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응운 스님의 삶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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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행일치, 지행일치의 승려
▲ 응운선사순공지탑(應雲禪師殉公之塔) 전경. 백양사 부도(승탑군) 안에 있음(2024년 12월 12일 촬영)
ⓒ 박용규

(이전기사 "전남 장성 백양사에 가거든 꼭 봐야 할 초상화"에서 이어집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백양사 주지 응운(1854∼1896) 스님의 탑비는 백양사 성보박물관을 지나 1백미터 오른쪽의 부도(승탑군) 안에 있다. 승탑군 입구에서 가장 오른쪽 가장자리에 응운 스님 탑비가 자리 잡고 있다.

'응운선사 순국탑'은 2단의 8각형 기단 위에 비신(碑身)이 있는 형태로 세워져 있다. 탑비는 오석(烏石, 검은색 돌)이다. 비신의 가로와 세로 길이를 재었다. 비신 1면 가로는 41㎝, 2면 가로는 41㎝, 3면 가로는 40㎝, 4면 가로는 41㎝였고, 세로는 92㎝였다.

응운 스님의 탑비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탄생과 출가 내력, 공부 몰입과 강론을 펼친 학승 시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로 나서서 백성 구제에 전념한 시기, 탑비 건립 내력으로 구분하고 있다.

탑비 1면은 "응운선사순공지탑(應雲禪師殉公之塔)"으로 쓰여 있다. '응운선사 순국탑'이라는 것이다.

▲ 응운선사순공지탑(應雲禪師殉公之塔) 1면. (2024년 12월 12일 촬영)
ⓒ 박용규

응운 스님의 탄생과 출가 내력은 탑비 2면에 아래와 같이 나와 있다. \

"불기 2923년 1896년(병신년) 6월 응운선사는 전주감영의 심문에서 해를 만나 순국하였다. 선사의 법명은 우능(雨能)이고 호는 응운(應雲)이다. 1854년(철종 갑인년)에 응운 스님은 전남 장성군 주암의 밀성박씨 박종수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양씨이다. 나이 15세에 백암산 정토사(현 백양사)에 귀의해 보은(普恩)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

즉 응운 스님은 1854년 전남 장성군 주암의 밀성박씨 집안에서 아버지 박종수와 어머니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밀성박씨(密城朴氏)는 밀양박씨와 같다. 법명은 우능(雨能)이고 호는 응운(應雲)이다. 15세에 백암산 정토사(현 백양사)에 들어가 보은(普恩)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전주부재판소 이병훈(李秉勳) 판사가 1896년 6월 29일(양력 8월 8일) 전주감영에서 응운 스님에게 교수형 판결을 선고해, 그날에 순국하였다.

강론과 독송을 강조한 학승

학승으로서의 면모는 탑비 2면에서 아래와 같이 확인할 수 있다.

"응운 스님은 두루 돌아다니며 여러 산의 이름 높은 학승들에게 나아가 공부하였고, 내외 학문에 널리 통달하였다. 스님의 기운과 모습은 몸이 비대하고 위력과 위엄은 추상과 같았으나, 그의 마음속은 사실 즐겁고 편안하였으니 마음 따뜻하기가 봄과 같았다. 마침내 한양선사의 법통을 이었고, 본산인 백양사의 운문암(雲門庵)에 편안히 머물렀다. 때는 1894년(고종 갑오년)에 운문암의 주지 경담선사가 운문암의 암자를 중건하고자 앞장서서 응운 스님을 추대하여 화주(化主: 시주승)로 삼아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산 높은 곳에 운문암이 있어서 중건 공사는 늦어졌다."

이처럼 응운 스님은 젊은 시절에 이름 높은 학승들에게 나아가 공부하였고, 내외 학문에 통달하였다. 그의 학문 연찬은 범해 각안이 지은 <응운강백전(應雲講伯傳)(동사열전, 東師列傳)>에 잘 나와 있다.

"스님은 영구산(靈龜山)·조계산·지리산의 강원 강주들을 찾아다니면서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도 공부하는 데 몰입하였다. 강론의 향기를 맡고 산 기운에 취하며, 산봉우리를 감상하고 흰 구름을 읊으면서 정토사로 돌아왔다. 정토사에 돌아와 지혜의 향을 피우고 강당에 앉아서 경전을 가지고 의문 가는 부분을 묻기 위해 오고가는 학인들을 맞아 강론을 펼쳤다. 사방에 걸림이 없고 바람을 관찰하는 무리들도 물이 바다로 돌아가고 구름이 모여들듯 밀려들었다."(<응운강백전>, 579쪽)

응운 스님은 영구산·조계산·지리산의 학승들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였다. 백양사로 돌아와 학인들과 강론을 펼쳤다. 그의 강론을 듣고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어왔다. 범해 각안은 응운 스님을 "강론의 최고 승려(講伯)"로, 동시에 "강론과 독송을 함께 정립(講誦並立)"한 학승으로 규정지었다.

응운 스님은 한양용주(漢陽龍珠) 스님의 법통을 이었고, 8도 도총섭을 지낸 양악계선(羊岳啓璇, 1757∼1837) 스님의 4대 법손이다. 응운 스님의 학문하는 벗들로는 경담(鏡潭, 1824∼1904) 스님, 송암(松庵) 스님, 화담(華潭) 스님, 금해(錦海) 스님이 있다. 보경(寶鏡) 스님과는 동문이다.

동시에 1894년 운문암의 주지 경담 스님이 운문암의 암자를 중건하고자, 백양사 42세 주지인 응운 스님을 추대하여 화주(化主, 시주승)로 삼아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운문암의 중건 공사는 중지되고 말았다.

백성 구제에 전념한 실천승

1894년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응운 스님은 동학 접주(接主)로 동학농민혁명군을 이끌었다. '전주부재판소 판사 이병훈 보고서(1896년 8월 8일 제4호, <사법품보(司法稟報)>)'에서 그를 "비류거괴(匪類巨魁, 동학무리의 큰 우두머리)"로 기록하고 있다. 동학의 거괴는 동학 접주를 가리킨다. 이러한 내용은 아래 탑비 3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학이 일어나 몹시 어지러움에 운문암의 공사도 마침내 중지되었고, 아울러 여러 절과 암자의 스님들의 생활도 어지러워졌다. 응운 스님은 동학(삼매경)을 쫓아 봉기하였고, 중생(백성) 구제에 전념하여 동학 포(包)의 대오를 이끌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동학에 한번 참여하였다가 돌아온 다음 해(1895)에, 동학 소요가 이에 진정되자, 스님은 이루려던 운문암 중건 일을 거의 성취하였다. 1896년(병신년)에 응운 스님은 끝내 전주감영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감옥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무릇 그러하나 응운 스님은 지혜의 빛이 매우 빛나서, 오히려 재난(교수형에 처해짐)을 만나서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당당하였다."(탑비 3면)

이처럼 응운 스님은 1894년 백성 구제에 전념하고자 동학 접주로서, 동학 포(包)의 대오를 이끌었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수탈과 신분제의 질곡에 신음하고 있었고, 일제의 식민지화 책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 응운선사순공지탑(應雲禪師殉公之塔) 3면. 탑비 3면은 “동학이 일어나 몹시 어지러웠다(東道?攘)”로 쓰여 있고, 응운 스님이 “동학(삼매경)을 쫓아 봉기하였고, 중생(백성) 구제에 전념하여 동학 포(包)의 대오를 이끌며 지팡이를 휘둘렀다.(師從三昧以起專念?衆飛錫包伍)”라고 기록하고 있다.(2024년 12월 12일 촬영)
ⓒ 박용규

응운 스님의 동학농민혁명 시기 활동상은 구술 자료에 의해 보완할 수 있다. 서동석 선생은 백양사 방장을 역임한 수산(壽山, 1922∼2012) 스님으로부터 1994년 4월∼5월 경 영광 불갑사에 찾아가서 응운 스님에 대해 직접 들은 내용을 그대로 <법보신문>에 기고한 글('장성 농민군 이끌며 응운 스님 맹활약', <법보신문>, 2004, 8, 10.)에 그대로 옮겼다고 필자에게 말씀해 주었다.(필자는 2024년 11월 25일에 서동석 선생(1954년생, 71세)과 통화함)

"응운 스님의 지휘로 백양사와 불갑사, 선운사 스님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곳의 스님들은 1893년 3월의 원평집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삼남지방에 혹독한 가뭄이 일고 농민들의 소규모 저항이 빈발하면서 스님들의 합류는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공주의 우금치에서 대규모의 결사항전이 일본군의 개입 후 패전으로 끝난 뒤 농민군의 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관군과 일본군의 공세에 밀리면서도 논산 황화대에서 일대접전을 벌였다. 진산에서도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 응운 스님이 참전하였고 수만 명이 관가를 습격하여 읍성을 함락했다. 그러나 거센 관군·일본군의 연합부대에 밀려 전주를 거쳐 원평으로 남하했다. "(수산 스님의 1994년 증언, '서동석의 글')

즉 응운 스님이 백양사와 불갑사, 선운사 스님들을 지휘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시켰다는 것이다. 전봉준은 1894년 9월 10일에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티에서 11월 9일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다시 논산 황화대에서 11월 15일 일본군과 싸웠으나, 또 패배하였다. 금구의 원평에서 11월 25일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전라도의 진산(珍山)·고산(高山)과 충청도의 동학농민군 수만 명이 10월 22일 진산에 모여 10월 24일까지 전라도 금산읍(錦山邑)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여기에 응운 스님도 참여하였다.

이처럼 응운 스님도 동학 2차 봉기시기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일이 발각되어, 응운 스님은 1896년에 장성 백양사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전주감영에 압송되었고,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박한영 스님은 응운 스님의 동학농민혁명 시기 활동을 자비심의 발로로 "백성 구제에 전념(專念捄衆)"한 실천승으로 1940년 '응운선사순공지탑' 비문에 기술하였다. 필자는 적확한 사필(史筆) 기록이라고 판단한다.

탑비 건립 내력

응운 스님 서거 45년이 되는 1940년 봄에 백양사 주지 만암 송종헌 스님과 영호 박한영 스님 그리고 기룡 차성희 스님이 힘을 합쳐 '응운 스님 탑비'를 세웠음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옛 응운 박우능 선사 서거 후 45년이 되는 1940년(경진년) 늦은 봄에 작은 스님 차기룡이 백양사와 협동하여 견고한 비석을 갖추고 정호(박한영)에게 비명(碑銘)을 구하였다."(탑비 3면)

아울러 탑비의 비문을 짓고 탑비의 글씨를 쓴 박한영 스님의 비명(碑銘)을 탑비 3면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박한영이 드디어 비명을 지어 말하였다.
'오직 구름(응운 선사)은 흰 돌 높은 바위에 머물렀기에
절 짓고 불법을 수호하는 그런 절의 경영과 같은 일은 참담하였네.
슬프다! 저 남북조시기 현감 적중간(翟仲侃)이 신광 혜가(慧可, 선종 2대조)선사를 해침(처형함)에 미쳤으나
혜가를 해침은 칼로 봄바람을 벰과 같아서 머리를 돌려나도 어찌 혜가가 손상될 것인가.
강남 여러 사찰의 꽃과 대나무는 응운 스님의 편안함에 힘입었고
돌에 글을 지어 새겨 어리석고 흉악한 놈들(응운 스님을 죽인 자들)을 경계할 수 있었다네.'
귀산 후학 영호 박정호(朴鼎鎬, 박한영)가 글을 짓고 글씨를 씀."(탑비 3면)

이렇게 박한영은 비명에서 응운 스님의 억울한 죽음을 중국 선종의 제2조 신광 혜가(慧可, 487∼593)의 죽음에 비견(比肩)하였다.

끝으로 탑비 4면에서 응운 스님의 제자들 이름을 쓰고, 탑비 건립 연월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응운의 법을 이은 1세: 경신(敬信) 성희(成熙) 학신(學信)
응운의 법을 이은 2세: 일선(一鮮) 기준(基俊) 정민(正敏) 명안(明彦) 융원(戎圓) 승렬(承烈)
불기 2967년 경진(庚辰) 소화15년(1940) 6월 세움."(탑비 4면)

이처럼 응운 스님의 1세 제자로 경신(敬信)·성희(成熙)·학신(學信)이 있었다. 2세 제자로 일선(一鮮)·기준(基俊)·정민(正敏)·명안(明彦)·융원(戎圓)·승렬(承烈)이 있었다. '백암산백양사불사리탑비'(1924)의 뒷면 시주질(施主秩)에 기룡성희(基龍成熙)가 나오고 있고, 화주질(化主秩)에 운양일선(雲羊一鮮)이 나오고 있는데, 각각 같은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제자를 키워낸 응운 스님의 학승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 응운(應雲, 1854∼1896) 스님 초상화. 백양사 진영각 안에 있음(2024년 12월 12일 촬영)
ⓒ 박용규

총괄컨대 응운 스님은 학행일치(學行一致),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승려였다. 특히 그는 동학농민혁명시기 항일 승려이기도 하였다. 항일 한국불교사의 정신사적 맥이 임진왜란 시기 서산대사(휴정)·사명당(유정)·영규대사에서 동학농민혁명 시기 응운 스님으로, 다시 일제강점기 만해 한용운·백용성·백초월로 전개·계승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남 장성에 있는 백양사에 가거든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응운 스님의 탑비'를 탐방하고 살펴보는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서동석, 「장성 농민군 이끌며 응운스님 맹활약」, <법보신문>, 2004, 8, 10.

이재형, 「釋門의 지도자 만암 스님 6. 강사시대」, <법보신문>, 2024, 9, 13.

김남수, 「동학산행(東學山行) ② 동학혁명에서 순절한 응운應雲 스님」, <불광미디어>, 2024, 11, 19.

범해 각안 저, 김두재 옮김, <동사열전>(1894), 동국대학교출판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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