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자태에 씐 음심 복숭아는 억울해[음담패설 飮啖稗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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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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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능의 과일 복숭아
향긋하고 부드럽고 새콤달콤 탐스러운…예쁜 게 죄?


‘도화살’이라는 말이 있다. 사주·명리에서 많이 쓰는데, 일반인에게도 꽤나 익숙하다. 예로부터 도화살이 있는 사람은 남성 혹은 여성에 대한 편력이 강한 것으로 여겨졌다. 도화살에는 성적 방종, 음란, 색기, 호색 따위의 의미도 따라붙는다. ‘도화살(桃花煞)’에서 ‘도화(桃花)’는 복숭아꽃을 의미한다.

‘도색잡지’ 혹은 ‘도색영화’라는 단어도 있다.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나 중년층 이상에게는 익숙하다. ‘플레이보이’나 ‘펜트하우스’ 등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도색잡지의 대표격이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곤 했던 이 잡지를 수완이 좋아 손에 넣은 아이들은 성적 호기심이 들끓던 또래 사이에서 종종 권력자가 됐다. 여기서 ‘도색’(桃色)의 뜻은 복숭아 혹은 복숭아꽃 빛깔이다.

딱히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닌 이 단어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복숭아 혹은 복숭아꽃이다. 향긋하고 부드러운 식감, 새콤달콤한 과즙, 탐스러운 모양새의 그 곱디고운 과일에 왜 이런 이미지가 씌워졌을까. 눈부시게 화사한 분홍빛깔의 꽃잎에 왜 그런 음심을 투영했을까. 복숭아 입장에선 무척이나 억울할 법하다. 고운 것도 죄인가.

복숭아는 예로부터 여성의 몸을 상징하거나 염정을 노래하는 데 많이 사용됐다. 주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문화권 사료에서 이 같은 표현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에른스트 레너·요한나 레너가 쓴 <꽃, 식물, 나무의 민속성과 상징성>(Folklore and Symbolism of Flowers, Plants and Trees)에 따르면 많은 문화권에서 복숭아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복숭아를 여성의 신체에 비유할 때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표현은 ‘수밀도’다. 수밀도(水蜜桃)는 시에서 무협소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왔다. 사전적 의미로 ‘껍질이 얇고 살과 물이 많으며 맛이 단 복숭아’라는 수밀도는 여성의 가슴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주 소환된다.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에는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작품은 교과서에도 실렸다. 1980년대 무채색 교실의 국어수업 시간은 ‘수밀도’ ‘가슴’ 등의 단어가 던지는 에로틱한 상상력으로 미묘한 파문이 일렁거리곤 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백작(하정우)이 과즙을 사방으로 ‘분출’하며 복숭아를 한입 가득 베어물던 장면은 수밀도의 사전적 의미를 스크린에 시각·청각적으로 구현한 순간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은 50대 이상이 된 여성이라면 10대 시절 읽었을 버트리스 스몰의 소설 <아도라>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꽤 있겠다. 비잔틴제국의 공주였던 아도라가 오스만제국 술탄의 부인이 되지만 술탄의 아들 뮤라드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면서 펼쳐지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그린 역사 로맨스 소설이다. 야한 묘사가 꽤나 많았던 이 책에서 아도라와 뮤라드의 아찔한 애정행각이 펼쳐지는 배경은 복숭아밭이었다.

복숭아는 표면에 난 가는 골 모양 때문에 여성의 엉덩이나 성기를 닮았다고 여겨졌다. 이 때문에 복숭아를 먹으면 음기를 자극한다는 믿음이 유감주술로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여성이 복숭아나무를 사타구니에 끼고 앉아 밤을 새우면 성 기능을 강하게 해준다는 속설도 있었다. 김별아의 소설 <미실>에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이 같은 신앙 때문에 복숭아나무를 ‘나무서방’이라고 불렀다는 대목이 나온다. 18세기 문인 유진한이 한시로 쓴 춘향가 ‘만화본춘향가’에는 “복숭아 같은 엉덩이 치마 밑에 둥실”이라는 구절이 있다. 복숭아처럼 생긴 엉덩이를 미인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복숭아는 동성애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언급된 ‘여도지죄(餘桃之罪)’는 애정이 오히려 증오를 부르는 원인이 된다는 의미의 고사다. 이 고사의 바탕이 된 이야기에서 중국인들은 남은 복숭아, 즉 여도(餘桃)를 동성애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 프란체스코 베르니는 ‘복숭아를 향한 찬가(Encomium)’에서 복숭아를 통해 원초적인 욕망을 노래했다. 복숭아와 동성애 하면 자동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티모테 샬라메)가 올리버(아미 해머)를 떠올리며 자위하던, 숨 막힐 듯한 관능미가 넘실거리던 그 복숭아 신 말이다. 이 장면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지, 한 토크쇼에서 티모테 샬라메는 “아마 50년 후에도 복숭아에 사인하고 있을 것 같다”는 너스레를 떨었다.



복숭아꽃은 아름다운 여성을 지칭하는 표현으로도 많이 쓰였다. 그 많은 꽃 중에서 특히 복숭아꽃이 자주 언급된 것을 보면 단순한 아름다움 이상의 특별한 무엇이 있는가 보다. 궁금하던 차에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꽃 사진을 굳이 찾아 비교해봤다. 복숭아꽃은 화려하고 요염함이 강한 반면 진달래는 왠지 처연한 느낌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인지 모르겠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미인이 나오는 꿈을 꾼 뒤 “연분홍 복사꽃이 비단에 싸였다”는 시를 쓰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복사꽃이 복숭아꽃이다. “그가 여자의 얼굴에 피어난 복사꽃 같은 요요함만 보고 그 안에 번창하는 고약한 병균에는 눈멀어 열병처럼 사랑하고…”(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와 같은 문장에서 복숭아꽃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중국 춘추시대에 약소국이던 식나라 왕비 규씨는 그 미모 때문에 도화부인(桃花夫人)이라 불렸다. 초나라 문왕은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식나라를 침략해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25대 진지왕과 도화랑(桃花娘)이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역시 그의 미모로 인해 붙은 이름이다. 진지왕도 도화랑에게 반해 구애했지만 남편이 있던 도화랑은 목숨을 잃더라도 두 남편을 섬기지 않겠다며 결연하게 맞선다.

중국이 원산지인 복숭아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었다.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을 일컫는 것처럼, 초현실적인 세계를 노래하고 비유하는 수단이었다.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는 복숭아밭(도원)에서 하늘에 맹세하며 형제의 의를 맺었고 도연명이 꿈꿨던 ‘무릉도원’(복숭아꽃이 활짝 피어있는 세계)은 누구나 바라는 아름다운 이상향이다. 중국 도교 신화의 여신 서왕모가 가꿨던 과수원인 반도원(蟠桃園)에서 자라는 복숭아 ‘반도’는 불로장생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한 복숭아였다. 손오공이 훔쳐 먹었던 복숭아가 서왕모의 복숭아다. 반도원에서 자랐던 전설의 복숭아는 어떤 맛이었을까. 최근 몇 년 새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일명 ‘납작복숭아’가 이와 비슷할 것 같다. 중국과 유럽에서 많이 나는 납작복숭아는 황도도 백도도 천도도 아닌 ‘반도(蟠桃)’라고 칭한다. 국내에서 이를 재배하는 농가가 있긴 하나 키우기가 어려워 생산량이 적다. 이 때문에 해마다 여름이면 특정 품종별로 오픈런이 벌어지기도 한다. 황도와 백도, 반도는 영어로 ‘피치(peach)’다. 그런데 천도복숭아는 ‘넥타린(nectarine)’이라고 한다. 너무 맛있어서 그리스신화에서 신들이 젊음과 영생을 위해 마셨던 음료 ‘넥타(nectar)’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설도 있다. 6월 중순이면 나오기 시작하는 ‘신비’가 천도복숭아의 한 품종이다.

세계 음식 정보 전문 사이트인 ‘테이스트아틀라스’에서 얼마 전 세계 최고의 복숭아 몇 가지를 소개했다. 구체적인 품종이 아니라 맛있는 품종이 나는 특정 지역을 꼽은 것으로, 해당 지역을 여행할 때 잊지 않고 맛보면 좋겠다. 그리스 나우사, 이탈리아 베로나, 스페인 칼란다, 중국 베이징 핑구, 헝가리 부다페스트 남서부 로지바락 등이다.

6월에 접어들면 본격적으로 복숭아의 계절이 시작된다. 과학영농의 시대라지만 복숭아는 딱 여름 한 철, 그것도 품종별로 2주 정도밖에 나지 않는다. 저장도 불가능하므로 딱 요맘때만 먹을 수 있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참 사람 힘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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