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간의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에 스며든 지금, 여러 여행지 중에서도 마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 같았던 몽마르트르에서의 기억은 마치 영화 포스터처럼 선명히 가슴 속 추억의 앨범에 저장돼 있다.
숙소에서 지하철을 타고 20분 만에 도착한 지하철 아베쎄(Abbesses) 역, 몽마르트르역이라 불리는 이 역에 도착하자 제법 쌀쌀한 늦가을 비가 흩뿌린다. 여행의 비수기를 만든 주요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변덕스런 날씨라는데, 비 오는 몽마르트르도 나름 낭만 있다.
역에서 올라오면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길, 이 길이 몽마르트르로 가는 길이다. 길 옆으로 작고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을 비롯해 갤러리, 카페가 이어지는데, 오락가락하는 비와 함께 언덕을 오르다 보니 <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이 매일 자정에 푸조 차를 타고 시간 이동을 하는 것처럼, 이 언덕길이 마치 20세기초로 가는 길목인 듯 느껴진다.
20세기 초로 가는 길목, 몽마르트르
▲ 몽마르트 언덕으로 오르는 언덕길 |
ⓒ 추미전 |
비 오는 몽마르트르 광장의 풍경은 20세기초 파리의 황금시대를 연상케하는 낭만이 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누군가는 설렘으로 셔터를 누르고, 누군가는 분위기 있는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잔을 기울이고, 누군가는 광장 곳곳에 자리 잡은 초상화 화가들 앞에 꼼짝 없이 앉아 모델을 하고 있다.
남편도 이 특별한 곳에 왔으니 초상화를 꼭 하나 그려가고 싶다고 해서 30여 분 동안 꼼짝도 않고 모델을 자처했다. 한 사람이 초상화를 그리는 비용은 80유로, 12만 원에 가까운 돈이지만 '여행지니까, 그리고 여긴 몽마르트르니까...' 기꺼이 지갑을 열게 하는 마법이 몽마르트르에는 있다.
▲ 몽마르트 광장에서 초상화 그리는 모습 |
ⓒ 추미전 |
사람들의 눈이 다 비슷한지 유독 남편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본인 화가 한 사람에게 관광객들이 줄을 섰다. 지금 몽마르트르 광장에서 그림을 팔거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만 20세기 초, 이곳에는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있었다.
몽마르트르 여행은 여행이 공간의 이동뿐만 아니라 시간의 이동임을 느끼게 한다. 광장 옆으로 뻗은 미로 같은 골목을 다니다 보면 모네가 10년을 살았다고 하는 작업장이 보존돼 있고, 피카소가 1904년부터 1909년까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머물렀다는 공동 작업장 '세탁선'도 있다.
술집 '라팽아질'에서는 프랑스의 국민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카바레 가수로 노래를 했다. '빠담 빠담 빠담'을 애절하게 부르는 에디트 피아프를 보기 위해 이브 몽땅을 비롯한 숱한 남성들이 술집을 찾았고,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100년 전 그들이 걸었던 거리를 나도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역사 속 이름을 남긴 그들이 한결 친근하게 느껴진다.
▲ 몽마르트의 카바레 < 라팽아질 > 파키소가 자주 들렀던 집이자 에디트 피아프가 노래를 했던 집이다 |
ⓒ 추미전 |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오는 살바도르 달리와 로트렉, 드가와 피카소 이야기가 몽마르트르에서는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몽마르트르의 카바레 '라팽아질'을 자주 찾았던 피카소는 어느 날 술을 마시고 술값을 낼 돈이 없어 자기의 그림을 주인에게 건넨다. 그때 주인은 돈 대신 내미는 무명 화가의 그림을 어떤 표정으로 받았을까? 이 그림은 세월이 흐른 후 뉴욕 경매에서 4070만 달러 (277억 원)에 팔린다.
그런데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 있는 샤크레 성당에서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파리 도심을 내려다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파리 도심을 발 아래로 볼 수 있는 뷰 맛집, 이렇게 좋은 풍광의 몽마르트르가 어떻게 20세기초 가난한 예술가들의 보금자리로 남겨졌을까?
만약 그때 1인 1 마이카 시대가 도래했다면 가난한 예술가들은 몽마르트르 언덕마저 부유한 이들에게 내주고 파리에서 더 먼 곳으로 밀려났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당시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덕에 130미터의 언덕을 걸어서 오르는 수고를 꺼리는 부자들 덕분에 몽마르트르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안식처로 남겨졌던 것 같다.
▲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보이는 파리 도심 |
ⓒ 추미전 |
몽마르트르의 뮤즈 수잔 발라동
몽마르트르 중심 광장으로부터 약간만 비켜나면 미로 같은 골목이 펼쳐진다. 그중에 '몽마르트르 뮤지엄'이라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입장료가 15유로로 적잖은 데다 규모도 작은 건물이어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수잔 발라동'의 화실이 있다는 말에 티켓을 끊고 들어섰다. 뮤지엄 안으로 들어서면 불현듯 몽마르트르의 활기찬 소란스러움이 사라지고 고요한 정원이 펼쳐진다.
정원에서 가장 먼저 여행자들을 반기는 한 여인의 흉상, 바로 몽마르트르의 뮤즈 '수잔 발라동'이다.
▲ 몽마르트르 뮤지엄에 있는 수잔발라동의 반신상 |
ⓒ 추미전 |
'수잔 발라동'이란 화가의 이름은 7년 전 몽마르트르에 왔을 때 처음 들었다. 아버지 없이 사생아로 태어나 가난한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는 발라동은 몽마르트르에 있는 화가들의 옷감을 빨아주는 세탁부 일을 하다가 아름다운 미모가 화가들의 눈에 들어 그림 모델 일을 하게 된다.
실제 수잔 발라동은 르누아르를 비롯해 로트렉, 드가 등 당대 여러 화가들의 그림에 모델로 등장한다. 그림 속에 발라동은 한없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빛이 난다.
▲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가 그린 <부지발의 무도회> 속 수잔 발라동. 드가 등 많은 화가들이 수잔 발라동을 그렸다 |
ⓒ 퍼블릭도메인 |
그런데 화가들의 모델을 하면서 발라동은 그림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그녀에게 화가 로트렉을 비롯해 몇몇 이들이 도움을 주고 실제 발라동은 화가로 활동하게 된다.
그림 속 모델에서 그림 밖 화가가 된 발라동. 그런데 다른 남성 화가들이 그린 발라동의 모습과 자신이 그린 자화상 속 발라동의 모습은 확연히 다르다는 게 흥미롭다. 자신이 직접 그린 자화상 속 발라동은 선이 굵고 무표정해서 거칠고 강한 인상을 준다. 미화되지 않은 생활인의 모습을 거리낌없이 드러낸 발라동은 실제 그렇게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 수잔 발라동의 자화상 |
ⓒ 위키커먼스 |
몽마르트르 뮤지엄에 19세기 몽마르트르의 모습을 그림과 사진으로 전시해 놓은 것도 재미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곳은 수잔 발라동의 화실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방 한 편에 놓인 간이 침대와 낡은 이젤, 말라붙은 그림 물감.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그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 재현해 놓은 수잔 발라동의 아틀리에 |
ⓒ 추미전 |
화가 로트렉을 비롯해 음악가 에릭 사티, 르누아르 등 수많은 남성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남성 편력을 일삼으며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발라동, 그녀는 18살에 사생아 아들을 낳게 되는데 아들 역시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 알코올 중독자로 정신 병원과 감옥을 전전하던 아들의 손에 붓을 쥐어주고 그림을 가르친 것도 그녀다. 우여곡절 끝에 화가가 된 아들 '모르시 위트릴로', 그렇게 정식 그림 교육을 받지 못한 모자는 둘 다 화가가 된다.
사생아, 미혼모, 세탁부, 갖은 멸시의 호칭을 달고 사는 그녀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눈물과 한숨으로 지낸 많은 날, 그녀에게 그림은 존재 이유이자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목숨을 걸어볼 그림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수잔 발라동은 평생에 걸쳐 278점의 유화와 231점의 드로잉을 남긴다. 뿐만 아니라 여성 최초로 파리 국립 예술원 회원이 된다.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 역시 평생 3천 점의 그림을 남기는데, 나중에는 마티스, 보나르 등과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는다.
모리스 위트릴로는 평생 몽마르트르에 살며 몽마르트르의 다양한 모습을 풍경화로 담았다. 라팽아질, 몽마르트르의 풍차 등이 모리스 위트릴로의 그림에 그대로 다 남아있어 20세기초 몽마르트르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사람은 아주 작게 표현하고 몽마르트르의 풍경을 그린 모리스 위트릴로의 그림,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처럼 담백하고 순수하게 몽마르트르의 풍경을 묘사한 모리스 위트릴로의 그림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마음이 끌렸다. 그림을 잘 모르지만 내 마음에 다가오면 그게 내 기준 좋은 그림이다. 내가 좋아하는 캐나다 국민화가 모지스의 그림을 닮은 듯 보이기도 했다.
▲ 수잔발라동의 아들 모리스위트릴로가 그린 라팽아질 |
ⓒ 몽마르트뮤지엄 |
이 작은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적은 덕분에 수잔 발라동의 화실에 여유롭게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내 옆에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수잔 발라동의 삶을 살아가는 여인이 있다면 나는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극히 표준적인 삶을 살아가는 나는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세기를 건너 작품과 함께 다가오는 그녀의 삶에는 한없이 경의를 표하게 된다. 수많은 절망과 좌절의 순간을 딛고 결국은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 수많은 작품들을 남긴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그녀가 이룬 많은 성과에 대해 엄지 척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날은 몽마르트르 분위기에 취해 오후에 하려고 했던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광장 곳곳에 노란 전등이 밝혀지는 저녁까지 몽마르트르 언덕에 머물렀다.
끝까지 가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인생의 모호함 속에서 끝내 포기하지 않고 무명의 순간들을 견딘 수잔 발라동과 지금은 당당히 파리 도심 오르세 미술관에 그림이 걸린 몽마르트르 출신 화가들을 생각하며, 인생은 끝까지 가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진리를 새삼 되새겼다.
▲ 몽마르트르의 야경 |
ⓒ 추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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