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회장
-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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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속은 느낌이다. 트럼프의 악마 이미지에 속았고, 언론의 여론조사에 속았고, ‘샤이 트럼프’ 표심에 다시 한번 속았다.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경합 7개 주를 모두 휩쓴 트럼프의 압승에 놀랐고, 상원과 하원을 모두 잃은 민주당의 완패에 놀랐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떨고 있다. 트럼프는 완벽한 권력자로 돌아왔고, 세계는 예측불허의 반지성적인 정치인 도널드 트럼프가 제4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에. 트럼프의 재등장에 무수히 많은 질문이 쏟아진다. 어떻게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귀환할 수 있나? 반민주적 인물을 다시 선택한 미국민을 원망이라도 하듯이, 민주주의 제도가 정말 인류의 삶과 가치 실현에 적절한지 묻는다.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현실적인 질문이 터져 나온다. 미·중 대결이 심화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아니면 김정은과 관계 복원으로 한반도 평화체제로 가는 길이 열릴까? 우려와 기대가 교차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주머니를 털어갈 트럼프를 심히 경계한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통상 압력이 우리 경제에 어떤 파장을 낳을까? 312명 vs 226명.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트럼프의 압승이다. 그런데 이런 격차가 여론조사에서 드러나지 않자 또다시 여론조사에 대한 비판과 무용론이 제기된다. 여기서 언론의 태도와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등 우리에게 익숙한 주요 매체들이 트럼프 지지 여론을 정확하게 전달했는지 묻고 싶다. 그들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뉴스를 전달했다기보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여론의 흐름을 주도하는 오랜 관행에 젖어 있었다. 그 속에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제 그 계급이 적어도 서민 대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보다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이런 맥락을 간파한 트럼프는 비판적인 주요 매체들과 싸우기보다 우회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는 이슈 토론을 통해 도덕성과 전문성을 검증받는 대선 후보 토론회를 거부했다. 단 한 차례 출연한 ABC 주관 대선 후보자 토론회에서 그는 여전히 비호감 후보임을 여실히 드러낼 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후보자 토론회를 대신할 코미디·토크 팟캐스트가 있었다. 자신의 견해에 공감하는 진행자와 몇 시간 동안 대화하는 방식은 평소 정치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방법으로 판명되었다. 뉴미디어의 발달로 점점 더 확산하는 뉴스 소비자의 확증편향 현상은 이제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출현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결국 트럼프는 뉴미디어로 대중과 소통하는 승자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8년 전 힐러리 클린턴을 누르고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때 ‘샤이 트럼프’ 층이 주목을 받았다. 각종 추문과 비리, 심지어 범죄와 연루된 의혹이 제기된 트럼프를 지지할 수 있냐는 힐난이 담긴 질문이었다. 하지만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없듯이, 정치인이 유권자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적응할 뿐이다. 그래서 정치의 수준은 유권자의 민도와 비례한다는 경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후보는 어떻게 저렇게 정직하지도 깨끗하지 않은 후보에게 질 수 있는가? “10월에 필자는 우연히 워싱턴D.C.에서 로비스트로 활동하는 지인과 월가에서 대규모 자산을 관리하는 지인을 각각 만났는데, 두 사람 모두 트럼프의 승리를 기정사실로 보고 있었다.” 어느 신문의 한 대목에서 잘 드러나듯 선거는 치러지기도 전에 이미 끝나 있었다. 러스트 벨트(미국 중서부의 낙후된 공업 지대)의 백인 하층 노동자들과 선 벨트(미국 남부의 뜨거운 지대)의 보수적인 주민들로 구성된 트럼프 핵심 지지층의 지지가 얼마나 단단한지 실감나는 대목이다. 노동자 유권자의 관점에서 선거는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일까? 기후 위기의 해결? 낙태권 보장 논쟁? 북핵 문제의 해결? 아니다. 그들은 늘어나지 않는 일자리를 두고 외국인과 경쟁해야 하는 환경에 짜증나고, 임금은 오르지 않는데 물가는 한정 없이 올라 생활 수준이 하락할까 공포심에 짓눌려 있다. 그들은 거대하고 숭고한 과제의 해결보다 당장 내 삶의 개선을 기대하는 평범한 시민이다. 내일의 가치 실현보다 오늘의 생존이 시급한 이들에게 민생고를 해결할 구세주가 누구일까? 그는 당연히 현실주의적 정치가일 것이다. 이 점에서 월가의 인사들마저도 트럼프의 승산을 예견했을 것이다. “내가 집권하면 24시간 내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 실현 여부와 무관하게 정치적 수사로서 트럼프는 지지자들에게 평화를 염원하는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주었다. 반면에 민주당의 해리스 후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든 이스라엘-가자 전쟁이든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세계 평화의 주도자라는 이미지를 빼앗겨 버렸다. 그건 외교적 이미지의 문제뿐만 아니라 전쟁과 연결된 민생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결함을 보여주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명분은 사라졌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나토의 동진? 유럽의 안보위기 해결? 러시아의 고립? 그 어느 것도 현재의 지정학적 판도에 맞지 않는 질문들이다. 미궁에 빠진 전쟁에 미국 정부가 수백조원을 쏟아부어야 할 명분은 분명치 않다. 반면에 전쟁은 식량과 에너지 가격의 인상 등 세계적인 물가인상의 진앙지로서 지목될 뿐이다. 바이든의 외교정책이 노동자에게는 물가 인상의 고통을, 부자들에게는 엄청난 투자 이익을 안겨주는 상황에서 민주당의 진보적 정체성은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해리스는 이스라엘-가자 전쟁의 종식에 관한 해법과 일정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바이든 정부는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권의 반인도적이고 폭력적인 가자 지구 점령과 민간인 학살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반네타냐후 시위로 몸살을 앓았던 미시간 대학에서 해리스나 민주당에 대한 지지 표지판이나 적극적인 활동을 거의 보지 못했다는 외국발 리포트는 민심과 유리된 채 가치와 평화를 떠드는 민주당을 보는 듯하다. 과연 ‘진보적’ 민주당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유권자는 묻고 있다. 부동산 사업가 출신의 포퓰리스트 정치가 트럼프의 재등장은 세계 정치와 경제의 판도를 심하게 흔들 개연성이 짙다. 그의 선거 구호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와 ‘미국 우선주의’에 걸맞게 고립주의를 채택하며 경제적 민족주의가 강화될 전망이다. 자유무역의 기조 아래 다자간 무역협정으로 글로벌 경제 환경을 만들려는 신자유주의의 기치는 이제 마침내 종말을 고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영국 국민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통하여 신자유주의를 포기하고, 최근에 사회민주주의적 노선의 노동당 정부에게 힘을 실어준 사건과 맥락이 통한다. 이런 경향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뚜렷이 감지되는 극우 정치 세력의 약진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헝가리의 장기집권자 오르반 총리가 유럽연합과 각을 세우면서 러시아와 연대를 통해 자국의 경제구조를 재건하는 한편, 이탈리아의 극우 총리 멜로니가 정치적 인기를 누리며 경제 상황을 안정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향후 대서양 양안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고립주의적 기조를 공유하면서 축소 지향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여지가 보인다. 여기에는 당연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이 전제된다. 문제는 미·중 무역 갈등의 해법에 달려 있다. 대중 매파 인사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행보로 봐서 미국과 중국의 헤게모니 갈등은 격렬한 파열음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을 지렛대로 삼아 트럼프는 동북아의 정치적 긴장관계를 거래의 대상으로 삼을 개연성도 높다. 그는 어찌 됐든 비즈니스맨으로서 미국을 위한 재원 확보에 사활을 걸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비즈니스, 트럼프와 푸틴의 비즈니스, 트럼프와 시진핑의 비즈니스 등 다차원의 경제적·외교적 비즈니스가 전개되리라 본다. 이때 한국 정부의 유연한 대처가 매우 중요하다. 기존의 가치외교에 매달려 군사적 대치 상태를 조장하고 그로부터 이득을 얻어내려면 외교적인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 동북아에서 전쟁을 바라는 국가는 결코 없다. 북한의 약한 고리를 둘러싸고 외교전을 펼치면서 경제적 실리에 전력을 추구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 평화를 보장받고, 그에 기반하여 경제적 실리를 얻어내는 외교 전략을 구사해야 마땅하다. 어쩌면 트럼프의 비즈니스적 유연함이 한반도 평화정착에 의외로 크게 기여할 수도 있다. 국제사회의 인도적 차원에서 트럼프의 당선은 재앙적 수준이다. 당장 인류에게 닥친 시급한 문제의 해결은 더욱 요원해졌다. 예를 들어 ‘파리의정서’를 파기한 트럼프 앞에서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제적 공조는 파산 위기에 놓였다고 보는 게 현실적인 판단이리라. 역사는 다시 한번 반보 전진, 일보 후퇴의 교훈을 되새겨준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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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판세는 오리무중이다. 거짓과 혐오에 기초한 트럼프의 재선 성공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그것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 민주주의의 종언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지금 세계는 거짓과 혐오가 정치를 장악하고 적대를 넘어 전쟁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의지가 강력하게 작동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러시아 차르 푸틴의 침공으로 보이지만, 양국 간 극단적인 갈등과 우크라이나 내부의 극단적인 갈등의 산물이다. 소련 해체 이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은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체험했고, 결과는 유럽연합과 러시아 사이에서 표류하는 국론의 분열로 드러났다. 그 후 우크라이나는 집권 세력의 성향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갔고, 세계인의 관심을 끄는 지정학적 분쟁 지역으로 떠올랐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의 분열을 나토 동맹을 확장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고, 러시아는 오랜 세월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우크라이나의 이탈을 방치할 수 없었다.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은 친서방계 주민의 우세를 보여주었으나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으로 좌절되었고 친러시아계 주민의 부분적인 독립으로 귀결되었다. 이런 과정을 고려할 때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정부의 나토 가입 시도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총의를 무시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그 대가는 무수한 인명의 희생이고, 식량과 에너지 가격의 치명적인 인상으로 전 세계인이 겪는 일상의 고통이다. 1년 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 수천 발의 미사일을 쏘았고, 다수의 이스라엘인을 인질로 잡아갔다. 실로 충격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유발했다. 세계는 경악했고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의 궤멸을 선언했다. 이스라엘의 보복 전쟁은 철저하고 가혹하다. 하마스의 본거지 가자지구가 초토화되었고, 전쟁의 희생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쟁 발발 한 달 만에 사망자가 1만명을 넘었고, 1년을 맞은 지금 사망자는 4만명을 넘어섰다. 희생자의 절대 다수는 민간인이고 그중 아동의 비중이 특히 높다. 나아가 전 세계에서 몰려온 기자와 국제 구호단체의 활동가들도 적잖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 군대의 비인도적인 작전 수행은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갈수록 확대되는 분위기다. 가히 5차 중동전쟁으로 가는 지옥의 문을 열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스라엘 정부의 극단적인 보복의 이면에는 초강경 극우파 정권이 도사리고 있다. 그 중심에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있다. 1996년 역대 최연소(47세) 총리에 오른 네타냐후는 3년의 임기를 마친 후 2009년 재집권하여 12년간 권좌를 유지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정에 반대하고 군사력에 기반한 안보적 해결책으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우파 정치인으로서 외무장관 시절(2000~2005년)에 가자지구 철군과 요르단강 서안 유대인 정착촌 철수 계획 등 라빈 총리의 온건 정책을 비난하며 장관직을 사퇴한 바 있다. 12년 집권의 종말은 네타냐후의 부패 스캔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2016년 처음으로 뇌물,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되었고, 2020년 5월 금품 수수 혐의로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총리 신분으로 재판정에 섰다. 이듬해 6월 마침내 비교적 온건한 우파 성향의 야당들까지 힘을 합세하여 퇴진을 촉구하면서 네타냐후의 장기 집권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2022년 11월 그는 부활했다. 이스라엘 국민은 네타냐후에게 세 번째 집권을 허락했다. 결과적으로 위험한 선택으로 판명되었다. 그의 연정 파트너가 ‘독실한 시오니즘’, 초정통파 유대교 정당인 샤스, 보수 유대 정치연합 토라유대주의연합을 아우르는 극우 정당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의 격화, 팔레스타인 주민의 유대인 정착촌 침투와 총기 난사는 극우파 정당들이 약진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이 선거 과정에서도 이스라엘군은 테러범 색출을 명분으로 요르단강 서안 수색을 강화했고, 이 과정에서 양측의 충돌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제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국경을 넘어 지상전을 전개하는 중이다.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반이스라엘 세력의 축으로 불리는 이란을 향해서는 핵시설이든 정유시설이든 가리지 않고 폭격을 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에 대한 서방 국가의 반응은 싸늘하다. 유럽 각국에서는 반이스라엘 시위가 점점 더 폭력적인 양상을 띠고,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급기야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한 무기 공급 중단을 국제사회에 천명했다. 그러나 공허하게 들린다. 이스라엘 극우 집권 세력의 극단적인 방위권 앞에 전 세계 시민의 안전과 평화는 풍전등화의 위험에 내몰리는 형국이다. 두 개의 전쟁을 언급하면서, 문제는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80년간 국제 정치의 근간은 전쟁 재발 방지와 평화의 추구였다. 냉전은 적어도 절대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지켜내는 데 기여했고, 그 불안한 평화 속에서 인류는 성장과 풍요의 시기를 누렸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쟁이 문제 해결의 수단이 될 수 있거나 나아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늘어나는 추세가 느껴진다. 두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 국가들이 평화 체제에서 안보 강화로 전환하는 경향을 예의 주시할 만하다. 독일 연방 하원은 1000억 유로(약 150조원) 규모의 특별방위기금 조성안을 승인하며 "믿을 수 있는 강력하고 최첨단의 혁신 군대를 만들겠다"는 사민당의 올라프 숄츠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나아가 독일은 현재 18만2000명인 정규군 병력을 2030년까지 20만3000명까지 늘리기로 했다. 이런 추세는 지난 5월 발표된 영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보고서에서 확인된다. 2023년 전 세계 국방비 지출은 2조2000억 달러(약 2948조원)로 전년보다 약 9% 증가하여 사상 최대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 국제평화문제연구소(SIPRI)도 “지난해(2023년) 세계 149국 중 3분의 2가 넘는 69%가 전년 대비 국방비 지출을 늘리며 전체 국방비 지출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나토 회원국들의 국방비 확대도 의미심장하다. 작년과 올해 나토 정상회의를 계기로 회원국들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율을 2% 이상으로 늘리기로 했고, 영국과 폴란드 등은 이미 2.5% 수준으로 국방비를 급격히 끌어올렸다. 스웨덴·핀란드·독일 및 발트 3국(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등은 일제히 징병제 부활에 나서거나 검토하면서 병력 확보에도 나섰다. 언론 기사는 마치 유럽에 전면전의 위기가 다가오는 듯 보인다. 언제 전쟁이 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50년 이상의 번영과 평화가 있었다. 전쟁이 4년간 지속되고 1000만명의 희생자를 내며 유럽을 파국으로 몰아넣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 청년들은 전쟁을 병정놀이처럼 여겼고, 기성세대는 전쟁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전쟁은 단기간에 끝나고 예전의 평화와 번영이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지만 커다란 착각이었다. 풍요로운 성장과 위협적인 혁명 기운이 공존하던 벨 에포크 시절에 유럽인은 전쟁의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잃고 전쟁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있었던 셈이다. 당시 주전론자들은 ‘전쟁은 정치적 최종 수단’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비웃으며 ‘정치는 일상적인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정치를 전쟁의 일부로 대하는 인식이 바로 파시스트적 정치의 핵심이다. 이탈리아 국민이 무솔리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정치인을 총리로 선출했고, 가장 자유로운 나라로 알려진 네덜란드에서 극우파 정부가 들어섰다. 나아가 영세 중립국을 표방한 오스트리아 국민이 나치 잔당이 조직한 정당을 제1당으로 선택했다. 아직 프랑스와 독일이 각기 중도우파 마크롱과 중도좌파 사민당의 집권으로 극우 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고 있지만 프랑스의 극우파 대통령 당선이나 독일의 극우파 정당 탄생은 시간문제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먼 나라만의 얘기도 아니다. 극우 파시스트적 정치 인식이 우리 곁에서도 부활하고 있다. 대화를 통한 평화보다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며 광화문 거리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벌이는 광경은 공포감을 자아낸다. 무력에 의한 평화는 필연적으로 파국을 동반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평화인지 묻고 싶다. 전쟁을 불사하는 평화는 반국가적이고 반인륜적인 무책임한 정치 행위임을 명심하자.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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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대학을 둘러싼 변화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중 하나가 지방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였다. 지방 출신 학생들이 부산대를 비롯한 그 지역 최고의 국립대학보다 서울의 중하위권 대학을 선호하는, 소위 ‘인서울 대학’ 진학 열풍이 놀랍기도 하고 석연치 않기도 했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기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을 넘어 대학 진학을 위한 청년의 서울 집중은 지방의 공동화를 부추기며 한국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리라 예고됐다. 그 와중에 지방대에 몸을 담게 되면서 필자는 지방대를 둘러싼 많은 문제를 체감했고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안동대 부임 후 첫 강의에서 출석을 부르던 광경은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가나다순으로 쓰인 출석부 첫 페이지에 권씨 성을 지닌 학생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동과 주변 시·군 출신 학생이 절대다수를 차지했고, 일부 학생의 학력은 서울 소재 대학 재학생들 못지않게 탄탄해 지역 대학의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던 그 무렵부터 벚꽃 지는 순서대로 지방대가 소멸할 거라는, 소위 ‘벚꽃엔딩’ 유행어가 생겨날 정도로 비수도권 지역 대학들의 위기론이 항간에 떠돌았다. 진보 성향의 지방대 교수들은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 주장으로 지방대의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정부 역시 지역 대학의 위기를 간파하고 있었다. 나중에 확인했지만, 김대중 정부는 이미 2000년에 ‘지방대학 육성 대책’을 제시하며 우수 학생의 수도권 집중 현상의 심화가 지방대 위기의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진단 아래 정부는 지방대학의 자생력 강화, 권역별 산·학·연 연계 체계 구축 및 지방대학 학생 취업 기회 확대 등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지방대의 위기는 해소되기는커녕 악화 일변도로 진행되었다. 참여정부 이래 역대 정부는 위기 해소를 위한 적극적인(positive) 정책 대신 ‘선택과 집중’, 즉 일부를 도태시켜 일부를 구제하는 소극적인(negative) 정책으로 위기 탈출에 나섰다. 강압적인 대학 정원의 감축과 대학 간 통폐합으로 대학의 개체 수와 규모 적정화 작업이 시작되며 국립 상주대, 밀양대, 여수대, 익산대, 삼척대 등 산업대에서 출발한 대학들이 대형 국립대에 통합되어 사라졌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부는 구조조정과 연계된 대학평가와 재정지원사업을 펼쳐 대규모 대학 정원을 감축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당연히 지방대학의 정원 감축이 수도권 대학을 압도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방대학 살리기’ ‘지방대학 경쟁력 강화’ 구호는 사라지지 않았다. 2010년 중반 이후 지방대학 위기는 지역의 소멸과 연계되어 공멸의 위기, 나아가 국가의 위기로 확대되었다. 통폐합으로 사라진 대학이 입증했듯이, 해당 지역의 인구 감소와 경제 타격이 현실로 드러났고, 지자체가 지역 대학의 존폐를 걱정하며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정부는 2010년대 중반 이래 ‘지방대육성법’을 제정하고 여러 차례 개정하여 보강하였다. 이 법에 따라 교육부 장관은 5년마다 기본계획을 세우고 그에 필요한 정책을 시행하는데, 지방대학 지원책으로 해외 교류·연수 사업 등 균등한 기회 보장, 공무원 임용 기회 확대, 공공기관 등 채용 확대, 대학의 입학 기회 확대 등 내용이 법안에 담겼다. 하지만 이 법의 실효성은 의문이다. 법안의 지원책에 충실하게 따른다면 지역 인재에게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의 사원이 될 기회는 늘어나는 반면 훨씬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에 대한 지원책도, 기업이 제공하는 혜택도 없다. 국가권력이 사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위헌적 요소를 띠고 있다는 측면을 고려하면서도 실제로 우량 기업에 도전하고 싶은 학생들에게 기회를 열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쉽기 짝이 없다. 지방에는 학생들이 선호하는 기업이 없고 사기업은 상위권 학생을 선발하려고 한다면 지방대육성법은 한계가 뚜렷하고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수도권으로 이탈하는 지역 학생들의 욕구를 효과적으로 누르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지방대 학생의 시야를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취업에 가두지 않을지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갈수록 깊어지는 지방 소멸을 막기 위한 국정과제로서 윤석열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지방대학 시대’를 표방했다. 지방대학에 관한 행정적·재정적 권한을 지방정부에 이양하고, 대학과 지방정부 및 지역 기업이 연계하여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 자생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에 따라 등장한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는 지자체의 대학 지원 권한을 확대하고 각종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선택과 집중에 의한 재정투자를 추진할 수 있게 했다. 지역의 사업 주체들은 자율적으로 목표를 설계하고 예산사업의 우선순위와 사업 기간 등을 조정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 체계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지방대학에 한정하여 세계적인 수준의 글로컬대학30 육성사업을 시행 중이다. 그런데 글로컬대학30에 들지 못한 대학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은 제시되지 않아 그들이 실제로 부실 대학으로 낙인찍혀 도태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도태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는 완비되어 있는지, 나아가 도태 위기에 처한 대학법인이 퇴출 수순을 밟을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대학이 도태되었을 때 해당 지역 사회의 주민과 지자체의 반발은 없을까? 이런 우려스러운 질문은 사립대의 특수한 정체성과 연계된다. 사립대가 개체 수로 보나 학생 수로 보나 대학 체제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기이한 현상은 후진국 시절 대한민국 정부가 대학을 설립할 재정이 부족하여 민간 자본에 의존한 결과였다. 특히 지역의 사립대는 경제성장 과정에서 산업인력을 양성하는 요람이었고, 지역 사회의 고등교육 수요를 충당하는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서 우리는 부산의 동아대, 대구의 영남대, 광주의 조선대, 익산의 원광대 등 지역을 대표하는 사립대학들의 이름에 익숙하고, 그 대학들이 지닌 학풍과 강점 그리고 대표 학과들의 존재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간 국가는 부단히 사립대 설립을 독려하면서 행정적·재정적 혜택 없이 사립대를 관리와 통제 아래 두었고, 사학법인은 교육이라는 공공기능을 수행하는 비영리재단으로서 교육 수혜자가 내는 학비에 의존하여 경영했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함께 고등교육 규모가 확대되면서 점차 사학법인은 사회적 자본과 권력을 가졌고, 자율성을 내세워 법인 운영의 특수성을 주장했다. 그 결과 사유재산으로서 사립대는 공공적 고등교육기관의 가치를 자의적으로 축소하기 일쑤였고, 국가적 관점에서 대학정책 전환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따라서 사립대의 선택과 집중에 따른 도태는 저항에 부딪힐 여지가 많고, 실제로 교육부는 수년 전부터 한계 대학을 지정하고 퇴출을 시도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종합해 보면 지난 20년은 대한민국 고도 경제성장의 조정기로서 대학에도 체질 개선을 위한 전환기였다고 할 수 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우리의 기업 체질이 바뀌었듯, 교육당국도 1995년 ‘5·31 교육개혁’으로 변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런데 5·31 교육개혁을 포함하여 이후 추진되는 모든 대학 정책은 항상 양적 성장과 외형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통계적 수치 상승 예를 들어 대학평가의 서열 상승에 성패를 걸었다. 5·31 조치로 경쟁 원리가 대학교육의 영역에 적용되면서 대학의 서열이 대학에 대한 국민의 의식을 지배했고, 대학 문제는 대학입시에서 절정을 이루고 대학 자체의 질적 개선에 대한 논의는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지방대의 관점에서 보면 경쟁체제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작동하였다. 재원과 인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수도권 집중 현상이 방치 또는 조장되는 가운데 지방대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고 서열과 평판의 추락은 학생의 수도권 이탈로 이어졌다. 지방대육성법으로 대표되는 지방대 살리기는 그래서 사실상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마치 재원을 수백조 원 투입하고도 인구 감소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는 인구 정책 실패와 매우 흡사하다. 그렇다면 지방대를 살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도토리 키재기식 평가를 통한 선택과 집중 방식이 재고되어야 한다. 사립대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하여 자발적인 토대의 한계를 극복할 방안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최근에 다시 한번 발의된 ‘사립대학구조개선법’이 왜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번번이 폐기되는지 곱씹어 봐야 한다. 이제 국립대학법과 사립대학법을 제정하여 새로운 대학체제의 발판을 만들 때가 되었다. 더불어 사학법인의 건전한 대학 경영을 유도하기 위해 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가 준비하고 있는 ‘법인평가’의 제도화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진지하게 실행할 준비에 착수해야 한다. 더불어 ‘지방대학 시대’처럼 신기루 같은 구호로 지역주민을 혹세무민하는 정치가 그쳐야 한다. 대신 국가교육위원회 주도로 향후 10~20년간 지속되는 가칭 ‘대학체제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장기 대책을 세워야 한다. 전 세대가 참여하고 사회 각 계층의 대표자들을 골고루 선임하고 성비의 균형을 갖춘 위원회 말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백년대계로서 미래 세대에 의한, 미래 세대를 위한, 미래 세대의 대학 체제를 수립하는 장도에 올라야 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대학의 가치와 위상이 재정립되어야 한다. 대학이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평생교육기관으로 전환할지, 취업사관학교로 재편할지, 아니면 연구기관으로 남을지, 수도권과 지방의 소재에 따라 대학의 기능을 분리할지, 궁극적으로 지방에 대학이 존재해야 하는지? 모든 질문은 열려 있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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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구도심이 확연하게 활기를 잃어간다. 방학을 맞은 주말 오후에도 학생과 청년들이 거리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계절에 따라 각종 행사가 펼쳐지곤 하던 조그마한 광장에 맞닿은 거리의 모퉁이에는 1년째 상점들이 비어 있다. 거기에는 배스킨 라빈스, 투썸플레이스 그리고 올리브영 같은 인기 있는 상점들이 마주 보고 있었다. 생기를 잃은 거리의 모습은 지방 소도시의 소멸이 이미 상당히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불가마 같은 날씨에 쇼핑하는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물론 시내를 벗어나 골마다 자리 잡은 마을의 모습은 일찌감치 시들어가서 이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면의 초등학교의 신입생 전원이 다문화가정 출신의 아동들이라고 합니다.” 수년 전 현직 초등교사에게서 전해 들은 이 말은 전반적인 상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인구 이탈에 따른 초·중등학교의 통합과 폐쇄는 진행되었고, 그 속도는 최근 들어 훨씬 빨라졌다. 학교 통폐합 권고 기준(전교생 60명 이하)을 적용하면, 현재 경상북도에서는 351곳이 문을 닫아야 한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대학교까지 개체 수를 줄이거나 대규모 학생 수 감축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리라 예상된다. 얼마 전 도시에서 가장 큰 병원에는 ‘27만 → 15만, 인구 44% 감소’라는 전광판이 번쩍거렸다. 불과 30년 만에 벌어진 인구 소멸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경고하였다. 물론 인근의 봉화, 영양, 청송 같은 군 단위로 가면 더욱 심각하다. 소도시의 출산율이 대도시 특히 서울보다 높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인구 감소의 결정적인 원인은 청년이 도시를 떠나는 현상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도시를 살리는 길은 청년 이탈 방지에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인간의 삶의 조건과 직결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현실에서 서울과 수도권으로 이주하지 않고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도시의 조건은 무엇일까? 하나는 건강권의 보장이다. 필자에게는 매우 아픈 경험이 있다. 10여 년 전 학생이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여러 시간이 지나도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응급실 의사는 대도시 후송을 결정했다. 가슴 졸이면서 후송차를 뒤따라 갔지만, 학생은 결국 후송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중소도시에서 영위하는 삶에서 필자가 느낀 최초의 회의적인 사건이었고, 나와 가족에게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교육권의 보장이다. 우리 국민에게 교육은 의무이자 희망이다. 교육을 통한 사회적 성공은 모든 부모의 열망이었고, 국가적 경제성장과 선진국 진입의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앞서 말한 학교의 소멸은 사실상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드는 현상이고, 국가적 쇠락의 징조라고 할 수 있다. 나고 자란 곳에서 교육을 받고 어디서나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시스템이 유지되어야 당연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교육의 평등한 수혜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불신을 받고 있다. “초등학교까지 다녔으면 됐지요”라면서 자녀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서 수도권으로 이주하던 어느 교수의 당당한 모습은 기본권으로서 교육이 지역 간 격차에 따라 크게 훼손되고 있음을 각인시켰다. 다른 하나는 노동권의 보장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영위할 경제적 여유가 절대적인 삶의 기본조건이다. 필자가 사는 도시에는 산업단지는커녕 변변한 공장 하나 없다. 개인 경험에 따른 도시 주민의 직업 분포를 볼 때, 다수가 공공 분야와 의료 서비스 분야에 종사한다. 인구 대비 공무원과 교원의 비율이 상당히 높고, 크고 작은 병원에 종사하는 인력을 어디서나 자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대규모 산업단지가 없는 지방 중소도시들이 대체로 이런 모습을 띠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소도시 대학의 재학생 중 다수가 공무원이나 공사 직원을 꿈꾸며 미래를 준비하고, 간호 계열의 학과들이 높은 입시 경쟁률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물론 지자체가 지역 특성에 맞는 산업 분야를 개척하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1960~70년대 울산, 포항, 구미 등 대규모 산업도시 건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산업화 사회로 발전하였듯이, 21세기 산업구조 재편에 따른 새로운 개념의 국가적인 산업 육성 전략에 따른 거대한 투자로 정보화 사회로 진화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건강권, 교육권 그리고 노동권의 보장 없이 지방 도시의 소멸을 막을 수 없다! 여기에 하나를 보충하자면, 문화권의 보장이다. 선진국 대한민국의 국민은 먹사니즘에 국운을 걸어야 하는 시기를 건너왔다. 이제 국가는 국민의 삶을 보살피는 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한편, 삶의 질을 높이는 정책에 진심을 보여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정보에 접근할 권리를 보장하는 유비쿼터스 사회, 문화와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과 기획을 시민에게 제공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정책의 질적 향상이 필요하다. ‘지역에 있으면 따분해서 못살겠다’는 지역민의 푸념에 정부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다문화사회의 정착에 달려 있다. 인구 감소의 시대에 이민자와 난민의 수용은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나, 노동력 확보의 차원에서나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고 본다. 유럽의 선진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결같이 다문화사회의 정착을 통해 경제성장과 복지사회를 이룬 경험을 공유했다. 독일의 라인강 기적은 터키를 비롯한 외국 노동자들의 수용 없이 불가능했고,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도 이런 맥락에서 독일에 정착한 사례이다. 단일 민족의 서사는 이제 효력을 다했다. 국가주의적 발전 전략을 넘어서 글로벌 차원의 선진국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하여 다문화사회의 연착륙은 절실하다. 적정 인구의 유지, 경제성장의 필요한 노동력 확보 및 열린 사회의 건강한 적응 능력 등 다문화사회는 미래 한국사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유지와 동아시아 번영의 공동체 형성에도 적잖이 기여할 것으로 상상한다. 오늘 국민은 삶에 지쳐 있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미래를 걱정한다. 그들의 다음 세대가 살아갈 사회가 어떨지 혼돈 속에 불안을 감추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지방에 거주하는 국민은 ‘2등 국민’의 열패감을 안고 살아간다. 눈떠 보니 ‘2등 국민’으로 평가받는 지역 간 격차는 정치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 중 으뜸이다.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에 배회하는 ‘국가균형발전’의 구호를 ‘2등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실현하는 정치세력의 등장을 갈구한다. 미래 대한민국의 국운이 걸린 국가적 어젠다로 설정하여 강력하게 추진하는 세력 말이다. 그리하여 누구든 대한민국 어디 살든 기본 권리를 누리는 사회가 다음 세대에 실현되기를 염원한다. 대한민국 사회는 이미 근본적인 변화에 진입했다. 인구 감소에 따라 모든 방면에서 축소지향의 논리가 적용되는 사회로 진입했고, 산업구조의 재편과 기후위기의 따른 에너지 전환이 인류 사회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가리라 예상한다. 이런 변화 속에 우리는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 다음 세대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특히 대한민국의 ‘2등 국민’은 어떤 환경 속에서 살 것인가? 그에 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답변으로 현재까지 가장 포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전망을 필자는 조국혁신당이 내건 ‘사회권 선진국’ 개념에서 단초를 발견한다. 주거권, 교육권, 건강권, 돌봄권, 노동권, 환경권, 문화권, 디지털권 등 8대 기본권이 어떤 비전 아래서 어떤 정책으로 구현되어 국민을 설득할지 주목하는 바이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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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에게 부처님은 일갈한다. “부끄러움의 옷은 모든 장식 가운데 으뜸간다. ··· 항상 부끄러워할 줄 알고 잠시도 그 생각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만일 부끄러움을 버린다면 모든 공덕을 잃게 된다.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착한 법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유교경)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전)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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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슈퍼 선택의 해’라 불릴 만하다. 연초에 대만의 대선과 총선을 필두로 한국의 총선과 러시아의 대선이 치러졌고, 다음 달에는 유럽의회 선거와 인도 총선이 기다린다. 지구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련의 정치적 이벤트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11월 미 대선이 대미를 장식할 전망이다. 그 와중에 당장 다음 달 6일부터 9일까지 치러지는 유럽의회 선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극우 정당의 약진 여부에 따라 기존 유럽연합의 녹색·무역·이민 정책 및 대외관계에 심대한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도 이미 이에 대한 대비에 들어갔다. 지난 2월 산업통상자원부는 ‘유럽연합 경제‧정치 전문가 간담회'를 열어 유럽연합 내 정치지형 변화에 따른 향후 경제정책 전망과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에 대해 논의했다. 경제안보와 녹색산업정책을 강조하는 정책기조가 지속되리라고 전망하면서 지정학적 불안정성과 물류, 공급망, 에너지 가격 등 현안 타개를 위한 유럽연합과의 협력 강화 및 제도와 규제의 탄력적인 적용이 논의되었다. 극우 정당들의 경제정책은 ‘반(反) 기후 정책행동’으로 집약된다. 그들은 넷제로(Net-Zero)와 탄소세 등 기성정당의 에너지 전환정책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함으로써 실제로 에너지 전환정책으로 고통을 겪는 계층의 표를 흡수한다. 최근 몇 년간 전 유럽에서 빈발한 농민 봉기가 이를 입증한다. 질소계 비료 사용이 제한되자 농민들은 브뤼셀 유럽연합 본부로 트럭을 몰아 항복을 받아냈고, 같은 맥락에서 독일 정부는 농업용 디젤 보조금 삭감과 농업용 차량 세금 감면 폐지를 철회했고, 프랑스는 연료세 인상을 보류했다. 이제는 중도 계열의 정당들마저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그린딜(Green Deal)을 완화하겠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실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통상마찰까지 우려해야 하는 탄소국경세가 순조롭게 도입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후를 보호무역 구실로 삼지 말라는 중국과 인도의 경고, 처음부터 탄소국경세 도입에 비판적인 미국과 호주의 태도는 극우 정당의 입지를 강화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미 유럽연합 내부에서도 개인의 부담이 상당히 큰 탄소국경세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다. 2주 앞으로 다가온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에너지 전환보다 더욱 첨예한 쟁점은 이민정책이다. 그 뒤를 이어 러시아와 중국 문제, 환경·기후 보호, 경제나 경쟁력과 관련된 국제 갈등과 위협 문제들이 거론된다. 5월 초 설문조사에서 유럽연합의 이민정책에 대한 만족도는 유권자의 31%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현재 유럽연합은 유럽으로 오는 난민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최근 ‘신(新)이민·난민 협정’을 가결했다. 이에 따라 난민 신청자를 제3국으로 인도하는 조치가 가능해졌고, 유럽연합은 제3국과 협정을 체결하고 재정 지원을 제공할 수 있게 됐다. 터키, 이집트, 튀니지 및 레바논은 유럽연합과 또 다른 난민 협정을 체결했다. 유럽으로 이주를 어렵게 하는 이러한 조치와 협정이 유럽 내 유권자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극우 정당의 반(反) 난민 정책의 확산을 입증해 준다. 그렇다면 실제로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세력은 어느 정도로 약진할까? 그들이 유럽의회 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 여러 나라의 여론조사를 종합하면 극우세력의 약진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5년 전 선거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은 20석 확대에 그쳐 약진 예상에 미치지 못한 전례가 있음을 상기할 필요는 있다. 근래 프랑스에서 28살의 젊은 국민연합 당수 바르델라가 이끄는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의 인기는 대단해 보인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민연합의 지지율은 31.5%를 기록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중도 성향 르네상스당 지지율 17%보다 거의 두 배 앞섰다. 프랑스 우파 의원의 분석에 따르면 유럽의회 위원회의 의장 또는 부의장직이 극우 계열로 넘어갈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극우 계열의 ‘정체성과 민주주의’(ID)와 ‘유럽 보수와 개혁’(ECR)이 연합해 유럽연합의 우크라이나 지원 정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가디언은 ID가 현재 59석에서 85석으로 늘어 제3그룹으로 도약하는 한편, 중도 계열의 ‘리뉴유럽’(RE)은 현재 102석에서 80석으로 대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또한, 로이터는 ECR이 30~50석을 늘려 극우그룹의 전체 의석 비중이 현재 18%에서 22~25%로 커질 것으로 예측했다. ECR에는 폴란드의 ‘법과 정의’(PiS),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의 ‘이탈리아 형제단’, 스페인 Vox 등이 속해 있다. 독일에서 발행되는 빌트 일요판(Bild am Sonntag)을 위한 여론조사기관 Insa의 최신 조사 결과(성인 1000명의 온라인 설문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의회 내 최대 정파인 ‘유럽국민당’(EPP)을 주도하는 기민련이 30%의 지지율을 차지하기에 극우 정당에게 주도권을 내어 줄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은 현 집권당임에도 불구하고 14%에 그쳐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연정파트너인 녹색당도 13%를 기록하며 정체상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 기존 정당들의 지지율 부침에 비해서 독일의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지지율은 최근 17%로 안정세를 보이는 중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정세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연초부터 AfD에는 악재가 연달아 터졌다. 지난 1월 매체 ‘Correctiv’의 폭로로 AfD 의원들이 오스트리아 극우파 정치인 등과 함께 수백만 명의 외국인을 독일에서 추방하는 계획을 모의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독일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최근에는 AfD의 당수 막시밀리안 크라가 중국 스파이 혐의로 조사를 받는 가운데 이탈리아 언론매체와 인터뷰하면서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 SS)의 제복을 입었다고 해서 모두가 자동으로 전범자였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발언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 국민연합과 이탈리아 ‘동맹’(Liga)은 AfD와 결별을 선언했고, ‘정체성과 민주주의’(ID)는 AfD 소속 유럽의회 의원 9명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악재 속에서도 지난 조사와 동일한 지지율이 나왔다는 점이 매우 시사적이다. 나아가 독일 사회는 정치인을 향한 테러로 매우 뒤숭숭한 상황이다. 5월 8일, 사민당 소속 프란치스카 기파이 베를린 경제장관이 베를린 노이쾰른의 한 도서관에서 일정을 수행하던 중 괴한이 휘두른 둔기에 머리를 맞았다. 범인은 정신질환 이력이 있는 74세 남성으로 알려졌다. 그보다 앞선 5월 3일, 사민당 소속 마티아스 에케 유럽의회 의원이 동부 작센주 드레스덴에서 유럽의회 선거 포스터를 붙이던 중 10대 청소년 4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두 사례는 집권 사회민주당 정치인을 향한 독일 동부 주민들의 증오를 보여준다. 그런데 노인과 청소년이 가해자라는 사실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불만이 광범위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더욱 놀랍게도 2023년 한 해에만 선출직 공무원을 향한 범죄가 독일에서 2710건 발생해 전년 대비 53% 늘었다고 독일 내무부가 발표했다. 독일 정부는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대처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공표했지만, 정치적 성향 차이를 적극적인 반감과 테러로 표출하는 행태를 과연 어떻게 얼마나 잠재울지 의문이다. 유럽에서 극우세력 확산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자유와 관용의 나라로 여겨지던 네덜란드나 스웨덴에서도 극우세력의 약진이 우려스러울 정도다. 그런 점에서 현재 유럽정치는 1930년대 유럽을 연상시킨다. 대공황의 여파 속에 군림하던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 파시즘 체제가 2008년 경제위기와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 속에 득세하는 극우세력들한테서 재현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실제로 독일언론은 이탈리아 총리 조르자 멜로니를 파시스트 계승자(Postpfascistin)라고 지칭한다. 멜로니가 건재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국민연합 후보나 독일의 AfD 후보가 대통령이나 총리가 되는 순간 유럽의 정치 주도권은 완전히 극우세력에게 넘어갈 게 자명하다. 독일 정치인 테러 급증과 지난 5월 15일 일어난 슬로바키아 총리 암살 기도 같은 사건들이 유럽 민주주의 소멸의 전조 증세로 보이는 건 필자의 과민반응이길 바란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전)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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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당 108 대 야당 192! 대통령과 집권당에 대한 국민의 심판은 예상보다 가혹했다. 개헌만 함부로 넘보지 못하는 선에서 정치권 전체를 향하여 ‘이제 알아서 잘해라!’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누구든 대통령이 다음날 국정 운영의 전향적인 기조 변화를 담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대국민 사과문은 없었고 오히려 국무회의 모두 발언을 통해서 ‘열심히 했지만 국민이 진심을 알아주지 않았다’고 억울한 심경을 피력했다. 그러자 집권당은 당선자 중심으로 미래지향적 혁신 대신에 정권 옹위를 참칭한 자기방어에 돌입했다. 대통령의 실정을 가리고 ‘친윤’당으로 선거를 치러 당을 민심에서 분리한 사람들이 비서실장이 되었고, 이른바 ‘찐윤’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될 개연성이 매우 높아졌다. 물론 집권당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 “여권이 방향을 제대로 못 잡으면 예정된 코스는 탄핵이다.”(김해을 낙선자 조해진) “보수 정치인이 오히려 걱정을 더 끼치고 민폐를 끼치는 집단이 되고 있다.”(창원마산합포 당선자 최형두) 그러나 고통스러운 성찰과 변화를 외면하고 당보다 개인이 우선하는 분위기가 압도하면서 국정 실패의 위기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어느 평론가는 위기의식이 느껴지지 않는 현 집권당의 태도를 두고 국민의힘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국민의힘은 죽지 않는다. 다만 민심의 엄중한 경고의 의미를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위대한 정신승리에 빠진 ‘아큐(阿Q)의힘’으로 남아 대한민국의 리스크로 작동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22대 총선을 통해 대한민국 정치 지형은 세 가지 특징을 드러냈다. ①동서 분단 지형. 선거 개표방송의 지도에서 동쪽의 붉은색과 서쪽의 푸른색이 너무나 극명하게 대비되어 지역감정이 여전히 투표 성향을 결정하는 항수임이 확인되었다. ②빈부 대립 지형. 비수도권과 달리 서울에서는 자산 격차가 투표 성향과 거의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강남과 강북이 확연하게 갈리면서 아파트 시세가 높은 지역은 거의 예외 없이 집권당 후보자를 지지했다. ③세대 갈등 지형. 60대 이상 노인층은 집권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고, 젊은 층과 중년층은 집권당에 대한 심판 정서가 뚜렷하다. 이런 특징들이 인구 분포와 소선거구제의 승자독식 원리와 맞물려 극심한 정치적 갈등을 넘어 국론 분열의 양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치 개혁이 시급한 이유다. 이번 총선에서 집권당의 참패는 한국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위대한 국민의 선택으로 정의되어야 마땅하다. 다시 말해서 거대한 퇴행을 저지하라는 국민의 경고였다. ①‘독재화 국가’ 저지. 입만 열면 자유를 강조하는 대통령이지만 정작 공권력은 비판자의 ‘입을 틀어막고’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는 무도함을 보였다. ②경제적 양극화 저지. 대파 총선으로 불릴 만큼 물가 상승은 총선 결과를 좌우했다. 부자 감세와 건전 재정을 고수하며 서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③차별적인 사회의 저지. 학벌에 의한 차별,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남녀의 차별적 임금, 장애인 차별 등 우리 사회는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안전과 인간답게 살 권리에 대한 인식이 약함을 준엄하게 경고했다. ④국격 추락의 저지. 자유민주주의와 한·미 동맹은 대한민국의 태생적 한계이자 디폴트값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미국 중심의 일방적인 가치 외교는 외교적 고립을 자초했고 국격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대한민국이 차기 G7 회담의 초청국에서 배제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리부팅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뛰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처한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정밀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면 우리는 과거 남미 국가들처럼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가장 먼저 총인구 감소와 인구 편중에 따른 경제적·사회적 부담을 냉정하고 치밀하게 분석하고, 그에 상응해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인구 감소는 곧 국가 총역량의 감소를 의미한다. 학령인구의 감소, 입대 자원의 감소, 노동력의 감소, 소비자의 감소 등 국가와 사회 전반의 침체를 의미한다. 또한 기후 환경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절실하다. 극단적인 기후 변화는 지구상 곳곳에 상상할 수 없는 홍수와 산불을 야기하고 인간과 동물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탄소중립을 향한 국제사회의 합의에 보조를 맞추고 그에 호응하는 산업적 체질 전환을 모색하고, 국민의 동의와 호응을 이끌어내는 정책적 수단과 대책을 총동원하는 전향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대전환의 시점에 서 있음을 명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인구구조의 대변화는 출발점이다. 50년 전 이 땅에는 100만명씩 새 생명이 태어났다. 경제는 성장했고, 사회는 발전했고, 모두가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았다. 이제 그 수는 20만명대로 줄었다. 장기적으로 확대 지향의 사회에서 ‘축소 지향의 사회’로 갈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지표다. 예를 들어 100만명 시대의 교육은 무한 경쟁체제와 능력지상주의를 지향할 수 있었지만 20만명 시대의 교육은 한 명 한 명의 재능과 특기를 살리는 보편적 공공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주택, 의료, 복지, 국방 등 모든 분야가 그 속성에 맞게 전환의 시스템을 서둘러 갖춰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추격형 후진국에서 선도형 선진국으로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제조업 중심 산업경제는 탈근대적 정보산업 중심 지식경제로 전환 중이다. 노동집약적인 경제 체질을 지식 기반의 창의적인 경제 모델로 근본적으로 재구조화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파이낸셜타임스의 한국 경제에 대한 지적은 참으로 우려스럽다. 매체는 한국 정부의 용인 반도체 단지 투자를 한국형 모델 개혁 의지가 없거나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제조업-대기업이라는 전통 성장 동력에 기대고 있다고 폄훼했다.(프레시안, 4. 22) 더불어 서울과 수도권 일극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발전하는 모델에서 벗어나 비수도권 지역에 다극점을 형성하고 분산형으로 발전하는 모델로 전환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는 궁극적으로 코리아A와 코리아B로 분열하는 양상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것은 과밀 수도권과 텅 빈 지방의 극명한 대비 속에 상대적 박탈감을 극대화하고 서로를 공격하는 파괴적이고 적대적인 대립을 야기할 수 있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부산이 진정 ‘노인과 바다’의 도시로 전락하고, 안동이 노인만 사는 ‘정신문화의 수도’로 소멸하는 과정을 지켜볼지 모른다. 어찌할 것인가? 건강한 정당정치의 정립과 새로운 리더십의 창출이 답이다. 결국 국가적·사회적 문제의 해결 방안은 정치에 있다. 공동체의 미래와 구성원의 삶은 사회적 재화의 효과적인 생산과 정의로운 분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근대적 민주정치는 좌우 세력의 균형으로 유지된다. 좌파가 잡든 우파가 잡든 상호 견제를 통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일방적이고 과격한 폭주는 그만큼의 반동을 낳는다. 역사의 교훈이다. 이번 총선의 패배로 한국의 보수세력은 퇴출 위기에 놓였다. 필자가 보기에 그들은 보수를 참칭하는 극우 세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반공주의와 경제성장을 빼면 사실상 그들의 이념적 토대라고 할 게 없다. 요사이 세계경제의 위기 징후는 한국 보수세력에 불안한 토대이다. 이제 바라건대 그들은 중도 우파적 정치세력으로 거듭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보수적 가치를 재정립하고, 중도 우파 정당의 견실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보수의 떴다방 정치가 낳은 산물이 윤석열 검찰총장의 대통령 직행이었다. 정치 9단도 모자랄 판에 정치 하수의 대통령직 수행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의 실패는 보수의 실패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의 실패라는 사실이 아프다. 지금은 제1야당의 시간이다. 필자가 보기에 더불어민주당은 진보적 정치세력이기보다는 중도 좌·우파가 뒤섞인 개인사업체들의 집합체에 가까워 보인다. 극우적 보수의 관점에서 그들은 진보로 규정되고, 보수언론은 맹목적으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그런 오해가 촛불 민심을 왜곡하고 국민에게 실망을 안기는 결과로 드러났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지만 사실상 제대로 실력을 보여준 적은 없다. 문재인 정부가 적기였지만 실패했다. 이제 명실상부한 중도 세력의 대중적 정당정치를 대변하는 민주당은 중도 좌파적 위치에서 수권 정당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87체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토대로 대전환의 기조를 세우고 정밀한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마지막 기회다! 이번에 실패하면 국민은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고 자포자기할지도 모른다. 이번 총선에서는 정치 지형에 변화를 가져올 새로운 요소가 등장한 점이 가장 큰 이변으로 꼽을 만하다. 중도 우파적 가치를 지향하는 ‘개혁신당’과 중도 좌파적 가치를 지향하는 ‘조국혁신당’을 말한다. 두 당은 각기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과 선명성 경쟁을 하며,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하는 관계를 맺을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사회권’ ‘보편인권’ 등 유럽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를 내건 조국혁신당의 실제적인 면모가 관심을 끈다. 이는 ‘87체제’를 극복하는 중요한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게 정치적 리더십의 문제로 귀결된다. 집권당의 참패는 불통과 독단에 기초한 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차기 리더는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새롭게 국회에 입성한 젊은 정치인들에게 눈길이 가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22대 국회가 대전환의 기조와 방향을 잡고,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 관문을 열어 주기를 기대한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전)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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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홍과 파동으로 요동친 총선 공천이 끝났다. 지역구의 후보가 세 번이나 바뀌는가 하면, 실세의 항의로 비례대표 순번이 다음날 바뀌었다. 심지어 후보 등록 마감이 지나고도 공천을 취소하고 정당의 지역구 후보가 사라졌다. 원칙도 기준도 애매한 공천의 결과로 과연 어느 당이 웃게 될까? 총선이 끝나면 이 땅에는 ‘정서적 분단’ 상태에서 ‘심리적 내전’이 종료되고 정치적 평화가 찾아올까?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먼저 공천을 간단하게 평가해보자. 정치초보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지휘한 집권당의 공천은 별다른 특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등판은 대통령 내외의 리스크 관리와 자신의 미래권력 창출이라는 두 개의 목표로 설정됐다. 내홍을 최대한 줄이면서 김건희 특검법이 저지되자마자 영남권 텃밭에서 시스템공천·혁신공천을 시도했지만, 선명한 기조와 비전 없는 공천은 참신하거나 특별한 느낌 없이 무미건조하게 끝났다. 그 사이에 상대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그의 특유의 어법과 제법 멋스러운 패션 스타일이 그를 평가하는 요소로 등장했다. 후진적인 정치문화의 단면에 쓴웃음이 나올 뿐이다. 제1야당의 공천은 당내 주류 교체의 과정이었다. 소위 ‘개딸’의 지지를 업은 비주류 이재명 대표는 공천을 통해 유감없이 권력을 휘둘렀다. ‘비명횡사’는 권력의 비정함과 무상을 동시에 드러냈고, 정치적 생명력이 다한 586세대의 적잖은 정치인을 퇴출하는 역사적 순간을 연출했다. 586세대에 대한 한동훈의 비난이 이재명의 손으로 실현되는 아이러니였다. 과거의 정치적 약속은 무시하거나 궤변으로 감추고, 친명체제 구축에 온갖 힘을 쏟았다. 대선 패배의 방어막으로 손에 쥔 당권이 방탄국회를 통과해 다음 대선까지 그를 지켜줄지 궁금한 대목이다. 제3지대에서는 혼돈의 상태에서 불나방처럼 한탕 권력을 노리는 무리의 이합집산이 펼쳐졌다. 그러나 개혁신당의 공천을 주무른 김종인의 영향력은 여론의 관심 밖이었고, 이낙연의 좌충우돌은 제3지대의 신선도를 떨어뜨려 오히려 양당체제를 강화하는 역효과를 불렀다. 그 와중에 조국혁신당의 돌출은 예상 밖이었고, 현 정권의 실정을 응징할 가장 강력한 대안세력으로서 주목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치의 생동감이 다시 한번 와닿았다. 어느 쪽이 승리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국면에서 승패는 부차적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승리해도 대한민국 정치는 회생과 진화의 여지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우울한 전망 때문이다.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 찬 공천판에서 정치의 본령으로서 정책 대결은 완전히 사라졌다. 국내외에서 대한민국의 망조를 예견하는 경고음이 터져 나오지만, 초저출산과 인구감소, 지방소멸, 기후재앙 등 다양한 현안을 다룰 인재 확보는 공천과정에서 공론화되지 못했다. 나아가 웬만한 국민은 사과 한 알도 선뜻 장바구니에 담지 못할 만큼 물가가 치솟고 경기 침체로 청년 고용이 얼어붙어도 정치권은 상대를 비난하기에 급급하다. 누구를 위한 정치이고 무엇을 위한 정치인지 유권자들은 묻는다. 이대로 망해도 괜찮은가? 현 정부는 3대 개혁을 추진했다. 노동개혁, 교육개혁, 연금개혁이 그것이다.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적 갈등의 경감과 해소에 있다. 다음 국회에서도 다시 논의될 사안임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전문적인 소양과 사회적 갈등 해소를 위한 정치적 역량을 겸비한 국회의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양당이 연금개혁에 의지가 있다면, 비례대표 순번에 연금전문가를 배치하는 전략을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의 비례대표 30번 내에 연금전문가는 없다. 국민의힘의 경우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서 현 정부 초대 사회수석을 역임한 안상훈 교수가 있을 뿐이다. 연금개혁은 여야가 당위성을 논하는 정치사안이건만 양당이 전혀 준비하지 않는 상황을 보면 다음 국회에서도 기대하기 어렵다. 필자의 전망이 너무 비관적인가. 노동개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현 정부가 시도한 정책들을 돌아보고, 앞으로 노동개혁의 전망을 따져보면 역시 그리 밝지 않다. 노동개혁의 적임자들이 국회에서 민의를 수렴하고 정책을 개발하는 미래가 쉽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를 대비하는 전략이 부재한 정치가 국민의 삶을 편안하게 행복하게 하기는 불가능하다. 반면교사로서 독일의 사례를 보자. 1980년대 독일은 격변기를 맞았다. 폴란드의 자유노조 시위, 소련의 개혁과 개방 정책 등 80년 초중반부터 사회주의권이 요동쳤고, 불과 몇 년 뒤 1989년에 사회주의권 전체가 붕괴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미 1970년부터 사민당 정부가 통독의 길을 열었지만, 1982년 총선에서 보수적인 기민당 정권이 들어섰다. 그렇지만 헬무트 콜이 이끄는 기민당 정부는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했다. 콜의 내각은 디트리히 겐셔 같은 자민련의 노련한 외교가를 끌어안고 통일정책을 꾸준히 이어갔다. 물론 통일정책에는 외교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일사불란하게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노동정책의 일관성이 필자에게 눈에 띄었다. 노동정책이야말로 동독 국민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집권 초기부터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된 기민당 노동전문가 노베르트 블룸은 통일 이후에도 장관직을 수행함으로써 무려 16년간 콜 내각을 지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정부의 초저출산과 인구감소 문제 및 교육개혁도 마찬가지로 아득하다. 20, 30대 청년과 특히 여성이 배제된 국회에서 초저출산 문제는 여전히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부각된다. 아이를 낳으면 지급하는 현금 세례가 언제까지 유용하다고 억지를 부릴지 두고 볼 일이다. 50, 60대 남성이 장악한 국회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들은 20, 30대 청년의 삶을 이해하지도 못하거니와 그들의 미래를 제시할 정도의 지혜와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육개혁 또한 마찬가지다. 교사가 배제된 교육개혁은 영원히 미제로 남는다. OECD 회원국 가운데 학생의 행복도는 꼴찌, 자살률은 단연 1위. 학생이 교사를 구타하는 교실, 교사가 민원 때문에 자살하는 나라. 늘봄으로 학부모의 부담을 덜겠다는 교육부의 발상에 교사들은 기겁한다. 문제의 근원을 방치한 채, 생색내기에 여념이 없는 교육부 당국의 행태에 절망이 고개를 든다. 그렇지만 교사들은 정치적 해결 능력을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 정치적 중립성의 원칙 아래 교사들의 피선거권은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 질곡을 풀지 못하는 한 교육개혁은 연목구어에 그칠 것이다. 지금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개혁과제를 해결하리라는 아무런 전망도 없는 국회에 우리는 무슨 기대를 걸까? 대통령 탄핵, 김건희 특검법의 재발의, 한동훈 딸의 전면 수사?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증오와 복수의 반복으로 그치면 희망은 없다. 새 국회는 국민의 삶과 국가의 안위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새 국회가 민의의 전당으로서 국회의 기능을 회복하는 새로운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우리 앞에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민족적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한반도 평화의 정착과 동아시아 전쟁 방지, 산업체제의 대전환에 대비하는 한국 기업을 위한 지원 전략, 사회적 불평등 해소와 빈곤계층의 지원 방안, 비수도권 지역의 공동화 현상과 그에 따른 인구유출 및 경제생활의 침체를 치유하는 획기적인 대책 등 그 어떤 사안도 하나같이 만만치 않다. 서로 비수 같은 독설을 날리고 험담하며 싸울 시간도 아니고 계제도 아니다. 아이들이 죽어가고, 노동자가 죽어가고, 대지가 죽어가고, 아이를 낳지 않고, 서로를 돌보지 않는 삭막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가 아니면 어디서도 해결할 수 없다. 이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능력도 자격도 국회가 아니면 없다. 따라서 대화하고 타협하는 국회로 전환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한다. 프랑스에서 연금개혁으로 몸살을 앓을 때,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에서 야당과 설전을 벌였다. 오바마가 이른바 오바마케어를 도입할 때, 그의 화려한 언변은 의원들과 토론에서 빛났다. 메르켈은 때로는 보수연정, 때로는 대연정을 통해 16년 동안 통일 독일을 이끌었다. 그 비결은 단연 국민을 위한 정치를 지향하며 야당과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정책 구현에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 정부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화를 거부한 정치가 미국 정치사에서 초유의 의회폭동 사태로 귀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서로의 정책을 무조건 반대하며 몸싸움을 벌이는 동물국회, 보이콧을 일삼는 식물국회에 국민은 진절머리가 난다.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손실을 초래하는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야 합의로 국회선진화법을 제정한 이력이 있다. 대화와 타협은 결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22대 국회에서는 품위 있게 토론하는 민주주의의 전당을 볼 수 있기를 국민으로서 바란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전)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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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정치는 생물 사람들은 흔히 정치는 생물이라고 말한다. 민심의 향방은 날마다 예측 불허이고, 정치인의 생명은 어느 날 느닷없이 끝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그렇다. 정치권의 이 격언은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총선에도 적용된다. 한동훈이 국민의힘(이하 국힘) 비상대책위원장에 오르고 거의 동시에 이준석이 국힘을 탈당하던 지난 12월 말부터 설 연휴까지 총선 분위기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게 유리해 보였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고 있다. 정당 지지율 변동과 분석 기사를 보면, 국힘의 상승세와 민주당의 하락세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특히 지난 총선 결과를 정확히 예측한 선거전문가(엄경영, 오마이뉴스 4. 23)와 노조 활동가 출신 정치비평가(최병천, 경향신문 4. 24)의 평가는 민주당에게 꽤 냉정하다. 요컨대 패배를 직감한 정치신인 한동훈이 전원공격으로 경기를 뒤집고 있다면, 다 이긴 경기로 착각한 대선 패자 이재명은 침대축구로 시간을 끌다가 역전당하자 당황하면서도 실실 웃는 클린스만과 흡사한 모양새다. 경기 흐름이 바뀌자 한동훈의 최대 약점인 대통령의 실정과 영부인의 국기문란 행위들은 여론의 관심에서 슬그머니 비껴나 있는 듯 보인다. 이런 판세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국힘과 민주당 모두 연일 공천과정의 잡음이 터져 나오는데 국힘은 조용히 처리되는 듯 보이지만 민주당은 갈등을 넘어 매일 분당을 경험하듯 언론에 추한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더니 급기야 이재명의 리더십마저 도마 위에 올랐다. 어쩌면 검찰의 칼끝 위에서 위태롭게 버텨오며 동정표를 받던 이재명 대표에게 이제 비로소 진정한 시련이 다가온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재명의 민주당 그런데 이 시련이 지난 두 달의 상황 변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이재명 대표의 리더십에 대한 의구심은 이미 대선 패배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민주당 자체의 역량 미달이다. 2017년 민주당의 집권은 촛불시위와 탄핵정국의 결과였다. 국민은 국민을 이기려는 정부를 타도했고 새로운 정부와 사회 분위기를 요청했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의 기치 아래 검찰 개혁을 비롯해 다방면의 개혁을 시도했다. 보수 야당과 기득권 세력의 방해는 집요했다. 그러자 2020년 총선에서 국민은 무려 180석을 허락하며 민주당 정부를 응원했다. 민주 국가에서 특정 정당을 위한 이런 일방적인 지지는 정말 예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것처럼 민주당은 기대에 못 미치는 형편없는 수준의 정치를 일삼다 그예 성과를 내지 못했다. 유시민 작가의 지적대로 간호법과 노란봉투법의 입법 실패가 대표적으로 아프게 다가온다(민들레, 2. 22). 촛불정부가 실패하며 민주당은 ‘무능한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도덕적 우위로 얻은 평판마저 상실했다. 무한한 정치적 실망감을 맛본 국민은 부끄러움에 치를 떨었다. 다른 하나는 이재명 리스크다. 그는 유능한 행정가였고, 상황 판단이 빠르고 언행이 민첩한 행동가였다. 성남 외곽에 세운 화장장과 납골당을 겸비한 훌륭한 장묘시설(영생관리사업소)은 이재명 성남시장의 능력을 입증한다. 촛불 정국 당시 성남시장 이재명의 시원한 언변과 코로나19 사태를 일으킨 신천지 교회에 대한 경기지사 이재명의 기민한 대응은 국민에게 강한 인상과 믿음을 주었다. 그런데 대선 이후 이재명과 민주당은 의문의 행보를 보였다. 이재명은 대선 패배를 인정했지만, 민주당은 패배의 원인을 정밀하게 분석·평가하지도 투명하게 공개하지도 않았다. 민주당 의원들조차도 선거백서의 존재를 두고 논란이 되는 실정이다. 이로써 이재명의 정치력 역량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 기회가 사라졌고, 민주당은 패배를 딛고 거듭날 기회를 놓쳤다. 0.73% 격차에 따른 석패의 의미와 교훈은 허무하게 사라졌고, 강성 지지층만 남은 채 민주당에게 기대를 걸었던 국민의 기대와 염원은 사라졌다. 민주당은 여론의 관심을 외면하며 대선 패자 이재명을 엉뚱한 지역구 의원으로 밀어 올렸고 나아가 당 대표로 옹립했다. 이때부터 이재명의 횡보가 시작되었고 거대야당 민주당은 방 안의 코끼리로 둔갑했다. 지금 국민은 이재명의 민주당이 수권정당의 능력과 위신을 갖추었는지 의심하고 있다. 이재명의 총선 전략 이재명은 국민의 의심을 해소하고 민주당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이재명의 능력 평가에는 한 가지 제약조건이 따른다. 검찰에 의한 무한대의 압박이다. 최근 이재명의 부인과 영부인에 대한 검찰의 극단적인 조치는 매우 상징적이다. 이재명의 부인은 법인카드 10만원 유용 혐의로 기소되었다. 반면에 영부인은 관련자가 처벌받은 도이치모터스의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 및 300만원을 넘는 고가의 ‘디올백 스캔들’에도 검찰의 조사조차 받지 않고 있다.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대학가에서는 커피 한잔 건네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자리 잡은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나아가 2년간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재명은 왜 기소되지 않는지도 의문이다. 법리적인 측면에서 증거가 불충분한 건지 아니면 정치적인 시간 끌기 전략인지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의 능력 발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시인한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이재명의 총선 승리 전략은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정당 수준과 정치적 역량을 가늠할 때 민주당 앞에는 두 개의 해결책이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민주당의 대동단결에 기초한 총력전 전개다. 이재명은 민주당의 비주류 출신으로 대선 후보가 되었고, 지금은 당 대표로 당을 지휘한다. 당내 주류 교체를 통한 당권 장악과 이후 대선 후보의 길은 총선 국면에서 해결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총선의 상대 국힘이 있음을 잊지 않고 대승적 결단에 기초한 통합적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두 정당의 지지율이 역전되자 이재명은 분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언론의 프레임일지 모르지만, ‘찐명’ 논란이 거짓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적전 분열로 참패한 요르단전을 총선에서 지지자들이 경험해야 하겠는가? 그건 민주당을 지지하는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다른 해결책은 민주당의 역량을 채워줄 참신한 인재 영입이다. 필자의 안테나 성능을 고려하여 다른 분야의 영입 인재에 대한 평가는 보류하겠다. 하지만 대학정책과 지방소멸 대비를 위해 영입한 인재를 볼 때 몹시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에는 고등교육 정책을 주관하는 연구원이 박사 한 명밖에 없다던 지인의 전언이 떠올랐다. 나아가 총선 국면 초입에서 민주당이 내놓은 ‘인재추천위원회’의 12개 영입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이자 아킬레스건인 ‘교육’이 빠진 이유를 이해했다. 그 12개 분야 중에는 하물며 ‘동물 복지’도 있었기에, 민주당은 필패를 자초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책 차원에서 다른 사례를 보자. 이재명은 최근에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공약으로 발표했다. 시들하던 프로젝트가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민주연구원은 이 프로젝트의 유효성과 실현 가능성을 면밀하게 검토했는지 궁금하다. 다급한 상태에서 떠도는 제안을 덥석 공약으로 발표한 건 아닌지 묻고 싶다. 왜냐면 문재인 정부 시절 한겨레신문에 실린 “논의 20년째 ‘대학통합네트워크’, 총선 앞두고 다시 펼쳐질까”(2020. 2. 20)라는 기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총선 국면에서 발표된 이 기사의 핵심 발언자가 ‘서울대 10개 만들기’ 프로젝트의 제안자였다. 또한 이 프로젝트는 지난 대선에서도 이재명의 공약으로 부상했지만, 재정 조달과 실천 방안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공약집에서 배제된 바 있었다. 돌려막기와 재탕에 불과한 정책으로 마치 새로운 정책인 양 국민을 현혹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모르기는 피차가 마찬가지 아닐까 싶었다. 총선 결과와 한국 사회의 미래- 이재명의 선택은? 전 세계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느끼는 시절이다. 민주주의 체제 위기의 핵심 요소는 국정 책임자의 리더십이다. 트럼프, 푸틴, 시진핑, 헝가리의 오르반,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그리고 윤석열의 리더십을 보자. 인류 최악의 지도자 히틀러는 염라대왕이 파견한 악마가 아니다. 독일 국민이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선택한 정당 지도자이다. 그 선택의 책임 때문에 히틀러의 죄악에 대해 독일 국민은 오늘까지도 사죄의 의무를 지고 이행한다. 정치지도자의 선택이 역사적 사명감에 기초해야 함을 알려주는 대표적 사례다. 현재 대한민국의 양극화와 극우화는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빈부 격차는 나날이 커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기 직전이다. 초저출산과 지방소멸의 원인은 모두 내 한 몸 챙기기도 힘든 실존적 위기와 미래를 암울하게 전망하는 집단적 우울증으로 귀결한다. 대한민국만의 문제도 아니고, 대한민국 혼자서 해결할 수도 없다. 세계 경제의 침체, 코로나19의 후폭풍, 민주주의 체제의 해체 징후, 기후 악화에 따른 묵시록적 상황의 도래 등 전 세계의 위기 국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추락은 너무 빠르다. 최근 뉴스에서 본 현직 국회의원, 대학원생, 의사의 입을 틀어막고 쫓아내는 장면이 모든 걸 웅변한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장은 이 사태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외마디 항의도 없다. 우리 곁에 와 있는 미래의 모습이다. 미국이나 프랑스 혹은 독일이라면 국회의원이 저런 모습으로 끌려 나가는 사건이 벌어질까? 혹여 벌어지더라도 이렇게 조용히 넘어갈까? 아마도 나라가 뒤집히는 난리가 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이미 해체의 위기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이재명은 그 누구보다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패배하면 우리 사회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이재명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다고 믿는다. 필자가 대학에서 서양사를 가르치면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근대적 인간과 근대사회의 차별성이다. 그 위에서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해체의 위기가 눈앞에 닥쳐온 지금, 이재명의 역량과 선택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본다. 민주당의 확실한 승리를 위해 이재명은 용퇴를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최선의 결정을 국민 앞에 내놓길 바란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전)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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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대학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준비도와 여건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 지난 24일 교육부가 발표한 '2024년 주요 정책 추진계획'에서 무전공 입학의 강제적인 도입과 확대는 일단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해당 정책은 느닷없이 발표되었고 의외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자 신속하게 철회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육부의 졸속행정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고, 무엇보다도 대학에 대한 이주호 교육부 장관의 무지와 그의 왜곡된 대학관이 드러났다. 무전공 입학이란 대학이 입학 정원의 일정 부분을 전공·학과 등 구분 없이 모집하는 전형을 가리킨다. 무전공 입학생들은 재학 초기에 기초·교양과정을 이수하면서 적성과 흥미에 맞는 전공을 탐색하고 결정한다. 이는 대학과정의 학업 성취도를 높이고 궁극적으로 학업과 직업 모델의 연계성을 높이는 대안으로 평가할 만하다. 실제로 우리의 교육과정 전반을 고려할 때, 고교 졸업 후 자신의 적성과 직업 전망에 부합하는 대학의 전공을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대학은 층위가 다양한 모집단위를 설정하고 이른바 ‘학부제’를 시행하였다. 필자 역시 대학 입학 당시 모집 단위 ‘역사·철학계열’에 지원했고, 2학년 진급 시에 사학과를 선택했었다. 또한 필자가 교수로 임용될 때, 현재 재직하는 대학의 모집단위는 특이하게도 국학·역사학부라는 애매한 명칭이었다. 그것은 국학부(한문학전공, 민속학전공, 동양철학과전공)과 사학과의 기묘한 조합이었다. 세월이 흘러 2009년도에는 자유전공학부라는 모집단위가 등장하여 학생의 전공선택권 보장과 대학의 유연한 학사운영 방식이 실현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학부제 모집은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하나는 전공선택권의 쏠림현상으로서 그 결과는 학부 내 혹은 대학 전체에서 특정 전공의 존망을 좌우한다. 예를 들어 자유전공학부는 "미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융합 학문을 가르칠"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도입 당시 서울대(정원 157명), 연세대(150명), 고려대(123명), 이화여대(40명), 중앙대(133명) 등 의욕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융합 학문을 가르친다’는 본래 취지는 전혀 구현하지 못한 채 자유전공학부는 인기학과로 가는 '디딤돌'로 전락했다. 법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위한 전 단계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한 가운데, 대부분의 학생은 경영학과와 컴퓨터공학과를 비롯한 소위 인기학과를 선택했다. 연세대의 경우 다수의 학부생이 경영학과를 지원하자 ‘경영예과’라는 비아냥이 돌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중앙대는 도입 이듬해에 바로 모집 중단에 들어갔고, 연세대는 5~6년 운영하다가 국제학부로 흡수했다. 다른 하나는 전공선택권에 부합하는 학부 내 전공들의 유기적인 협력이 예상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이다. 학부 입학생들은 학과 입학생들과 견주어 보면 소속감이 매우 약하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해당 전공의 교수들과 사제지간을 맺기도 애매하고, 해당 전공의 선배들과 교유하기도 어정쩡하다. 한편 학부 내의 학과 교수들은 학부생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하여 다양한 신호를 보내면서 경쟁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런 사정으로 인해 학부 내 교수들의 실질적인 협조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국학·역사학부가 유지될 당시에 학부 내 전공들의 알력 관계는 건전한 교류를 해칠 정도로 심각했다. 예를 들어 2학년 진급 시 우수학생의 다수가 A학과에 몰렸다. 그러자 B학과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학부의 해체를 주장한 반면 C, D학과는 A학과 덕분에 그나마 학부에 적정 수준의 학생이 입학하고 충원에 문제가 없으니 A학과 쏠림을 눈감아주자는 태도를 보였다. 다른 학부에서도 대동소이한 문제들이 노출되면서 마침내 2008년 대학본부는 일제히 학부제를 폐지하였다. 따라서 학부제이건 자유전공학부이건 학생의 전공선택권은 보장하지만, 교육적인 차원에서 검증된 실질적인 효과는 없다는 것이 이제까지 축적된 경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이 대학에 미친 사례는 대학의 규모와 운영 결과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부 대학의 사례는 대학의 경쟁력과 전망을 완전히 잠식하는 파국적인 결말을 보이기도 한다. 다른 대학들이 자유전공학부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갈 무렵인 2017년에 A대는 교육부의 재정 지원을 받을 목적으로 ‘창의융합학부’라는 정체불명의 학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학내 구성원들의 우려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 학과의 정원 30%를 갈취하여 220명 규모(전체 정원의 무려 7분의 1에 해당)에 달하는 매머드급 학부가 탄생했다. 이렇게 대학의 구조를 현저하게 왜곡하고 탄생한 동 학부는 2019년부터 신입생 모집에 들어갔으나 불행히도 코로나19 창궐과 함께 심각한 신입생 미충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교육은 언감생심 제대로 시도해보지도 못한 채, 해마다 대규모 미충원 사태를 맞게 되었다. 마침내 신입생 모집 5년 만에 대학본부는 2025학년도부터 학부의 신입생 모집을 중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학부 창설의 주역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성도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나아가 무전공 입학은 대학에 대한 지극히 반교육적이고 비현실적인 인식에 기초한다. 교육부는 학생이 선호하거나 몰리는 전공과 학과를 존치하고 그런 분야에 대학의 재원을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그런 과격한 조치는 현실적으로 대학에서 실현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반도체학과의 진급생이 전년 대비 해마다 50% 넘게 증가한다고 가정하자. 교수 충원, 공간 확장, 실습시설 확충 등 교육여건이 충분히 충족될 수 있을까? 현재의 급여 수준으로 반도체 우수 인재를 대학교수직으로 유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다른 학과와 공존하는 대학의 속성상 공간의 확장도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인재 양성은 기업의 상품 생산과 다름을 인식해야 한다. 기업은 시장 수요에 따라 설비 투자를 조정하고 상품 생산의 비중을 수시로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학은 어느 정도 특성화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교육과정과 인력 충원, 공간 배치 등 다양한 요소들의 지속성 때문에 상품을 찍어내듯이 인재를 배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이른바 비인기 기초학문은 어찌해야 하는가? 필자의 대학에서는 2024학년도부터 철학과가 사라졌고, 2025학년도부터 자연과학대학이 해체된다. 혹자는 ‘아직도 지방대학에 물리학과와 화학과가 남아 있었어?’ 또는 ‘여전히 사립대학보다 변하는 속도가 늦네’라고 반문하거나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국립대라는 프리미엄의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국립대마저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 물리학, 화학 등 인문학과 기초과학을 포기할 때 과연 우리나라의 대학에 미래가 있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의 흐름에 비출 때 너무 한가한 한탄이라고 나무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른 시각에서 질문을 던져보자. 인문학의 기초 없이 K-인문의 진흥이 가능하고, 정신문화의 수도를 표방하는 안동이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미래의 한류를 이끌 가능성이 열릴까? 나아가 기초과학의 토대 없이 첨단·융합 과학에서 꾸준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단연코 없다. ‘자율적 혁신’으로 포장된 교육부의 대학혁신을 거부한다. 그것은 허구다. 강요를 자율로 포장하고, 통제를 혁신으로 왜곡하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갉아먹는다. 적어도 지금까지 대학에서 융합 학문의 교육은 사기극과 다름없었다. 학생들이 그걸 몰랐을 리는 만무하다. 그저 인기학과로 몰려감으로써 사기극을 피해서 갔을 뿐이다. 최근에 답답한 마음에 임용 연차가 낮은 교수에게 “창의융합형 인재”가 어떤 학생을 지칭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웃으면서 가볍게 대답했다. “교수님의 눈높이를 낮추세요. 그냥 이 전공 조금하고 저 전공 조금하고 그렇게 여러 전공의 맛을 본 학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제서야 나는 얇고 넓은 지식의 유용성을 설파하는 주장이 대학에서도 통용되고, 급기야 마이크로 디그리(타 전공에서 3~4과목을 이수하고 받는 학위) 또는 나노 디그리(타 전공에서 2~3과목을 이수하고 받는 학위)의 도입이 사회적 수요를 반영하였음을 어렴풋이 인지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향후 우리 대학체제 전반에 가져올 영향을 생각하면 우울하다. 필자의 상식으로 대학은 근대 세계의 합리적 이성이 작동하는 기관이며, 현대 물질문명을 견인하는 원동력이다. 물론 미래 사회는 지금과 다른 메커니즘 혹은 프로세스로 작동할지 모르지만, 대학이 축적한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체계가 배제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래 사회를 대비한 인재 양성이 현재의 대학 교육을 딛고 새로운 패러다임 위에서 가능할지 몰라도, 돈으로 환심을 사서 새로운 제도를 강요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런 맥락에서 필자는 대통령과 교육부 및 우리 사회 구성원의 이율배반적이고 반지성주의적 행태들을 규탄한다. 과학기술 진흥을 약속하고 연구개발비를 대폭 삭감하여 과학기술의 토대를 허물어뜨리는 대통령, 특수목적고의 부활을 통해 고교학점제를 무력화하면서 학생의 전공선택권을 강화하겠다는 장관, 지방대학 시대를 선언하고 수도권 대학의 증원을 허용하여 지방민의 염원을 짓밟는 대통령, 선도주자(First Mover)가 되자고 부르짖지만 원천 기술 개발의 토대가 매우 약한 나라,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면서 과학 선진국임을 자부하는 나라. 궁극적으로 기초가 허약하고 지속 가능성이 미약한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는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전)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