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동학농민혁명, 충청북부·대둔산 최후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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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 68]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갑오왜란·동학의병전쟁
▲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충북보은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다. 행정구역이 보은이지만 넓게는 충청도와 충청북도를 아우르는 동학혁명기념공원이다. 필자가 전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거의 답사를 하였지만 이곳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가장 맘에 들었었다. 성두환 동학대접주의 보국안민 척왜창의 정신도 이곳에 담겨있으리라 생각한다.
ⓒ 동학혁명기념관

성두환, 일본 도적들을 격파하려했지만

「성두환 의병장이 발표한 최후의 포고문을 살펴본다. '이번 동도(東道)의 창의는 천도(天道)를 봉행하여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하려는 것이라. 왜적이 창궐하매 국가가 조석으로 위태하고 생령이 도탄에 들게 되었으니, <중략> 일본 도적들을 곧 격파하여 위로는 임금의 위태함을 풀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의 생명을 건질 것이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동학군은, 왜적 즉 일본군을 도둑으로 보고 그 도둑들을 치려했던 의병군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성두환 의병장, 충청북부 대두령 위치

성두환 의병장은 손병희 대통령의 북접 주력부대와 호응하며 충청도 북부를 중심으로 경기도와 경상도 북부까지 포괄해서 일본군과 관군을 괴롭혔다. 성두환은 청풍에 근거지를 두고 남접 기포 후 손병희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촌 형제를 여섯 명이나 적극 가담시켰다. 그는 충청도 대두령의 위치에 올라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의병장 성두환 대두령은 일본군이 조선 왕궁을 침범한 후부터 움직이기 시작하여, 전봉준의 9월 재기포 이전인 8월부터 그 조직력과 영향이 크게 부각되었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 등을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 경상도와 충청도, 경기도로 연결되는 도로를 정비하였다. 또한 군용전선 가설을 위해 병참부와 군용전신소를 설치했다. 성두환이 이끄는 동학의병군들이 이러한 시설들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일들이 벌어지면서 일본군은 골치를 앓았다. 성두환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일본군에게 쫓겨 후퇴하면서 조선 백성들에게 약탈을 자행한 청군에게도 크게 분노하였다.

일본군, 전봉준과 성두환이 최고의 적수

성두환 대두령은 최시형 법헌의 9월 총기포령에 적극 가담하였고, 또 독자적인 활동 영역을 넓혀 갔다. 일본군 사령부는 전봉준 다음으로 성두환을 지목하여 끈질긴 추격과 섬멸의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 사령부에서 전봉준과 성두환을 전라도와 충청북부 동학당 적수(賊首) 즉 우두머리로 지목하고 끈질긴 추적을 시작하였다.

성두환은 동학에 대한 믿음이 강해 최시형 법헌, 손병희 통령과 적극 연대하였다. 언제나 동학군의 선두에서 진두지휘하는 의병장이었고, 전봉준과 손병희에 뒤지지 않는 실천적 전략가였다. 성두환이 갑오년 11월 1일(음) 발표한 최후의 포고문은 그의 대장부다운 면모를 잘 보여준다.

▲ 성두환 대접주 충북 충주 가흥 점령지 성두환 동학 대접주는 충청북부지역 대두령으로서 그의 활동 범위는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일본군은 성두환 장군을 전봉준 장군과 같은 주요인물로 추적하곤 하였다.
ⓒ 동학혁명기념관

포고문, 무장과 청풍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향하여

동학군 전라도 의병대장 전봉준 장군이 3월에 무장에서 포고문을 반포하였다. 동학군 충청북부 의병대장 성두환 장군이 11월 청풍에서 포고문을 반포하였다. 대부분 남북접을 상징해서 전봉준과 손병희를 거론하나, 당시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 충청도 의병대장은 성두환이 그 위치를 확고히 자리하고 있었다. 성두환 장군은 훗날 전봉준 장군과 같은 곳에서 한날한시에 죽음도 같이 한다.

동도포고문

『이번 동도(東道)의 창의는 천도(天道)를 봉행하여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하려는 것이라. 왜적이 창궐하매 국가가 조석으로 위태하고 생령이 도탄에 들게 되었으니,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매 통곡조차 할 수 없도다. 슬프다. 저 화친을 여는 나라를 배반한 신하와 서로 어지럽히는 유생들의 무리가 왜적과 결탁하여 임금을 위태롭고 욕되게 하며 동학도를 죽이니 남쪽의 예천과 동쪽의 강릉이 중심이 된지라.

이제 죄를 묻기 위하여 의로운 깃발을 드노니 호서와 관동의 동학 대군이 영월, 평창, 정성 등의 지방에서 분담하여 후원하면 저 역적의 이해수 대장은 죄악이 하늘에 닿아 신(神)과 사람이 함께 격분하고 있으니, 마땅히 형세를 타서 공격하면 그 괴수를 섬멸하고 근거지를 탕진할 것이로되 전투가 미치는 곳에 무고한 모든 세상 사람들을 보아서라도 어찌 차마 이 일을 하리오. 생명을 아끼고 사랑과 인격의 존엄을 알아 마음에 간직하여 아직 동학군이 머물러 있다.

이에 급히 격문을 보내노니 여러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도인과 백성들은 물론하고 진실로 나라에 충성할 의분이 있으면 곧 정의의 군사를 일으켜 각각 이에 응하라. 추상같은 칼날 아래 곧 이해수의 머리를 베어 대군(大軍) 앞에 나아가 이 뜻을 전하면 공은 높아질 것이며 의(義)는 빛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일대에 군사를 몰아 아침저녁 사이에 장차 무찔러 섬멸하고야 말 것이니 모든 군자(君子)는 힘쓰고 힘쓰라. 그런 후에야 일본 도적들을 곧 격파하여 위로는 임금의 위태함을 풀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의 생명을 건질 것이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포고(布告)하여 보이노니 각각 모름지기 알지어다.』
갑오년 11월 1일 호서의병대장 성두환

▲ [목판화] 한밤에 나리는 눈송이 농민화가 박홍규의 목판화 '한밤에 나리는 눈송이'다. 갑오년 동학군들은 몹시 춥고 배고픈 상태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우금티 패전 후 일본군 추격에 밤길을 헤매며 최후항전을 하였다. 성두환 의병장이 생각나는 눈쌓인 겨울 밤이다.
ⓒ 박홍규

일본군, 성두환과 동학당 섬멸작전 개시

성두환의 동학군이 줄기차게 항일 의병 운동을 지속해 나가자, 일본군 사령부는 독립후비보병 제19대대에게 훈령으로 충청도 일대의 각지에 출몰하는 동학당을 섬멸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특히 일본군은 동학군이 충주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 강원도를 거쳐 러시아로 들어가 국제 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일본군은 후비보병 19대대 군사 중 정예 군사를 엄선해서 전신선 가설부대의 호위부대와 연합하여 성두환의 동학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체포한 동학 지도자나 참여자들을 최대한 잔인하게 죽임으로써 민중들의 호응을 차단하였으며, 동학당과 관련 있는 동네나 민가를 마구잡이로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특히 성두환의 근거지인 청풍 일대는 철저하게 보복과 학살을 자행하여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작전은 10월 20일(양11.10)경부터 11월 20일 이후까지 무려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성두환 의병장이 피체되다

일본군의 한 달이 넘는 섬멸 작전으로 동학의병군 수천 명과 민간인 수천 명이 희생당했다. 갑오년 겨울은 다른 해와 다르게 몹시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성두환과 동학군 지도자들은 일본군 후비보병과 강원감영 관군들의 추격을 피해 강원도 일대를 전전했다. 그러나 일본군과 감영군의 끈질긴 추적으로 을미년(1895) 1월 초, 성두환은 피로 물든 칼이 두 동강 날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끝내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 전봉준 장군과 한날한시에 같이 순국하였다.

「일본군과 그 꼭두각시 관군들은 동학당과 관련 있는 동네나 민가를 마구잡이로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특히 성두환의 근거지인 청풍 일대는 철저하게 보복과 학살을 자행하여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작전은 1894년 10월 20일(양11.10)경부터 11월 20일 이후까지 무려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한 달이 넘는 섬멸 작전으로 동학의병군 수천 명과 민간인 수천 명이 희생당했다.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픈 사연들이 역사 속에서 그림자로 남아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 흔적마저 희미해져 가니, 필자의 졸필을 감수하고 여기에 남기고자 한다.」

▲ 대둔산의 아침 농민화가 박홍규가 그려낸 대둔산의 아침이다. 하늘 높이 치솟은 눈쌓인 대둔산 바위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동학군들의 모습,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터에서 저토록 아름답게 빛나는 자연이 대조적인 함수관계로 보인다.
ⓒ 박홍규

대둔산, 거센 칼바람과 내리퍼붓는 눈발

「동학의병전쟁사에서 대둔산전투를 최후항쟁이라 일컫는다. 물론 그 후 전투도 있었지만, 규모가 큰 2차 동학농민혁명·항일무장투쟁의 마지막 전투는 대둔산전투로 끝을 맺는다고 볼 수 있다. 그 치열한 마지막 항쟁의 때는 을미년(1895) 1월 24일(양2.18), 거센 칼바람과 내리퍼붓는 눈발에 온몸이 꽁꽁 얼어 손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혹한이었다. 일본군과 그들의 지휘를 받는 관군의 최신 대포 등 중화기가 다시 불을 뿜었고, 총포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요란하였다. 그들의 총알과 포탄을 맞은 바위들이 산산조각 나며 동학군들이 한두 명씩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져갔다.」

최공우, 김석순 접주 등 최후항쟁 돌입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의병연합군이 해산을 결정한 후 일부 동학군들은 대둔산에 집결했다. 최공우와 김석순 접주를 중심으로, 고산(高山) 금산(錦山) 연산(連山) 군현 등 동학군 1천여 명이 전라도 대둔산 부근으로 잠입했다. 일본관군연합군은 이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중화기로 무장한 군대를 대둔산에 집결시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일본군에게 동학군 수백여 명이 희생당했으며, 수백여 명은 도주하였다. 그러나 김석순 접주를 비롯한 동학군과 지도부 26명은 대둔산 산정 근처 큰 바위 사이에 3채의 요새를 짓고 주위에 큰 돌과 거목을 쌓아 최후의 항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은 대둔산(해발715m)의 거대한 암반 상단에 자리하여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산 아래에서 위를 향해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동학군도 이에 맞서 화승총을 난사하며, 돌과 바위, 거목을 굴리고 던지면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 동학농민혁명 대둔산항쟁전적비 동학혁명 최후 전투지로 알려진 대둔산 유적지는 해발715m의 거대한 암반 상단에 자리하고 있다. 그 마지막 전투는 을미년 (1895) 1월 24일(양2.18)이었다. 그날따라 바람은 칼날처럼 옷속으로 파고들었고, 눈발은 끝없이 앞을 가렸다. 대둔산항쟁전적비는 2015년 12월 28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 동학혁명기념관

동학군, 살이 갈라지고 핏줄이 터진 곱은 손

그 치열한 마지막 항쟁의 때는 을미년 (1895) 1월 24일(양2.18)이었다. 그날따라 바람은 칼날처럼 옷속으로 파고들었고, 눈발은 끝없이 앞을 가렸다.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손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혹한이었다. 동학군이 몸을 감춘 그 요새의 앞은 깎아지른 절벽이었고, 뒤편 역시 험준한 악산이었다. 동학군은 살이 갈라지고 핏줄이 터진 곱은 손과 발을 자신의 몸에 비벼 대며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그때 절벽 아래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최신 대포 등 중화기가 다시 불을 뿜었다. 총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요란하였고, 포탄을 맞은 바위들이 산산조각 나며 동학군들이 한두 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일본군, 임산부까지 조준 학살

일본군과 관군은 절벽 위 동학의병군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할 때를 이용하여, 완전무장을 한 일본군을 대둔산 뒤편으로 기어오르게 했다. 동학군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산 아래를 향해 총을 쏘고 돌을 던지는 등 방어 전투에 여념이 없었다. 대둔산 뒤편에 오른 일본군 선발대는 동학군 요새를 급습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이들은 손을 들고 나오는 동학군과 임산부까지 조준사격하며 잔인한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 [목판화] 대둔산항쟁 김석순접주상 대둔산 뒷편에서 급습한 일본군이 동학군을 학살할 때, 김석순 접주는 한 살 여자아이를 품에 안고 150미터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목판화는 농민화가 박홍규가 그려낸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싶은 당시 현장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 박홍규

김석순, 여자아이 품에 안고 절벽으로 투신

일본군이 동학군을 학살할 때, 김석순 접주는 한 살 여자아이를 품에 안고 150미터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대둔산 최후 항쟁은 일본군과 관군의 파상공격으로 소년 1명만 살아남고 접주급 이상 25명의 간부들 모두 전사하였다.

또한 대둔산 최후 전투 직전에 폭설을 뚫고 몰래 피신한 동학군 21명은 관군과 일본군의 첩보원에게 발각되었다. 이들 동학군은 1월 27일 염정골(금산군 진산면 염정동)에서 조일연합군 추격대에게 포위되어 모두 참살당했다. 이로써 대둔산 최후 항쟁은 막을 내렸다.

고백하나이다

「대둔산 최후 항쟁만 생각하면
어쩌면 저렇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우리는 정말 할 수 있을까라는..
솔직히 도저히 이해가 가는 않는
선열님들의 희생정신이..
편안하게 먹고 사는 나를
우리를, 종아리 걷어붙이고
회초리를 맞고 맞다보면..
진정 보국안민(輔國安民)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을까..
죽기 전에는 알아야 하는데..
못난 후손 고백하나이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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