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학살 유족 김맹규 선생, 그가 털어놓은 아픈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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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그날까지 35화] (1부) 민간인 학살 유족 김맹규의 선행
▲ 사진1 2023년 6월 닭족골 유해발굴 후 봉안식에 참석한 김맹규 유족의 모습
ⓒ 김영희

윤석열은 3일 밤 10시 30분경 느닷없이 비상계엄령 사태로 평온했던 국민을 혼란과 위태로운 상황에 몰아넣었다. 갑진년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독자들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선행(善行)한 유족 김맹규 선생의 사연을 전하고자 한다.

필자는 2022년 6월 4일부터 진주시 집현면 봉강리 산83-7 장대산 중턱에서 진주지역 10차 유해발굴이 시작되어 12일간 자원봉사를 하였다. 봉강리 유해 발굴(주1)이 한창인 어느 날 서울에서 중등 교사로 봉직하다 퇴직한 김맹규 선생을 만나게 된다.

김 선생은 한국전쟁기 진주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친척 두 명을 잃었다. 큰아버지 김형강(1923년생 당시 28세)는 진주 사봉면에서 사봉지서 회의에 참석한 후 학살당했고, 외할아버지 강용희(1911년생 당시 39세)는 정촌면에서 개양지서로 끌려가서 학살당했다. 친가와 외가 모두 학살당한 집안이라 그 상황은 쉬 보이지 않는다.

김 선생의 다섯 가지 사연 중 첫 번째, 필자와 김 선생의 만난 사연, 두 번째, 외가집 봉전마을에서 끌려가 화령골에서 살아 돌아온 정영식 사연, 두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나머지 세 가지 사연은 28회 2부에서 계속된다.

어느 날 집현면 봉강리 유해 발굴장에서

▲ 사진2 (좌) 봉강리 발굴현장 보고회때 참석한 김맹규 선생(우) 봉강리 발굴현장에서 필자 발굴모습
ⓒ 김영희

필자가 한참 발굴하다가 잠시 허리 펴고 일어서는 순간 갑자기 산속 위쪽에서 두 분의 남자가 땀을 팥죽같이 흘리고 헐레벌떡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발굴장 쪽으로 오고 있었다.

필자: "(너무 놀라) 어디서 온 누구신지요?"
김 선생: "(두 분 중 한 명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굴엔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유족입니다."
필자: "예? 근데 왜 산속에서 내려오십니까? 아래에서 올라오는 길… 있는데요."
김 선생: "난 유족 김맹규이고 퇴직 후 부산 어머니를 보필하고 있어요. 진주에는 백부와 외조부가 학살당했기에 친구와 함께 부산에서 봉강리 발굴장을 찾아왔어요. 발굴장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설정하니까! 장대산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는 길을 안내 해주어 그대로 찾아오니 이렇게 되어서요. (서로 웃음, 두 분이 발굴장을 찾겠다는 일념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그러셨군요.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단디뉴스 기사 쓴 이후 처음 만난 유족

김 선생은 인사를 하면서 "혹시 단디뉴스 기사 쓰는 김영희 선생님 아니십니까"라고한다. "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맞습니다", "아이고! 기사 잘 보고 있습니다." 하여 필자는 단디뉴스 기사 쓴 지 1년 정도 지난 땐데 기사를 보고 저를 알아본 사람은 김 선생이 처음이라 신기하고 반갑고 고마웠다. 사실 기사를 쓰면서 내 기사를 누가 보겠어!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뜻밖에 보람을 느끼고 기뻤다.

또한 진실화해를위한위원회(이하 진화위)에 근무하는 진주 이정은 조사관이 자기 직속 과장이 김영희 선생님 기사 매달 챙기면서 스크랩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마음이 뿌듯했다. 김 선생과 필자는 발굴지에서 이런저런 말씀도 나누고 발굴지를 둘러보고 착잡한 마음으로 발굴지를 뒤로 한 채 발길을 돌렸다. 사실 김 선생의 친척 두 분은 이곳에서 학살당한 것은 아닌 듯했다.

어느 날 전화 한 통 걸려 왔다

사실 기사를 준비하다 보면 온통 책상 위에는 유해 사진과 자료가 펼쳐져 있다. 한밤중에도 유해 사진만 보고 있을 때면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기사 쓰는데 날짜 맞추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하니 남편이 이제 기사 그만 쓰면 안 되냐고 언 듯 건넨다. 하지만 한 번도 기사를 그만두거나 유해 발굴 봉사를 그만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냥 힘이 닿을 때까지 해보자는 것이 평소 소신이었다. 힘이 많이 들고 우울해지는 것은 발굴일을 하는 이상 필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러던 2023년 4월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입력이 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였다.

여보세요. 혹시 작년에 봉강리 발굴장에서 만난 유족 김맹규인데 기억나십니까! 아예! 기억납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아! 내가 선생님께 꼭! 한 가지 궁금한 것 있는데 제가 진주로 갈 테니까! 잠시 차 한잔하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한다. 아예 그러시죠. 근데 무슨 일 이십니까? 여쭤보니! 꼭 만나서 해야 할 말이라고 한다. 전화를 끊고 별생각이 다 든다. 무슨 일이지! 혹시 발굴 자원봉사를 함께 하자고 하는 걸까? 아님! 뭐지? 그리고 며칠 후 진주에 오셔서 촉석루 앞 찻집에서 만났다.

김 선생은 앉자마자 "오랫동안 유해 발굴 봉사하고 있는데 혹시 진주유족회 측이나 관공서(진주시) 측에서 수고비를 받고 유해 발굴 다니십니까?"라고, 물어왔다. "아니요! 전혀 아닙니다. 제가 스스로 자원봉사 하는 겁니다"라고 하니 "역시 내 생각이 맞았네!"하며 "한편으론 김영희 선생님께서 수고비를 받고 유해 발굴 다니겠지! 어떻게 장기간 봉사로 발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누가 한두 번은 봉사할 수 있지만 9년간 유해 발굴 자원봉사를 다니겠냐고 이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긴가민가 했다"면서 필자를 만나 확인하고자 왔다는 것이다.

"예! 저를 그렇게 인정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좀 힘들긴 합니다"라고 속마음을 터놓았다. "어떻게 유해발굴을 긴 세월 동안 봉사할 수 있습니까! 대단하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위로해 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우울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으면서 위안이 되었다. 가끔 지인들이 왜 하필이면 무서운 유해발굴 봉사냐 한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우리도 언젠간 그 모습이 될 것 잊고 사는 것이 씁쓸할 때가 있다. 하지만 격려해 주고 인정해 주며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맘을 전하는 분들이 더 많아 보람도 느낄 때가 있다.

그 순간 김 선생은 "발굴 다니면서 교통비라도 보태세요"라며 돈을 내밀었다. 필자는 뜻밖의 상황이라 당황해 손사래 치면서 "선생님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이러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대화가 끝날 때까지 그 돈을 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60 평생 살면서 성실히 노력하여 그 대가로 받은 적은 있지만, 유해 발굴 봉사는 그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했기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김 선생의 간곡한 부탁으로 돈을 받고 찻값도 김 선생이 지불하고 부산으로 돌아갔다. 필자는 이 돈을 어떻게 쓰지 고민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이 무거웠다.

필자의 의지를 꺾어버린 문자 한 통

 사진3 ?김맹규 선생이 필자에게 보낸 문자 내용
ⓒ 김영희

필자는 유해 발굴 봉사하면서 유족들에게 무엇이든 받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김 선생의 간곡한 부탁과 위 문자에 필자의 다짐이 9년 만에 꺾이고 말았다. 문자를 보낸 후로 매달 필자에게 후원을 해주시고 오마이뉴스 연재 기사마다 후원해 준다. 가끔씩 발굴가면 교통비도 챙겨준다. 그것뿐만 아니라 필자에게 법적인 문제나 유해 발굴과 관련된 내용도 자문해 준다. 정말 김 선생의 후원과 따뜻한 마음이 필자에게 보이지 않은 스트레스를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자리를 비롯하여 김맹규 선생님께 깊이 감사를 전하고 싶다.

홀로 깊은 상념에 잠긴 모습

▲ 사진4 명석면 닭족골 유해 봉안식에 참석한 김맹규 선생은 항상 뒤편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
ⓒ 김영희

2023년 3월 22일 명석면 관지리 산174번지(일명:닭족골) 동방문화재연구원에서 12일간 발굴을 시작으로 6월에 봉안식에 참석한 김 선생은 항상 유족회 행사 때면 앞에 나서지 않고 뒤쪽에서 깊은 상념에 젖어서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행사 후 김 선생의 상념에 가득 찬 사연을 듣고자 잠시 대화를 하였다. 김 선생의 백부와 외조부가 학살당한 사연을 자세히 듣게 된다.

먼저 어머니 강봉선(1939년 3월 6일생 당시 16세)의 부친인 외조부(강용희)는 진주시 정촌면 관봉리(봉전마을) 367번지에서 거주하였다. 봉전마을에서 학살당한 사람 14명 중 7명이 강 씨였다고 한다. 그리고 백부 김형강(1924년 2월 29일생 당시 28세)은 진주시 진양군 사봉면 마성리 1127번지 거주하였다. 백부는 1950년 음력 6월 초하루 '매끌고개'에서 밭일하다가 큰어머니(이정순 1926.8.6.생)가 보도연맹 가입자들의 회의가 있다고 모두 사봉지서로 오라고 한다는 말에 "무슨 회의지? 잠깐 갔다 오겠소"하고 나간 후 소식이 없다고 한다.

필자: "선생님, 봉전마을에서 강씨가 많이 학살된 이유가 있습니까?"
김 선생: "정영식(도살이 양반)(주2) 증언에 의하면 새밭골의 '인민군 대장이었던 강달순'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언 듯 말했다. 당시 진주에만 진양 강씨, 하씨, 정씨 등 수만 명이 되었어요. 정확하진 않지만요."
필자: "명석면 신촌마을 골짜기 화령골 발굴지를 가보고 싶은 이유가 있습니까?"
김 선생: "예! 그곳은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필자: "무슨 사연입니까?"
김 선생: "우리 외가집 동네인 봉전마을에서 끌려간 14명 중 한 명이 화령골 학살지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있어서요."
필자: "예? 그 사람이 누구십니까?"
김 선생: "유일한 생존자 도살이 양반이 화령골 학살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어요. 이 사연은 「말지 89년 2월호」에 기사화되었어요."

▲ 사진5 (좌)1지점 닭족골 29구 발굴현장모습 (중) 화령골 2지점(19구)발굴됨(우)2지점에서 200m 정도 올라가면 길목에 과수원으로 개발하여 미발굴지임, 김맹규선생관 주민의 대화하는 모습
ⓒ 김영희

김 선생: "도살이 양반은 세 군데 이상 총알을 맞았어요. 턱에 맞은 총알은 슬쩍 빗나가고 복부에 맞은 총알도 스치고 종아리에 맞은 총알은 뼈를 스쳐 살갗을 관통하여 큰 부상을 당했어요. 정신 차려 보니 시신들이 자신 몸 위로 덮여 있어서 죽은 듯이 엎드려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신들 속에서 빠져나와 살았어요. 그래서 화령골이 어디인지 궁금했어요."
필자: "예 그럼 닭족골에서 가까우니까 화령골로 가시죠."
김 선생: "김 선생님이 안내해 주겠습니까?"
필자: "예! 닭족골에서 화령골까지 1km 정도 됩니다. (화령골에 도착하여) 이곳이 2021년 10월에 발굴한 화령골입니다. 증언에 의하면 1950년 7월15일경 버스와 트럭이 3~4대(300여 명)가 보도연맹원을 싣고 신촌리 화령골로 들어와서 3지점에서 학살한 곳입니다. 1지점은 닭족골, 2~3지점은 화령골에서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마침 화령골로 올라가다가 동네 주민을 만났는데 어디서 오셨냐고 하여 학살지 방문왔다고 하니까 '우리 엄마가 생전에 말씀하신 것 들었는데 당시 끔찍하였고 죄 없는 사람들 많이 죽였어!'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예 그랬군요.) 선생님 이곳에 방문하니 어떤 생각이 듭니까?"

김 선생: "아예! 도살이 양반이 이곳에서 총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참혹한 몰골로 15일간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명석면 화령골에서 정촌면 봉전마을까지 거리를 계산해 보았는데 약 20km 이상 되는 거리인데 총상으로 피투성이 몸을 이끌고 그것도 낮에는 못 걷고 밤에만 걸었다고 하니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필자: "저도 거리를 재어보니 기적인 듯합니다. 선생님! 어머니가 도살이 양반 이야기를 언제부터 김 선생한테 말씀해 주었는지 기억하십니까?"

▲ 사진6 최근까지 김맹규 선생의 모친 강봉선(86세)은 아들과 외조부 학살 당 한 사연을 힘겹게 대화하는 모습(사진제공:김맹규)
ⓒ 김영희

김 선생: "예 대략 10살(1968년도) 때부터 2024년 현재까지 생존해 계신 강봉선(1939년 3월 6일생, 86세) 어머니에게 수천수백 번 들었어요."
필자: "예 그랬군요. 참 힘들었겠습니다. 어쩌다가 도살이 양반의 '진실규명신청과 국가손해배상 청구를 도와주게 된 겁니까?"
김 선생: "2기 진화위 설립 전에 제 외조부와 백부에 대해 손배상소송을 청구해야겠다고 변호사를 수임하던 차에 변호사 측에서 3명 이상 피해 소송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하여 정영식 유족에게 같이 소송하자고 권유한 것이고 그 이후 2기 진화위가 결성되었기에 저도 참고인이 아니라 신청인으로 신청을 해드린 겁니다. 진실규명 신청은 유족이 아니라도 신청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손배상소송은 유족만 원고가 가능합니다."
필자: "정영식 자녀 누구와 상의하였습니까?"

김 선생: "저의 사촌 형(김재규)과 함께 정영식 아들 정상대를 찾아서 봉전마을을 갔어요. 그런데 문전박대를 받았어요. 1기 때 정영식 부인 백재순의 참고인 진술조서를 구해봤는데 신청인이 아니라 참고인 진술조서였기 때문이었다. 정영식 진실규명은 포기한 상태인데 우리가 느닷없이 찾아와서 관련 법에 의거 신청 가능하다고 알려드렸는데도 막무가내 욕설하고 사 들고 간 수박까지 도로 가져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했어요."
필자: "'민간인 학살장에서 생존자 중 최초로 진실규명과 손배상청구'에 도움 드리기 위함인데 왜 그런 언행을 했습니까?"

김 선생: "정상대는 주변에서 관련 법에 의거하지 않은 뜬 소문을 듣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혹시 브로커가 아닌가 오해한 것 같았어요. 하도 노발대발해서 그냥 발길을 돌리는데 며느리가 살짝 나와서 정도점(큰딸) 연락처를 주면서 의논해 보라고 하여 정도점과 상의하여 진실규명 신청서와 손해배상청구까지 제가 모두 해드린 겁니다. 정도점을 태우고 진주에서 서울 변호사 사무실까지 왕복 자가용으로 모시고 서류 제출하고 착수금과 인지대 비용 320만 원도 제가 부담했습니다."
필자: "예! 선생님 고생 많이 하셨네요. 선생님 생존자도 진실규명과 손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까?"

김 선생: "예 당연히 받을 수 있습니다. 정영식의 경우 '단순생존자'가 아니라 국가폭력인 군경의 집단살해 또는 상해 또는 행방불명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진화위에 진실규명신청 할 수 있고 법원에 국가손배상 청구를 할 수 있는 관련 법을 확인하여 신청한 것입니다. 원래는 학살당한 자 보다 생존자가 손배상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 사진7 2024년 12월 16일 도살이 양반이 생존 때 거주한 집과 방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모습
ⓒ 김영희

필자: "예 그렇군요. 선생님 자료 찾다가 외가집 봉전마을에 지인이 농사짓고 있어서 제가 다녀왔습니다. 지인한테 도살이 양반 들어봤냐고 물어보니 그 동네 아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았는데 도살이 양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김 선생: "아 그랬군요. 잘하셨어요."
필자: "생존자(정영식) 유족에게 큰 도움을 주신 거죠?"

김 선생: "최초로 학살지에서 생존한 사람이 진실규명도 받고 손배상청구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지요."

필자: "선생님께서 정영식의 유족에게 도움을 준 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 같습니다."

김 선생: 아닙니다. (웃으며 손사래 친다.) 사실 내가 평생을 백부와 외조부 사건과 정영식 사연을 수백 수천 번 듣고 살았어요. 정영식은 학살지에서 살아 돌아와서 총 맞은 상처의 통증 때문에 술로 통증을 제어하며 세월을 보냈어요. 당시는 약도 귀해서 사 먹지 못했고, 매일 같이 술은 꼭! 사러 다녔데요.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기에 도와드리고 싶었지요.

필자: 선생님 인터뷰 고맙습니다.

다음 달 36화(2부) 김맹규 선생의 '말지 기사와 한겨레 기사'와 백부와 외조부의 사연이 계속됩니다.

▲ 사진8 필자 명함
ⓒ 김영희

[각주]
주1) 2022년 6월 2일부터 6월 21일까지 총 14일간 일정으로 역사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한 결과 유해 총 41구와 유품은 의복, 버클, 신발, 약병, 사각 도시락, 양은그릇, 가방 걸쇠, 교복 플라스틱 옷깃 등 총 416점이 출토된 곳이다.

주2) -진실규명신청서-내용 인용. 정영식은 1922년생 당시 29세로 경남 진양군 정촌면 관봉리 733-2번지에 살았다. 1950년 7월 15일(음력 6월1일) 정촌지서로 자진 출석, 이후 진주경찰서 및 진주감옥소에 감금되었다가 10일 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신촌골짜기(일명:화령골)에서 학살되었으나 총 3발 이상을 받았는데 총상을 입은 채 15일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함. 그 후 봉전마을에서 도로 살아 돌아왔다는 뜻으로 '도살이 양반'으로 불리어졌고, 1999년 69세 나이로 별세함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단디뉴스에도 실립니다. 김영희 (전)교사 한국전쟁기 창원유족회 유해 발굴 조사단장·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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