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여러모로 이례적 인물인데, 이름과 호칭에서도 드러난다. ‘경’과 ‘키어’가 그렇다. 키어는 1892년 노동당(엄밀하겐 당까진 아니었다)을 표방하고 처음으로 당선된 키어 하디에게서 유래했다. 첫 등원 때 당시 정장인 프록코트와 실크 모자 대신 트위드 재킷과 사냥 모자를 착용해 논란이 됐다. 작업복을 입은 셈이었다. “지붕에서 일하러 왔느냐”는 얘기를 들었다는데 “플로어(floor)에서 일한다”고 응수했다고 한다. 플로어에 의원석이란 의미도 있으니 재치 있는 답변이긴 했다. 군주제를 공격한 적이 있는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다. 공구 제작자인 스타머의 아버지가 자신이 노동자 계급임을 자랑스러워하며 키어란 아들 이름을 택했다.
그의 정치 이력도 이례적이다. 52세인 2015년에 처음으로 배지를 달았으니 영국 기준으론 많이 늦었다. 인권변호사를 거쳐 왕립기소청(CPS) 수장인 공공기소국장을 지낸 뒤였다. 처음엔 당권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극좌인 제러미 코빈이 극렬 지지자들과 함께 당을 사실상 집권 불가능한 왼쪽으로 끌고 가는 걸 보곤 생각이 달라졌다. 암암리에 대비하다 5년 만에 당수가 됐다. 이례적으로 빠른 비상이었다.
그는 당수로서 능력·전문성, 영국에 대한 신념을 강조했다. 코빈이 반유대주의 논란에 휩싸이자 바로 축출했다. 곧 “극좌의 환상세계, 정체성 정치, 소셜미디어의 성급한 판단으로부터 노동당을 벗어나게 해야 한다. 화합만 강조하는 건 안만 보게 한다. 밖의 유권자를 만나려면 내부투쟁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받곤 실행에 옮겼다. 코빈 추종자들을 몰아내고 새 인물로 채웠다. “스타머가 노골적으로 정파적인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와중에 총알을 박고 있다”(정치평론가 헬렌 루이스)는 평이 나왔다.
정책적 대안도 정비했다. 노동당적이지만 노동당적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적절한 증세와 국방도 강조했다. 가디언은 “합리적이며 부드러운 좌파”라거나 “전통적인 이념적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아 어디에 위치한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어느덧 그는 무색무취하면서도 무자비하다는 평을 듣게 됐다. 언론인 톰 볼드윈은 『키어 스타머』에서 이렇게 썼다. “스타머는 본능적으로 조심스러워 보이지만 당을 변화시키기 위해 일련의 막대한 위험을 감수해 왔으며, 정치인이 되는 걸 불편해 하면서도 더 세련되고 ‘카리스마 넘치는’ 경쟁자들이 쓰러지는 사이 빠른 속도로 장애를 뛰어넘었다.”
그 사이 보수당이 자멸했다. 유럽연합에 대한 입장 차에서 비롯된 보수당 내 반목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에도 극심했다. 이 여파로 대중적 인기는 높으나 통치엔 진지하지 않았던 보리스 존슨, 양배추 유통기한(50일) 안에도 나라를 휘청거리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리즈 트러스가 연속으로 총리가 됐다.
이젠 노동당과 상극이었던 런던 금융가에서도 “노동당은 투자자들에게 핵심적인 따분하고(dull), 지루하고(boring), 예측 가능한 모습을 보인다. 빨간색 투표(노동당 상징색)를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경제평론가 빌 블레인)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원래 따분하고 지루하고 예측 가능한 정치가 정상일 수 있겠다 싶다. 영국은 10여 년의 혼란기를 통과했다. 여전히 상상 그 이상의 일이 벌어지는 우린 얼마나 걸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