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2차 동학농민혁명,전봉준 공초·제4차-5차 심문과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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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 74]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갑오왜란·동학의병전쟁
▲ 전봉준 공초(全琫準 供招)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전봉준 공초이다. 전봉준 공초는 이전의 글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녹두장군 전봉준 마지막 모습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모습은 이전의 글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 동학혁명기념관

전봉준 공초(全琫準 供招)

전봉준 제4차 심문과 진술
을미(1895) 3월 7일 전봉준 4초문목 일본영사 문초
(乙未 三月 七日 全琫準 四招 問目 日本領事 問招)

「전봉준 4차 공초는 다시 전봉준의 이름과 별호 등 신상문제와 집강소 설치과정, 손화중과 최경선의 관련 사항, 삼례 결집과 각지의 접주, 은진·논산 경과와 공주 접전, 전봉준 문서의 대필 문제 등을 문초하였다.」

문(問): 너의 이름과 호(號)는 한둘이 아니던데 몇 개나 되는가?
공(供): 전봉준 하나뿐이다.

문(問): 전명숙(全明淑)은 누구의 이름인가?
공(供): 나의 자(字)이다.

문(問): 전녹두(全綠豆)는 누구인가?
공(供): 그때 사람들이 지은 것이지 내가 지은 이름이나 자(字)는 아니다.

문(問): 그 밖에도 너의 별호(別號)가 있는가?
공(供): 없다.

문(問): 이 밖에 어떤 별호나 어릴 때의 이름같은 칭호(稱號)는 없는가?
공(供): 없다.

문(問): 네가 매번 사람들에게 글을 써 보낼 때는 이름을 썼느냐 자(字)를 썼느냐?
공(供): 이름으로 썼다.

문(問): 네가 작년 10월에 재차 기포한 날짜는 언제인가?
공(供): 10월 12일 사이 같으나 자세히 알지 못한다.

문(問): 삼례에서 재차 기포하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느냐?
공(供): 내 집에 있었다.

문(問): 너는 전주에서 초토병(超討兵)과 접전하고 해산한 뒤에 어디로 갔는가?
공(供): 10여 고을을 거치면서 집으로 돌아가도록 권하고 나도 집으로 돌아갔다.

문(問): 전주에서 해산한 것은 어느 날인가?
공(供): 5월 초7~8일 사이이다.

문(問): 전주에서 해산한 뒤에 제일 먼저 도착한 고을은 어느 곳인가?
공(供): 처음 금구를 거쳐 김제, 태인 등지에 이르렀다.

문(問): 처음부터 금구에 도착한 것은 어느 날인가?
공(供): 금구는 잠시 지나가는 길에 들렀고 5월 초 8~9일 사이에 김제에 이르렀다가 초 10일 사이에 태인에 이르렀다.

문(問): 태인(泰仁)에 도착한 뒤에 거친 고을은 모두 어느 고을인가?
공(供): 장성(長城), 담양(潭陽), 순창(淳昌), 옥과(玉果), 남원(南原), 창평(昌平), 순천(順天), 운봉(雲峰)을 거친 뒤에 내 집으로 돌아갔다.

문(問): 집으로 돌아간 것은 몇 월 며칠인가?
공(供): 7월 그믐이거나 8월 초 사이다.

문(問): 여러 고을을 돌아다닐 때 네 혼자 다녔는가, 동행자가 있었는가?
공(供): 내가 말을 타고 20여 명을 거느리고 다녔다.

문(問): 그때 최경선도 동행(同行)하였는가?
공(供): 그렇다.

문(問): 손화중도 역시 동행하였는가?
공(供): 손화중은 동행하지 않았다.

문(問): 전주에서 해산한 뒤 손화중은 어느 곳으로 향했는가?
공(供): 그때 손화중은 우도(右道)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귀화(歸化)를 권유하였다.

문(問): 손화중이 전주에서 해산한 것은 너와 같은 날이냐?
공(供): 그렇다.

문(問): 전주에서 해산한 뒤에 너는 손화중을 보지 않았는가?
공(供): 4~5개월 동안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문(問): 4~5개월이 지난 뒤에 어느 곳에서 만났는가?
공(供): 8월 그믐에 순상(巡相)의 명령을 지니고 먼저 나주로 내려가 민보군을 해산할 것을 권한 뒤 돌아오는 길에 장성(長城)에 이르러 비로소 만났다.

문(問): 손화중을 만나고 앞으로 어찌하자고 의논하였는가?
공(供): 그때 나는 순상(巡相)으로부터 별도로 부탁받은 일이 있으니 함께 전라감영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의논했다.

문(問): 그렇다면 손화중은 무슨 말로 대답하였는가?
공(供): 지금 병중(病中)에 있음으로 함께 갈 수 없으니 병이 나은 뒤에 뒤따라가겠다고 말했다.

문(問): 그 밖에 다른 상의한 일은 없었는가?
공(供): 그렇다.

문(問): 일본군이 대궐을 침범했다는 소식은 언제 어디서 들었는가?
공(供): 7월 중 처음 남원에서 들었다.

문(問): 그렇다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귀화를 권할 때 이 말을 들었단 소식을 들었는가?
공(供): 이는 거리에 떠도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문(問): 이 말을 들은 뒤 군중을 일으켜 일본군을 격파하는 일을 논의한 곳은 어디인가?
공(供): 삼례역(參禮驛)이다.

문(問): 특히 삼례에서 이 거사를 의논한 이유는 무엇인가?
공(供): 전주부(全州府)의 부근에 있으면서 저막(邸幕)이 다소 많은 곳으로는 삼례만 한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문(問): 삼례에서 만나기 전에는 혹시 다른 도회지(都會地)가 없었는가?
공(供): 원평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곧 삼례에 이르렀다.

문(問): 집에서 출발한 날은 언제인가?
공(供): 10월 초순(初旬)이었다.

문(問): 네가 삼례로 갈 때 동행자는 누가 있었는가?
공(供): 동행자는 없었다.

문(問): 길을 가는 도중에 서로 만나 동행한 자도 없었는가?
공(供): 없었다.

문(問): 그때 최경선이 동행하지 않았는가?
공(供): 최경선은 그 뒤에 왔다.

문(問): 삼례에 이르러 누구의 집에 모였는가?
공(供): 저막(邸幕)에서 모였다.

문(問): 삼례에는 원래 친구의 집이 있었는가?
공(供): 처음에는 친한 사람은 없었다.

문(問): 삼례의 호수(戶數)는 얼마나 되는가?
공(供): 100여 호(戶)가 된다.

문(問): 네가 살던 근처에도 100여 호(戶)가 되는 마을이 있었을 터인데 특히 여기에 모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공(供): 이 땅은 도로가 사방으로 통하고 아울러 역촌(驛村)이기 때문이었다.
문(問): 최경선이 삼례에 이른 뒤 며칠이나 함께 머무른 것이냐?
공(供): 5~6일간 함께 머물다가 곧 광주(光州)·나주(羅州) 등지(等地)로 향했다.

문(問): 무엇 때문에 광주·나주 등지로 향하였는가?
공(供): 기포(起包)하기 위에서였다.

문(問): 최경선이 광주·나주로 간 것은 네가 시킨 것이냐?
공(供): 내가 시킨 것은 아니며, 다만 그가 광주와 나주에 인연이 있고 예로부터 친지가 많아 기포(起包)하는 데 용이했기 때문이다.

문(問): 그때 삼례에 모두 모였을 때에 동학도 중에 가장 유명한 자는 누구인가?
공(供): 금구(金溝)의 조진구(趙鎭九), 전주(全州)의 송일두(宋一斗)와 최대봉(崔大奉) 등이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으나 그밖에 많은 사람들을 지금은 다 기억하기 어렵다.

문(問): 그 때 삼례에서 이른바 의병(義兵)으로 모인 자는 몇 명이나 되었는가?
공(供): 4천여 명이었다.

문(問): 이들 군중을 거느리고 어느 곳으로 갔는가?
공(供): 처음 은진(恩津), 논산(論山)으로 향하였다.

문(問): 논산에 도착한 것은 어느 날인가?
공(供): 지금은 자세히 기억할 수 없다.

문(問): 어찌 간단하게 기억할 수도 없단 말인가?
공(供): 대략 10월 그믐쯤이다.

문(問): 논산에 이르러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공(供): 논산에 이르러서도 널리 의병들을 모집했다.

문(問): 그곳에서 다시 어디로 갔느냐?
공(供): 곧바로 공주(公州)로 갔다.

문(問): 공주에 다다른 것은 언제인가?
공(供): 11월 초 6~7일 같으나 자세히 모르겠다.

문(問): 공주에 이른 뒤에 무슨 일을 하였는가?
공(供): 공주에 이르지 못하고 접전하여 끝내 패배하였다.

문(問): 네가 매번 사람들에게 글을 보낼 때에는 친히 썼는가 아니면 남을 시켰는가?
공(供): 친히 쓰기도 하였고 남을 시켜 쓰기도 하였다.

문(問): 혹시 대신 쓸 때 꼭 너의 도장을 찍었는가?
공(供): 겉봉투에는 도장을 찍을 때가 많았지만 대개는 찍지 않을 때도 많았다.

문(問): 네가 삼례에 머물 때 사람들에게 글을 보낸 것이 매우 많은데 이것이 모두 친히 쓴 것이냐 아니면 남이 대신 쓴 글인가?
공(供): 모두 통문(通文)으로 보낸 것이지 개인적인 글은 쓰지 않았으나 오직 손화중에게만은 글을 써서 보냈을 뿐이다.

문(問): 처음부터 개인적인 글을 한 자도 사람들에게 보낸 적이 없는가?
공(供): 만약 그 글을 지금 보면 알겠으나 지금으로서는 자세히 생각나지 않아 모르겠다.

문(問): '영사가 글을 내보이면서' 이것은 너의 친필이냐 아니면 대필이냐?
공(供): 대신 쓴 글이다.

문(問): 누구로 하여금 대신 쓰게 하였는가?
공(供): 접주(接主)의 필적(筆跡) 같으나 지금 그 사람을 자세히 모르겠다.

문(問): 너는 일찍이 최경선으로 하여금 대신 글을 쓰도록 하였는가?
공(供): 최경선은 글에 능숙한 자가 아니다.

문(問): 이 편지는 삼례에서 보낸 것인가?
공(供): 그렇다.

문(問): 이 편지는 분명 9월 18일인데 어찌 10월에 삼례로 나와서 모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공(供): 지난번에 10월이라고 말하였는데 9월이 맞는 것 같다.

문(問): '영사가 또 다른 편지를 내보이면서' 이것은 친필인가, 대필인가?
공(供): 그것도 또한 대신 쓴 글이다.

문(問): 이 편지는 또한 누가 대신 쓴 것인가?
공(供): 그것도 역시 접주로 하여금 썼으나 지금 그 이름을 기억하기가 어렵다.

문(問): 너는 오늘의 진술을 솔직히 말하라. 그런 뒤에야 판결이 속히 날 것이며, 만약 여러 가지로 속여 말한다면 일이 괴롭고 싫증만 날 뿐만 아니라 너에게도 피해가 많을 것이다.
공(供): 월(月)과 일(日)은 과연 자세히 기억하기 어려우나 그 밖의 관련된 모든 것들에는 추호도 거짓 고함이 있겠는가?

문(問): 대필을 하자면 반드시 정해진 사람이 있었을 터인데 어찌 감히 모른다고 하는가?
공(供): 그 무렵 나는 졸필인지라 매번 대필을 했지만 특별히 정해놓은 사람은 없었다.

문(問): 이 두 개의 편지는 모두 네가 시켜서 작성한 것인가?
공(供): 그렇다.

문(問): 삼례에서 사람들을 모이게 한 것은 모두 네가 주도(主導)한 일인가?
공(供): 그렇다.

문(問): 그렇다면 모든 기포(起包)에 관한 것은 모조리 네가 주도했는가?
공(供): 그렇다.

문(問): '영사(領事)가 또 하나의 편지를 내어 보이면서' 이것도 역시 네가 시킨 것인가?
공(供): 그렇다.

문(問): '영사(領事)가 또 하나의 편지를 내어 보이면서' 이것도 또한 네가 시킨 것인가?
공(供): 그렇다.

문(問): 전날 진술할 때 너는 김개남과 처음부터 상관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이 편지를 본즉 두 사람 사이에는 관계가 깊은 것 같은데 어찌 된 것인가?
공(供): 김개남은 내가 임금의 일에 협력할 것을 권하자 끝내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상의(相議)를 하였으나 끝내는 관계를 끊고 상관하지 않았다.

문(問): '영사가 작은 한 조각의 기록을 내어 보이면서' 이 두 종이의 필적(筆跡)은 한 사람의 것인데 앞의 글은 네가 했다고 진술하고 지금의 글은 어찌 모른다고 말하는가?
공(供): 지금 글은 내가 한 일이 아니다.

문(問): 아까 말하기를 삼례의 일은 모두 네가 한 일이라 하면서도 지금 간략하게 적은 이 쪽지를 보고서는 너의 소행이 아니라 하니 참으로 그 대답이 모호(模糊)하구나.
공(供): 그 쪽지 중에 서학(徐鶴)이라는 사람은 서병학(徐丙鶴)이다. 서병학과 나의 관계는 이미 끊어져 왕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시킨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問): 동도(東徒) 중에 접주(接主)를 차출(差出)하는 것은 누구인가?
공(供): 모두 최 법헌(崔法軒)이 한다.

문(問): 네가 접주가 된 것도 최법헌이 차출한 것인가?
답: 그렇다.

문(問): 동학접주는 모두 최시형(崔時亨)에게서 나왔는가?
공(供): 그렇다.

문(問): 호남(湖南)과 호서(湖西)가 전부 그러한가?
공(供): 그렇다.

문(問): 도집(都執)과 집강(執綱)을 임명하는 일도 역시 최시형이 차출한 것인가?
공(供): 비록 최 법헌으로부터 많이 나왔으나 접주 등이 차출하기도 했다.
아룀 백(百)

▲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모습의 동상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은 그가 순국한 자리 서울 종로 영풍문고 앞에 세웠다. 사진에 대해 이전에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 동학혁명기념관

전봉준 공초(全琫準 供招)

전봉준 제5차 심문과 진술
을미(1895) 3월 10일 전봉준 5초 문목 일본영사 문초
(乙未 三月 十日 全琫準 五招 問目 日本領事 問招)

「전봉준 5차 공초는 전봉준이 통문과 격문을 보낼 때 친필 또는 대필 문제와 주변 인물에 대해 주로 조사하였는데 이에 대한 보충의 성격을 띠고 있다.」

문(問): 오늘도 또한 이전과 같이 사실을 조사할 것이니 숨김없이 바른대로 대답하라?
공(供): 모두 알겠다.

문(問): 작년 9월 삼례에 있을 때 대필하는 사람이 따로 없어 접주 중에서 번갈아가며 썼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한가?
공(供): 대필하는 사람이 별도로 없어서 접중(接中)에서 번갈아가며 썼다. 처음에는 임오남(林五男)을 시켜 쓰게 하였으나 그가 무식(無識)한 사람이어서 다시 김동섭(金東燮)으로 하여금 잠시 대필(代筆)하도록 하였다.

문(問): 대필한 사람이 오직 김동섭과 임오남 두 사람뿐이었는가?
공(供): 접주 중에 문계팔(文季八), 최대봉(崔大鳳), 조진구(趙鎭九)가 간혹 대필하였으나 불과 몇 차례만 쓰고 그쳤다.

문(問): 너는 최경선(崔慶善)과 서로 친하게 지낸 것이 몇 년이나 되는가?
공(供): 고향이 같음으로 서로 친하게 지낸 지가 5~6년쯤 된다.

문(問): 최경선은 일찍이 너와 스승의 관계가 있었는가?
공(供): 우리는 다만 친구로서 대하였을 뿐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직분은 없었다.

문(問): 너의 진술이 사실과 다른 것 같은데 공연히 재판을 끌며 또한 너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공(供): 별로 정황(情況)을 속인 것은 없고 일전에 송희옥의 일들은 잠시 숨겼으나 다시 분명히 말하였다.

문(問): '영사가 종이 하나를 내어 보이면서' 이것이 너의 친필(親筆)이 아니라고 한 것은 정황(情況)을 속인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공(供): 이미 나의 것은 진술하였다. 글은 나의 글이나 필적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 무슨 유익한 점이 있어서 속이겠는가? 과연 그것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문(問): 최경선의 진술로는 이것은 너의 필적라고 하는데 너는 아니라고 말하니 어찌 정황을 속인 것이 아닌가?
공(供): 최경선에게 다시 물어보는 것이 옳다. 또 글자를 써보도록 하면 누구의 필체인지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문(問): 일전(日前)에 너를 심문할 때 너는 삼례에 있을 때에 서기(書記)라는 직책이 없었다고 말하더니 지금은 서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공(供): 앞서는 대략 말했던 것이고 지금 자세히 들어보니 그때 잠시 대필하던 사람을 서기라고 칭하였다.
아룀 백(白)

▲ [목판화] 전봉준 절명시 농민화가 박홍규가 목판화로 그려낸 전봉준 절명시다.
ⓒ 박홍규

<도움말>
전명숙_명숙(明淑)은 전봉준의 자(字)로서 천안전씨세보(天安全氏世譜)에는 숙(淑)이 숙(叔)으로 표기되어 있다.
_주로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 본이름 외에 부르는 호칭으로서, 실재의 이름이 아닌 부명(副名) 즉 본명 다음의 이름이다.
칭호_어떠한 뜻으로 일컫는 이름으로, 여기서는 전봉준의 어릴 적에 또 다른 이름이 있는지 묻는 질문이다.
초토병_초토사 홍계훈이가 이끌고 온 경군(京軍)을 이른 말.
우도_전라우도(全羅右道) 즉 전라도 서쪽지대이다. 당시 집강소 설치 및 폐정개혁안 실현을 위하여 손화중은 전라우도, 김개남은 전라좌도를 맡았고, 전봉준은 전라일도(全羅一道)를 통리하였다.
귀화_다른 나라의 국적을 얻어 그 나라의 국민이 됨, 여기서는 관료들과 백성들을 동학에 입도 시키는, 즉 동학과 함께하는 의미로 귀화라 칭했다.
순상_순찰사(巡察使)를 달리 이르는 말로 조선 시대 도의 군무를 살피던 벼슬, 여기서는 전라감사를 지칭한다. 전봉준은 김학진 전라감사와 민관상화의 집강소 설치에 대해 합의를 보았으며,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지도부를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에 혁명적인 폐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저막_주막(酒幕), 나그네 즉 오고가는 사람들이 머무르며 먹고 잘 수 있는 집들을 이르는 말이다.
도회지_사람이 많이 살고 상공업이 발달한 땅, 여기서는 고을(縣_현)정도로서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지방행정구역 중에서 낮은 단위의 현(縣)을 의미한다.
초순_한 달의 초하루부터 초열흘까지의 사이
호수_호적상의 가호 수, 한 집의 호주가 살고 있는 그 숫자를 말한다.
역촌_역이 있는 마을. 여기서는 말이 쉬어가는 마을을 의미하며, 지금의 시외버스 터미널과 기차역과 같은 교통수단의 중간 역은 물론 그 주위의 여관과 음식점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최 법헌_해월 최시형 선생을 지칭한다.
정황_어떤 일이 진행되어 가는 모양이나 상태, 여기서는 전봉준이 법을 위반한 것에 대한 처벌의 가볍고 무거움에 영향을 미치는 일체의 사정 등을 말함

<끝>

▲ 붉은 대숲 이기홍 화백의 붉은 대숲이다. 바람에 흔들리며 약간 눞는 붉은 대숲의 수천수만개의 댓잎이 모두 모양새가 다르다. 갑오년 동학 선열님들 죽창을 든 모습이 아니라, 붉은 대숲으로 다시 살아난, 말과 글로 설명이 불가능한 명작을 그려냈다. 이기홍은 그림만 잘 그리는게 아니라 술도 잘먹는다. 시간이 가든 날이 새든 그에게는 상관없다. 아주 예술가로 인생을 멋지게 사는 친구이다. 그에 대한 예술의 높이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가 깊다. 그래 진묵대사가 말했던가 '저 바다가 술이라면 얼마나 좋겠나!' 도인이든 화가든 진묵과 기홍 정도는 돼야 과히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
ⓒ 이기홍

<참고문헌>
2편 :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열다
3편 동학 일본 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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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신아출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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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츠카 아키라·이노우에 가쓰오·박맹수,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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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와 동학농민군 서훈』 동학농민혁명 학술총서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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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발통문』 연간통권,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23.
정선원,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 연구』 원광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3.
동학학회, 『동학학보1~70호』 동학학회논문총집, 선인, 2000~2024.
국회·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2차동학농민혁명참여자서훈국민연대 외 2개 단체, 『항일독립운동 기점 정립을 위한 국회토론회』 자료집, 2024.
국회·2차동학농민혁명참여자서훈국민연대, 『동학독립운동가서훈 국회학술토론회』 자료집, 2024.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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