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2010년 4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전자책(e북)육성방안 발표 중 애플 아이패드를 사용, 논란이 일었다. 당시만 해도 아이패드는 전파법상 무선기기 형식 및 전자파적합 인증을 받지 못한 미등록 기기로, 세관도 통과할 수 없었다. 국내에선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는데 장관이 공식 석상에 버젓이 들고 나오자 네티즌 분노가 폭발했다. 문체부는 연구 목적으로 반입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국민은 안 되고 장관은 되느냐’는 여론을 잠재울 순 없었다. 결국 방송통신위원회는 1인당 1기기까진 전파인증 없이도 반입할 수 있도록 입장을 바꿨다. 규제가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할 때 생기는 코미디다.
□ 이러한 전파인증이 국가통합인증마크(KC·Korea Certification)로 바뀐 건 2011년이다. 부처마다 다른 법정 강제인증마크를 단일화할 필요성이 제기되며 2009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도입한 뒤 확대 실시됐다. 지금도 정식 수입 업체들은 KC 인증을 받은 제품만 국내에 판매할 수 있다.
□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 등 중국 쇼핑 앱을 통한 해외 직구가 급증하자 당국이 다시 인증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부는 이번에도 국민 안전을 내세우며 KC 인증이 없는 해외 직구는 금지하겠다고 했다가 반발이 커지자 3일 만에 철회했다. 당국은 KC 인증을 받아야만 안전한 것처럼 전제했지만 1,500명도 넘는 사망 피해를 낳은 가습기 살균제 중에도 KC 인증 제품이 있었다. 더구나 KC 인증은 미국이나 일본, 유럽연합(EU) 등과 인증상호인정협정도 못 맺은 상태다. 갈라파고스 규제란 지적이 나온 배경이다.
□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규제 당국의 사고방식은 바뀐 게 없다. 공익을 위한 규제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공무원을 위한 규제는 사라지는 게 마땅하다.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는 시장 왜곡을 부르고 국내 산업에도 득보다 독이 될 수 있다. 정부가 정작 고민해야 하는 건 국민들이 해외 직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월급 빼곤 모든 게 오른 상황에서 한 푼이라도 싼 상품을 찾기 위한 국민들의 몸부림을 막는 건 정부가 할 일은 아니다. 고물가부터 잡는 데 힘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