일본을 적국시하는 운동뿐"이며 "비밀결사적"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이런 방식을 지양하자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변희용 등을 욱 하게 만들었다.

참정권과 자치권 운운한 동아일보

동아일보사는 3·1운동에 놀란 일본이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문화통치 기조하에 전 경성일보사 사장 아베 미쓰이에와 친일파 진학문 등이 한국어 신문사 설립을 지원하는 상황에서 1920년 4월 1일 출범했다.

이 신문사는 3·1운동 열기가 아직 남아 있던 그해에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집중 보도했다. 아일랜드는 영국 식민지배에 저항했다가 무자비한 진압을 받았다. 영국도 일본처럼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기에, 아일랜드 역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야 했다. 이런 아일랜드에서 1919년 초부터 전개된 독립전쟁을 <동아일보>가 집중적으로 다뤘다.

2019년도 <사림> 제67호에 실린 한승훈 고려대 연구교수의 논문 '1920년 동아일보의 아일랜드 독립전쟁 보도 태도와 그 의미'는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호부터 제1차 정간까지 하루 평균 1편 내외의 아일랜드 소식을 보도했다"고 한 뒤 "1920년 9월 25일 동아일보가 정간을 당한 이유 중 하나가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보도 태도"였다고 설명한다. 총독부는 <동아일보>가 "반역심을 자극"한다고 지적했다.

문화통치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3·1운동 열기에 편승해 그런 보도까지 했던 동아일보사가 관동대지진 얼마 뒤에는 한국인들의 절개 의식이 지나치다며 참정권과 자치권을 운운했다. 이를 본 변희용과 도쿄 유학생들은 <동아일보> 불매운동에 나섰다. 원호처(보훈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제3권: 재일본한국인 민족운동자료집>은 이를 "동아일보 배척운동"으로 기술한다.

별집 제3권은 일본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사법성 형사국, 조선총독부 도쿄출장소의 보고서를 묶은 <재일본 조선인 운동자료> 등에 기초한다. 이 자료는 일본 경찰이 변희용 등을 "불량배"로 불렀다고 알려준다. 별집 제3권에 따르면, 동아일보 배척운동이 이 자료에 이렇게 적혀 있다.

"본년 1월 초순 재(在)경성 한글·한자 병용 신문 <동아일보>에 '민족 경륜'이라는 제목을 붙인 사설을 게재한 사실이 있었는데, 당시 백무·변희용·이헌·이여성·한위건·한재겸 등의 불량배는 '그 논문의 내용은 암암리에 현 총독 정치를 시인하고 또 종래의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에 조선의 자치를 요구하거나 혹은 참정권 획득을 요망하는 것으로, 이로써 <동아일보>가 당국에 매수된 것'이라 하여 유례없이 재(在)동경조선인대회의 이름으로 사죄 및 그 논설의 취소를 촉구하였으나 아무 회답이 없으므로 2월 5일 고전정(高田町) 잡사곡(雜司谷) 일화일선(日華日鮮)청년회관에서 학우회 회합을 할 즈음 이 경위를 보고하고 나아가 동사(同社)의 배척운동을 의결하였고, 이어 동월 20일 이헌을 총대표로 하고 학우회·여자학흥회·조선교육연구회·북성회·조선노동동맹회·형설회·평문사·조선무산청년회·전진사·대판조선노동동맹회 등 11개 단체 명칭이 기입된 석판인쇄 성토문 4천 매를 작성하여 일본·조선 각지 조선인단체에 발송하였다."

도쿄발 불매운동은 아무 회답이 없던 동아일보사를 긴장시켰다. 위 자료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3월 중순경 동사 사장 송진우는 암암리에 한위건에게 사자를 보내 사죄를 하였"다고 보고했다. 또 변희용·이헌·백무 등이 3월경 일시 귀국했으며 그 뒤로는 <동아일보> 불매운동이 거의 소멸됐다고 알려준다. 이들이 왜 한꺼번에 일시 귀국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변희용의 동아일보 배척운동은 독립운동의 일환

그렇게 돌아온 변희용은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조선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및 고령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경남 진양군에서 광산을 경영했다. 1932년 2월에는 동아일보사 고령지국 기자 겸 고문이 되는 다소 의외의 일도 있었다.

51세 나이로 8·15 해방을 맞은 변희용은 해방정국에서는 보수우파에 가담했다. 1945년 9월, 친일파 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에 참여했다. 1947년에는 잡지 <재건>을 통해 소련과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1975년 6월 14일 자 <동아일보> 기사 "비화 제1공화국(538) 제18화 4.19혁명[43]"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해부터 성균관대 교수로 일한 그는 친일 독재정권인 자유당 정권을 끌어내리는 4·19 혁명 때 또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승만의 하야 결심을 재촉하는 마지막 한 방이 된 1960년 4월 25일 대학 교수단 시위대에 그가 있었다.

그날 오후 5시 45분경, 구호 대신 단체명이 더 부각된 '각 대학 교수단'이라는 특이한 플래카드를 앞세운 258명의 교수들이 대학로 서울대 교문 밖으로 몰려나와 시민들을 일순간에 감동시켰다. 그 대열에 독립운동가 정석해 등과 더불어 변희용이 있었다.

변희용의 활약을 그 뒤 자세히 보도한 매체는 <동아일보>다. 이 신문의 1975년 6월 14일 자는 "백발의 변희용(성균관대)과 권오돈(연세대)이 선두에서 플래카아드를 잡고" 행진했다고 묘사한다. 이 일이 있은 다음달, 변희용은 성균관대 총장으로 영전됐다.

변희용의 동아일보 배척운동은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민중이 분노가 들끓을 때는 '보수의 선명성'을 어딘가에 예치해 뒀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꺼내 쓰는 보수 언론의 기회주의적 속성에 대한 철퇴였다. 세상의 앞길을 가로막는 보수언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그는 한민당 입당 같은 의외의 행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인 2·8독립선언과 친일정권에 대한 저항인 4·19혁명에도 기여했다. 국가보훈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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