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전문성 중시, 경쟁사 임원도 사외이사로
한국은 재임기간 짧고 다양성 부족, 전문성 의문
애플의 이사회는 8명 중 최고경영자(CEO)인 팀 쿡을 제외한 7명이 사외이사다. 면면도 화려하다. 알렉스 고르스키 전 존슨앤드존슨 회장, 로널드 슈거 우버 이사회 의장 등 유명 기업의 전·현직 CEO가 포진해 있다.
세계 시장에서 애플과 경쟁하고 있는 삼성전자 이사회는 어떨까. 이사 10명 중 6명이 사외이사인데 그중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 허은녕 서울대 교수 등 학계와 관료 출신이 4명이다. 반도체나 전자 업계 전문가로 볼 수 있는 인물은 없다.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TSMC 이사회는 이사 10명 중 7명이 사외이사인데, 전 영국 브리티시텔레콤 회장인 피터 본필드와 인텔 부사장 출신 마이클 스플린터 등 세계적으로도 ‘거물급’으로 꼽히는 인물들이 즐비하다.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이 시가총액 기준(지난 5월14일) 한국과 미국의 100대 기업 사외이사 경력을 비교해보니 미국은 900명 중 791명(87.9%)이 기업 경영인이거나 금융·회계업계 출신이지만 한국은 470명 중 120명(25.5%)에 그쳤다. 한국 기업의 사외이사 중 가장 많은 이들은 대학교수 등 학계 출신으로 절반 가까이인 47.9%에 달했다. 반면 미국 기업은 학계 출신 사외이사 비율이 8.1%에 불과했다.
한국 기업에서는 미국보다 법조나 관료 출신 인사들도 두드러졌다. 전체 사외이사의 13.8%인 65명이 판사나 검사, 변호사 출신 인물이었다. 그중 검사 출신은 20명으로 전체의 4.3%였다. 미국 기업의 사외이사 중 법조 출신은 1.7%로 한국의 8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장차관이나 정부 주요 직위자 등 관료 출신은 한국이 14%인 반면, 미국은 4.6% 수준으로 3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사외이사 제도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경영환경이 날로 복잡·다양해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이사진의 전문성과 독립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지만, 한국 100대 기업 사외이사는 전문성보다는 학계, 관료, 법조 위주로 선임되고 있다. 이는 재벌 총수나 지배주주 위주의 폐쇄적인 의사결정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와도 관련이 깊어보인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는 “이사회 중심 경영을 이야기하지만 경영진 출신이 많지 않아서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는 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명목상 사외이사의 숫자나 비율보다도 어떤 사람들이 사외이사로 들어와 있는지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국 상법에는 ‘경영진’이라는 용어가 없다. 상법은 주식회사의 경영 활동 주체를 이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경영자가 실제 기업 활동을 진두지휘한다면, 이사회는 기업의 주요한 의사 결정에 참여하거나 조언하고 경영진을 감독하는 기능을 한다.
이관휘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저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이사회는 기업 경영에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전문가들로 구성해 경영자를 모니터링하고 경영에 참여하며 회사 경영에 대한 귀중한 정보들을 주주들에게 올바르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이사회에는 최고경영자(CEO) 등 사내 경영진이 참여할 수 있지만, 회사 밖에서 임명되는 사외이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사회 의장은 대표이사 혹은 CEO가 겸할 수 있지만 별도로 둘 수도 있다. 애플 등 주요 미국 기업들은 CEO 외 전원을 사외이사로 채우고, 이사회 의장도 사외이사 출신이 맡는 경우가 많다. 사외이사의 다양한 경험과 외부자로서의 시선이 집단지성으로 작용해 경영진의 판단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문성은 곧 경영진에 대해 쓴소리를 할 수 있는 독립성의 토대다. 미국에선 ‘독립이사(independent director)’란 표현이 보편적이다.
기업 경험이 없거나 해당 산업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사외이사가 경영 활동에 제대로 참여하거나 감독하기는 어렵다. 애플과 TSMC뿐 아니라 엔비디아, 구글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사외이사에 유명 기업의 경영진 혹은 창업자, 노벨상 수상자 등 쟁쟁한 인물이 많은 이유다. 미국은 유명 기업의 CEO가 다른 유명 기업의 사외이사를 겸직하는 사례도 흔하다. 미국 100대 기업 사외이사 900명 중 291명(32.3%)이 타 기업의 CEO 등 주요 경영진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애플 CEO인 팀 쿡은 나이키의 사외이사다. 디즈니의 수석부사장 겸 최고재무책임자(CFO) 휴 존스턴은 마이크로소프트 사외이사다. 엔비디아의 사외이사인 아트 레빈슨은 구글(알파벳)의 생명공학 계열사 캘리코의 CEO다. 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체이스에는 스타벅스 회장 멜로디 홉슨이 사외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한국은 471명 중 41명(8.7%)만이 다른 기업의 경영진을 겸하고 있었다. 상법상 경쟁 업체의 이사 취임을 제한하는 경업금지 조항 등이 있는 데다 그 자체를 신의성실 의무에 반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한국적 문화에서는 삼성전자의 경영진 출신 인사가 퇴직 후라 해도 LG전자의 사외이사를 맡는 일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원동욱 우송대 융합경영학부 교수는 “미국 기업인들은 경쟁사 사람들도 경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사외이사로 영입하는 분위기가 활성화돼 있다”고 말했다. 이재은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한·미 공인회계사)는 “미국은 관행적으로 ‘실무를 해본 사람이 진짜 전문가’라는 합의가 있는 반면 한국은 학계 출신을 비롯해 분야 업무를 전체적으로 아는 사람을 전문가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학력을 살펴보니 한국과 미국 모두 사외이사 중 경영학(재무, 회계 등 포함) 석박사 비율이 가장 높았지만 한국(31.5%)은 미국(41%)보다 10%포인트가량 낮았다. 실무 중심의 경영학석사(MBA) 학위 취득자로 좁혀보면 한국이 9.4%, 미국은 38.8%로 차이가 컸다. 대신 한국은 법학 석박사 비율이 13%로 높은 것이 눈에 띄었다. 미국은 한국의 절반 수준인 6.4%였다. 공학, 이학, 의·약학 계열 등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석박사 비율은 한국 17%, 미국 14.8%로 비슷했다.
재직 기간 역시 사외이사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가늠할 수 있는 주요 척도다. 임명 연도만으로 단순 계산한 사외이사의 평균 재임 기간은 미국이 7.3년이었고 한국은 2년이었다. 미국은 20년 이상 된 사외이사도 31명이나 됐다. 한국의 사외이사 임기가 짧은 이유는 임기를 최대 6년(계열회사 포함 9년)으로 규정하고 있는 상법 시행령 때문이기도 하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는 “사외이사 임기는 너무 짧으면 전문성이 떨어지고 너무 길면 고인 물이 되지만 사외이사 임기를 법정화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며 “임기가 1~2년인 회사도 있는데, 이런 경우 그보다 임기가 긴 CEO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의 사외이사는 절대적 수도 부족하다. 100대 기업 조사 결과 미국 기업 1곳당 사외이사 수가 평균 9명인 데 반해 한국 기업은 4.7명에 그쳤다. 비율 역시 낮다.
2023년 기준 미국 컨설팅 업체 스펜서 스튜어트와 삼일PwC(삼일회계법인) 거버넌스센터 자료를 보면, 미국 S&P500 기업 이사회의 사외이사 비율은 85%에 달하지만 한국 상장기업은 51% 수준이다. 상법은 자산 규모 2조원 이상의 기업은 사외이사를 3명 이상으로 하되, 이사 총수의 과반수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산 규모 차이 등을 감안해도 평균 51%면 법을 가까스로 어기지 않는 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한국 기업은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다. 사외이사 중 여성 비율은 한국이 27%인 반면 미국은 40.8%였다. 자본시장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은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인 상장사가 이사회 전원을 특정 성별로만 구성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강제 조항이 있음에도 미국보다 여성 비율이 낮은 셈이다.
이사회 전체로 넓혀보면 성비 구성은 더 심각하다. 박준성 한국ESG기준원 연구원이 발표한 ‘국내 상장회사 이사회의 다양성과 전문성’ 보고서를 보면, 기업지배구조보고서 의무 공시 기업(자산 규모 1조원 이상) 359개사 중 여성 이사가 1명인 곳이 44.3%였고, 아예 없는 곳도 41.8%였다. 대부분의 회사 이사회에 여성이 1명 이하인 셈이다. 특정 연령대 편중 현상도 보였다. 평균연령은 60.7세였고, 60년대생 이사가 50.1%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박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업 지배구조 원칙에서는 이사회 평가 시에 전문지식과 경험을 갖추었는지 함께 검토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며 “글로벌 경쟁력 제고를 위해 다양한 경험과 배경을 가진 이사회가 구성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국 기업에 관료나 법조인 출신 사외이사가 많은 이유를 리스크 관리 차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관료나 법조인 출신 전관을 사외이사로 임명해 정부와 사법기관에 대한 ‘방패막이’로 삼는다는 것이다. 특히 올해 들어서는 편중이 더 심해지고 있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매출 상위 30대 그룹의 237개 계열사 중 71개사의 올해 주주총회 소집결의서(3월4일 기준)를 분석한 결과, 신규 추천 사외이사 103명 가운데 41명(39.8%)이 전직 관료이거나 판검사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검찰 출신이 8명으로 가장 많았다.
재계에서는 비교적 선임하기 편한 이들을 뽑다보니 인력 편중이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사외이사를 선임할 때 상법상 제약 조건이 많은데, 학계나 법조 출신이 상대적으로 그런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이라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전문성 있는 사외이사를 뽑고 싶지만 기업 돌아가는 사정을 알거나 사외이사 경험이 있는 인력풀이 작다”고 밝혔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교수나 전관 위주의 사외이사 구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타당하다”며 “현직 경영인을 데려오기 무리라고 생각한다면 전직 경영인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자산 규모 2조원 이상 기업의 사외이사는 이사회 내 후보추천위원회에서 추천한 인사를 주주총회에서 승인하는 방식으로 선임하고 있다.
현행 상법은 최대주주 및 그 특수관계인 등 사외이사가 될 수 없는 자격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실질적으로는 경영진이나 지배주주의 추천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 전체 기업이나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끊임없이 나온다.
박범진 순천향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외이사 추천 단계에서부터 지배주주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독립적인 제도가 마련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집중투표제는 이사회 강화와 관련해 단골로 언급된다. 각 주주들에게 소유 주식 1주마다 선임할 이사 수와 동일한 수의 투표권을 주는 제도다. 이를 통해 최다 득표를 한 후보부터 순서대로 이사로 임명한다. 때문에 소액주주들이 특정 인물에게 표를 몰아줘서 당선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집중투표제는 의무가 아닌 선택 사항이다. 삼일PwC 거버넌스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 지배구조를 공시한 기업 중 집중투표제를 채택한 회사는 5% 미만이다.
경제개혁연구소가 2022년 발표한 분석 결과에 따르면 대기업집단 상장계열사 내 독립성이 의심되는 사외이사 비중은 16.6%다. 연구소는 계열사 임직원 출신, 소송대리 또는 법률자문 기관 출신, 전략적 제휴 또는 거래 관계, 민영화된 공기업을 담당했던 정부 부처 출신 등을 독립성 의심 사례로 꼽았다.
이창민 교수는 “독립성이 보장돼 있지 않은 사외이사는 견제 기능이 약해 문어발식 확장 등 비효율적인 투자 행위를 막기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