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걸자 조금씩 문이 열렸다…은둔형 외톨이 지원센터의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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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5.02. 오전 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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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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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궁금해요."

"◇◇님, 주말 잘 보내셨어요? ◇◇님 좋아하는 빗소리가 들리는 아침이라 기분 좋으실 것 같아요."

■ '은둔형 외톨이'에게 말 거는 이들, 누구일까?

타닥타닥. 키보드 자판 소리가 분주하게 들립니다. 평범한 회사 사무실 같죠. 하지만 보고서를 쓰는 것도, 회계 장부를 정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카톡'으로 여러 사람에게 말을 거는 중입니다.

질문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어떻게 지냈느냐. 오늘은 뭘 할 거냐. 무얼 하며 지내고 있느냐. 소소한 일상 생활을 묻고 있네요.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충 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세심히 고릅니다. 대화 주제도 신경 써서 떠올립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을 거는 걸까요? 대화 상대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교류하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입니다. 말을 거는 이는 은둔형 외톨이를 돕는 '광주 은둔형외톨이 지원센터', 줄여서 '은톨센터'입니다.

답이 없을 때도 많습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네"라는 한 글자만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단절한 이들에게는 메시지를 읽는 것도, 짧게 응답하는 것도 큰 결심일 수 있습니다.

광주 은톨센터 박현정 팀장은 "당사자분들은 전화 통화하는 걸 힘들어한다"며 "온라인으로 얘기를 주고받다 실제 상담을 통해 생활 수준이 올라오고, 먼저 말을 걸어 주는 분들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 전국 최초의 은둔형 외톨이 지원 기관, ' 광주 은톨센터'

광주 은톨센터는 전국 최초이자 유일의 은둔형 외톨이 지원 기관입니다. 2022년 4월부터 활동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1년을 갓 넘었습니다.


그동안 취업을 포기한 '청년 니트족'을 돕는다는 식의 지원 정책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연령에 관계없이 은둔형 외톨이만을 전문적으로 돕는 센터는 여지껏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은 험난했습니다. 외톨이들의 마음은 잠긴 방문만큼이나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가족의 의뢰로 상담을 진행해 보려고 해도 만남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원치 않는 만남을 시도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은톨센터를 더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 생활 습관 무너진 이들…'포츈 쿠키'로 개선 시도

조심스럽게, 그러나 꾸준히 문을 두드리기로 했습니다. 은톨센터는 은둔형 외톨이의 특성에 맞는 지원 체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생활 습관 개선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타인을 만나지 않은 이들은 제때 일어나고, 씻고, 먹는 것도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생활 습관을 바꾸기 위한 ‘포츈 쿠키’. 광주 은둔형외톨이 지원센터 제공.

그래서 궁리한 게 '원, 원, 원해요' 같은 프로그램입니다. 과자 안에 메시지가 들어 있는 '포츈 쿠키'를 준비해 나눠줬습니다. 은둔형 외톨이들이 하루에 하나씩 쿠키를 먹고, 질문지를 확인하며 습관을 바꿔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으로 나갈 힘을 기르는 치유 프로그램도 마련했습니다. 식물을 가꾸거나 빵을 만들도록 하면서 몸과 마음의 근육을 조금씩 키워줬습니다. 지난해 4월부터 12월까지 상담 317건을 진행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의 가족들에게도 심리 상담을 제공했고,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도 했습니다.

■ 문 두드리니 찾아온 변화

좌절이 더 많았지만, 서서히 변화도 찾아왔습니다. 만남과 대화를 거부하던 이가 어느 순간 입을 열기 시작하더니, 검정고시를 치고 사회로 나가보겠다는 의지도 내비쳤습니다. 직접 식물을 길러 사진을 찍어 보내주는 외톨이도 있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 당사자를 대상으로 한 식물 키우기 프로그램. 광주 은둔형외톨이 지원센터 제공.

"작은 일상조차 두려움뿐이었지만, 도피하려는 마음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서툴더라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내가 됐으면 좋겠다." 센터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수줍게 건넨 이야기들입니다.

박 팀장은 "그분들이 우리가 안부를 묻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는 순간들이 굉장히 보람차다"라고 말했습니다.

■ 첫 조례, 첫 조사, 첫 센터…외톨이 돕는 광주의 노력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이 생겨나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건 20년 가까이 지난 일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은둔형 외톨이가 얼마나 되는지, 이들을 어떻게 도울지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관련 법이 아직 없습니다.

광주의 노력은 그래서 특별합니다. 광주광역시는 2019년 은둔형 외톨이 지원 조례를 제정했습니다. 2020년에는 아파트 10만 세대에 조사 안내문을 발송해 실태 조사를 벌였습니다. 2021년엔 기본 계획을 수립했고, 2022년에는 센터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모두 '전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외톨이 문제를 공적인 복지 영역에서 다룬 첫 사례였던 겁니다.


■ 전국에서 지원 시도 분주…외톨이에게 손 내미는 이유는?

은톨센터가 외톨이들을 조금씩 바꿔 놓았듯, 광주가 지원책을 시행한 이후 전국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1월에 청년 4.5%가 은둔 상태라는 조사 결과를 내놨고, 지난달에는 지원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3월에는 인천에서도 지원 조례가 생겨났습니다. 지난해에는 국회에 특별법도 발의됐습니다.

장애인, 노약자, 저소득층…. 사회복지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스스로 문을 닫은 이들까지 도와야 하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은둔형 외톨이가 15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중년층의 은둔 문제도 심각한 일본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손을 놓고만 있을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가 점점 커지는 상황입니다.


백희정 광주 은톨센터 사무국장은 "은둔형 외톨이는 경쟁 사회의 이면에서 나타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며 "고통받는 당사자와 가족들을 지원하며 돌봄의 영역을 넓힌 것이 은톨센터 1년의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 "오늘도 우리 이웃의 안녕을 묻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나요?"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의논할 사람이 별로 없나요?"
"사람이 귀찮은가요?"

광주 은톨센터가 만든 '은둔형 외톨이 체크리스트'에 있는 질문 중 일부입니다. 자신 있게 '아니다'라고 답하실 수 있으신가요. 인간 관계에서 지칠 때,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는 어떨까요. 가끔은 문을 닫고 혼자 있고 싶지는 않은가요. 오랜 기간 은둔 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 '외톨이'일지 모릅니다.

광주 은둔형외톨이 지원센터 홈페이지의 문구. 홈페이지 캡쳐.

그럴 때 안부를 물어봐 준다면, 별 얘기 아니더라도 꾸준히 말을 걸어와 준다면, 조금은 살아있는 기분이 들 겁니다. 그리고 문을 열 용기도 싹틀 겁니다. 누군가를 건강하게, 인간답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국가와 행정의 역할이 아닐까요. 광주 은톨센터 홈페이지의 문구가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오늘도 우리 이웃의 안녕을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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