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마을에서 허름한 술집을 운영하는 한 사장님은 35년 전 지인에게 꿔준 200만원 대신 판잣집 한 채를 받으며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됐다. 국민소형차로 불린 '프라이드'가 300만원 남짓 하던 시기였다.
구룡마을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위치한 판자촌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강제 재개발에 밀려 쫓겨난 철거민들이 자리 잡으면서 형성된 곳이다. 부촌의 상징인 도곡동 타워팰리스에서 불과 10분 떨어진 이곳은 서울, 그중에서도 강남의 마지막 남은 금싸라기 땅이라고 불린다. 이곳을 어떻게 재개발하느냐에 따라 강남 지역 부동산이 들썩일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지금은 35년 전부터 들어와 살던 주민들뿐만 아니라 재개발을 노리고 들어온 외지인까지 뒤섞여 살고 있다. 원주민들은 '딱지'라고 부르는 소유권을 사서 마을에 들어온 사람을 일컬어 '외지인'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주민등록상 주소지가 '양재대로 478' 하나로 되어 있다. 딱지로 매매가 이뤄져 누가 언제 들어와 살았는지, 실제 살고는 있는지 알 수 없다.
주민들 "색출해내 투기세력 별로 없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재개발 기대감이 높아졌지만 그동안 복잡한 이해관계와 지지부진한 사업 진행으로 재개발에 실패해왔다. 지난 1월 오세훈 서울시장이 구룡마을을 찾아 "반복되는 화재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재개발"이라고 언급하고, 2월 7일 뉴스1에서 구룡마을 개발 계획에 대해 보도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서울시는 구룡마을 개발에 대해 도시개발사업으로 추진하는 것 외에는 구체적으로 결정된 게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 관계자는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뉴스1 보도에 대해 "(SH사장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인터뷰하신지 모르겠지만 사장 개인 생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개발이 미뤄지는 동안 주민협의체는 5개까지 늘어났다. 현재 주민들은 구룡 토지주 주민협의회에 약 50%, 구룡마을 주민자치회에 약 10%, 구룡마을 자치회에 약 8%, 마을 자치회에 약 8%, 구룡마을 희망본부에 약 7% 정도로 분포되어 있다. 이를 제외한 20%가량의 주민들은 무소속으로 추정된다. 주소지는 하나지만 나름의 체계가 있다. 주민들은 구룡마을 전체를 총 8지구로 구분했고, 각 지구마다 통장 역할을 하는 지구장도 있다. 자치회마다 지구장을 두기 때문에 지구마다 5명의 지구장이 있는 셈이다. 이것 자체가 얼마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구룡마을 주민들에게 재해는 일상이다. 여름은 수해, 봄·겨울은 화재를 걱정하며 산다. 지난해 8월 집중호우 때는 주택들이 침수되면서 1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기도 했다. 개천 옆 3지구에 산다는 65세의 한 주민은 "물난리가 나면 공중화장실에서 똥물이 다 넘쳐서 집에 흘러 들어온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설 연휴 직전에도 구룡마을 4지구에서 큰 불이 났다. 약 60가구가 소실되면서 주민 생활대책 마련과 개발 필요성이 제기됐다. 판잣집은 '떡솜'으로 불리는 단열재로 둘러싸여 있고 내부 또한 비닐, 플라스틱, 천 등 불에 잘 타는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어 화재에 취약하다. 게다가 집들끼리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상 불이 쉽게 번진다. LPG 가스통과 연탄, 문어발식 전선으로 진화도 쉽지 않다.
큰 재해가 있을 때마다 개발 얘기가 나온다. 민영개발이니 공공개발이니 개발 계획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20여년이 흘렀다. 2011년까지 구룡마을 주민들은 사유지를 불법점거했다는 이유로 전입신고조차 할 수 없다가, 행정소송에 승소하면서 2011년부터 강남구에 전입신고를 할 수 있게 됐다. 이후 서울시는 구룡마을을 개발해 2016년까지 아파트 2793가구를 공급하는 공영개발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시는 기존 거주민이 정착할 수 있는 영구·공공임대 아파트 1250가구도 함께 공급할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주민들에 대한 보상 방식이 '분양이냐 임대냐'에 따른 지지부진한 논의 끝에 2014년 개발구역에서 해제됐다.
구룡마을에서 SH공사가 제공한 임대주택으로 임시 이주한 가구는 437가구. 구청의 최근 통계 집계에 따르면 구룡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가구 수는 665가구다. 임대주택으로 임시 이주한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재해 때문에 집을 잃거나 망가진 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돼 떠밀려 간 경우가 많다. 주민들이 마을을 지키려 여러 해 색출해낸 결과 이제 투기 세력의 빈집은 많지 않다고 했다. 공공개발이 결정된 이후로는 불법증축물이나 투기세력을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서울주택토지공사 토지관리 인력들이 주야 순찰을 돌며 상주하고 있다.
분양전환임대·토지임대부를 원한다
모든 주민협의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중에서는 개인적인 이권을 챙기기 위해 고령층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익명을 요청한 마을 주민은 "노인 분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회장님, 회장님 하고 떠받드는 경우가 많아요. 주민협의체가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더라고요"라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노인들이 회장 생일이며 환갑이며 다 챙기고 있어요. 노인들 데리고 회비 달라, 밥 해달라 그래요"라며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투기꾼들과 주민들, 그 사이에서 이득을 보려는 세력들까지 복잡했지만 그들 사이 공통점은 '살 만한' 집을 원한다는 것과 오랜 세월 지켜지지 않는 약속에 지쳤다는 것이다. 현재 주민 대부분이 공공개발에 따른 '임대' 보상에는 반대하고 있다. 대신 분양전환임대, 토지임대부(땅은 SH가 소유하고, 건물만 분양하는 방식) 아파트를 바라고 있었다. 토지임대부를 조건으로 개발이 진행된다면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주민들이 임대아파트를 반대하는 이유는 임대료 부담 때문이었다. 최근 화재를 겪은 이재민은 "여기 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다. 꽁초 줍고 지원금 받아서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버는 노인들이 임대료를 어떻게 감당하겠나"라며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바에는 그냥 여기서 집을 새로 짓고 사는 게 낫다"라고 했다. "제발 언론에서 우리끼리 싸운다고 전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주민들도 많았다. 실제로 인터뷰를 요청하자 많은 주민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니 마을회관에 가서 물어보라"고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