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 동네 산책할 때 막대기를 챙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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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치앙라이에서 겨울 보내기] 걷는 재미" 9시 15분에서 30분 사이에 온천에서 봐."

아침 7시가 좀 지나 활터로 가면서 남편이 그랬다.

태국 치앙라이로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우리는 그동안 나름 여행 노하우가 쌓여 이제는 돌아다니며 구경하거나 그러지 않고 한곳에 머무르며 조용히 지낸다. 여기가 마치 한국의 우리 집인 양 동네 안만 다니고 한국에서 지낼 때와 비슷한 루틴으로 하루를 보낸다.

남편은 아침에 일어나면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활터로 간다. 그동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약속 시간에 맞춰 온천으로 간다. 온천욕을 하고 아침 겸 점심을 사 먹는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지내다 오후 느지막이 저녁 장거리를 사러 시장에 간다. 매일 똑같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이렇게 하루를 지낸다.

 태국 치앙라이의 푸른 하늘과 초록 들판
ⓒ 이승숙

퇴직을 하면 겨울에는 따뜻한 남쪽 나라로 여행을 떠나자는 꿈을 꾼 게 2009년도였다. 막연하게 큰 그림을 그려놓고 지내다 2017년에 남편이 퇴직을 하자 우리는 그동안 꿈꿨던 남쪽 나라 겨우살이를 실행했다. 베트남 달랏으로 가서 두 달여 지내고 이듬해 2월 초에 한국의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은퇴 후의 연금 생활

그 후로 해마다 겨울이면 동남아로 가서 겨울을 보냈으니 햇수로 벌써 9년 가까이 동남아 겨우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돈이 많아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또래의 보통의 가정처럼 우리도 알뜰하게 살며 살림을 일으켰다. 남편의 외벌이로 살다 보니 생활은 늘 빡빡했다. 두 아이를 키우고 가르치느라 빚도 많이 졌다. 애들의 대학 등록금이며 방 얻느라 빌린 돈이 어깨를 내리눌렀다. 다행히 퇴직하며 받은 돈으로 빚을 다 갚았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아직도 빚에 눌려 지냈을 것 같다.

퇴직한 후로 연금을 받아 생활한다. 연금 액수는 현직에 있을 때 받았던 월급에 비하면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아쉽지 않게 지낼 수 있는 건 더 이상 자녀들에게 들어가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태국 치앙라이의 한가로운 풍경
ⓒ 이승숙

딸과 아들이 집을 떠나 외지에서 대학을 다녔으니 방값이며 생활비에 등록금까지, 한 달에 보내야 하는 돈이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먹고 살 기반을 잡을 때까지도 생활비를 보태줘야 했으니, 우리는 늘 돈에 쪼들렸다. 그러나 이제는 두 아이 모두 결혼해서 일가를 이뤘다. 이제 그들 살림은 그들의 몫이지 우리가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 연금으로 오로지 우리 둘만 먹고 살면 되니 예전 월급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 것이다.

남편과 온천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다. 하던 일을 접고 숙소를 나와 온천을 향해 출발했다. 온천까지는 걸어서 12분 정도 걸린다. 걷기에 딱 좋은 거리다.

준비물들을 챙긴 가방을 등에 메고 실내용 슬리퍼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신발장 한 편에 놔둔 막대기도 들고 갈까 하다가 말았다. 가져가 봐야 괜히 짐만 될 것이다. 그래서 막대기를 두고 숙소를 나왔다.

 개를 풀어놓고 키워서 개들이 동네를 돌아다닌다.
ⓒ 이승숙

막대기는 개를 만났을 때 대처하기 위한 무기 겸 도구다. 태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개를 풀어놓고 키우는 집들이 많다. 개는 늘 보던 사람에게는 별 반응을 하지 않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반응한다. 낯선 사람을 보면 다가오거나 짖을 때도 있다.

"우리 개는 안 물어요. 괜찮아요."

낯선 사람에게 개가 위협을 하는데도 개 주인들은 '우리 개는 안 문다'며 '괜찮다'고 한다. 개 주인에게는 개가 달려들지 않지만 낯선 사람에게는 달려들 위험이 있다. 태국 사람들과 말이 통한다면 그들도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 개들은 동네 사람에겐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낯선 동네 걷기, 개가 무섭다

태국에서는 걷는 사람이 별로 없다. 농담 삼아 하는 말로 "여기서는 외국인과 개만 걷는대요. 태국 사람들은 오토바이 타고 다니지 걷지 않아요." 그러기도 한다.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태국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지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잘 없다.

 흙길이라 더 정겨운 치앙라이 시골길
ⓒ 이승숙

 태국 치앙라이 외곽의 동네입니다.
ⓒ 이승숙

온천으로 걸어가는 길은 왕복 2차선 도로다. 인도는 없다. 그러니 오가는 차를 조심하며 길가로 걸어야 한다. 차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걷기보다는 오는 차를 보며 걷는다. 그러면 달려오는 차나 오토바이를 눈으로 볼 수 있으니 만약의 경우 대처할 수 있다.

온천으로 가는 길에는 개를 풀어놓고 키우는 집이 없는 것 같다. 몇 번 걸어서 가봤는데 돌아다니는 개가 없었다. 어떤 집 근처에 가면 개들이 사납게 짖으며 달려오지만 대문이 닫혀 있어 개들은 대문 앞에 멈춰서 짖기만 했다. 그 집은 개를 4마리나 키운다. 만약 대문이 열려 있다면 그 개들은 떼를 지어 공격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무섭다.

치앙라이는 4번 와봤다. 코로나 전에는 동네에 돌아다니는 개들이 더러 있었다. 그래서 가볍게 동네 산책을 하고 싶어도 하기가 꺼려졌다. 그런데 작년부터 돌아다니는 개가 부쩍 줄었다. 올해는 더더욱 볼 수 없다.

태국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개를 묶어놓고 키우라고 권하는 것일까. 관광객이 많이 찾는 나라이니 국가 경제 측면에서 외국에서 여행 온 사람들이 중요할 것이다. 개 때문에 발생하는 민원을 듣고 시행한 것인지 올해는 동네 산책을 해도 개를 만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아직도 개를 풀어놓고 키우는 집이 대부분이지만 대문을 닫아두기 때문에 개가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어릴 때 우리 동네 길도 이렇게 흙길이었다. 치앙라이의 시골 길.
ⓒ 이승숙

 아침에 걸었던 시골 길.
ⓒ 이승숙

그래도 시골로 가면 동네를 돌아다니는 개들이 있다. 한 번은 남편을 따라 활터로 갔는데, 활 쏘는 것을 구경하다가 나 혼자 근처를 산책했다. 인가가 별로 없는 외진 곳이라 겁이 좀 났지만 그래도 낮이니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걷는데, 저 위쪽 밭에 개 두 마리가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커다란 나무 막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걸어서 얻었다

나를 본 개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막대를 높이 치켜들고 눈에 힘을 주고 개를 보며 걸었더니 더 이상 가까이에 오지는 않았다. 그 후로 그쪽 길은 두 번 다시 걷지 않았다. 개가 무서워서 걸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숙소 이웃인 어떤 분은 혼자 동네 산책을 자주 하는데, 걸을 때면 꼭 막대기를 챙겨 간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개를 만날 경우 막대기가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움츠러든다. 개도 그런 걸 아는지 당당하게 나서면 더 이상 접근하지 않는데 움츠러들면 짖거나 가까이 접근한다.

 치앙라이 외곽의 시골 길.
ⓒ 이승숙

다행히 올해는 돌아다니는 개가 별로 없다. 동네 산책을 다녀도 될 것 같다. 아침과 저녁으로 운동 삼아 산책을 다니곤 했는데, 개를 조심하지 않아도 되니 이제 마음 편히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며칠 전에는 저녁 먹고 숙소 앞 골목길을 걷는데 저만치에 뭔가 깜박이는 게 보였다. '어? 뭐지?'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반딧불이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어릴 때 여름날 밤에 개울가에서 보곤 했던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절로 탄성이 나왔다. "우와, 반딧불이가 있다니, 여긴 진짜 청정지역인가 봐요." 같이 걷던 사람에게 무언의 동의를 구하였다.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반딧불이가 날아가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걷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순간을 걸어서 얻었다. 역시 걸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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