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1조 재산분할로 끝난 '세기의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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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6.05. 오후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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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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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노소영 소송서 나온 비자금
최, 반성도 없이 판결 비판 부적절
노, 세금 없는 1조 기부안 고민하길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최태원(왼쪽 사진)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지난 4월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이혼 소송 항소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많이 억울한 모양이다. 최태원 SK 회장이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의 이혼 소송에서 위자료 20억 원과 재산분할 1조3,808억 원 판결이 나온 지 나흘 만에 재판부를 공개 비판했다. “사법부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지만”이라고 자락을 깔았지만 “SK가 성장해 온 역사를 부정한 판결에는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법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선경 300억’ 메모를 인정하고 이 돈이 SK로 유입된 것으로 봐 최 회장 재산 중 35%를 노 관장에게 지급하라고 한 데 대한 반박이다. 그는 “SK와 구성원 모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진실을 바로잡겠다”고 강조했다. 법원이 정경유착을 기정사실화해 실추된 SK의 명예를 되살리겠다는 다짐엔 비장함도 느껴진다.

1심에 비해 위자료와 재산분할 모두 20배 이상 커진 2심 결과는 최 회장에겐 충격일 것이다. 이긴 줄 알았는데 1조4,000억 원 가까이 물어줘야 한다면 재벌 총수라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아버지 최종현 전 회장과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군 기업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데 대한 섭섭함도 크다. 적어도 회사의 위기는 막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달이 최 회장에게서 비롯됐다는 걸 잊은 듯한 태도는 곤란하다. 연간 이혼 건수가 10만 건을 넘나드는 나라에서 재벌 총수라고 이혼하지 말란 법은 없다.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부부 사이 일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도 주제넘고 섣부르다. 그래도 당사자 간 합의가 안 돼 소송까지 갔다면 법원 판단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는 게 기본이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법원엔 가지 말았어야 했다. 법치 국가에서 법에 따라 판사가 결정한 걸 재계 서열 2위 대기업 집단의 수장이 공개 반발하는 건 적절하지 않고 모양새도 사납다. 경제계를 대표하는 법정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까지 맡고 있는 분이 사법부를 부정하는 건 스스로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판결이 불만이면 대법원에 상고해 다시 다투면 된다.

최 회장의 기업가 정신과 경영 능력, 임직원 공로가 폄하돼선 안 되지만 SK가 대통령 집안과 사돈을 맺으며 가파르게 성장한 건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노 전 대통령이 SK의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는 법원의 판단에 국민 대다수는 수긍한다. 더구나 재판에선 최 회장이 “내가 김희영에게 이혼하라고 했고, 모든 것이 내가 계획하고 시킨 것”이라는 편지까지 공개됐다. 두 사람은 마치 ‘유사 배우자’처럼 행동했다. 법과 도덕, 국민 정서에도 어긋났던 처신은 돌아보지 않고 판결에 반발하는 건 공감을 얻기 힘들다. 먼저 노 관장과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지적이 적잖다.

노 관장도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끝까지 감춰야 했을 비자금까지 폭로했을까 싶다. 다만 종잣돈 300억 원으로 커진 1조3,808억 원을 온전히 노 관장 돈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돈의 출처도 따져봐야 하고 증여 또는 상속 과정에서 단 한 푼의 세금도 낸 게 없다. 이런 식의 재테크와 부의 대물림을 인정할 순 없다. 노 관장이 재산분할액을 받는다면 그 일부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쓰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는 이유다.

재벌 장남과 대통령 딸로 시작된 ‘세기의 결혼’은 사상 최대 위자료와 재산 분할이란 ‘세기의 이혼 판결’로 막을 내릴 참이다. 경제가 사실상 안보가 된 상황에서 정치와 경제가 원팀으로 건강하게 협력하는 것까지 나무랄 순 없다. 그러나 공정한 경쟁과 사회 정의를 해치는 권력과 자본의 잘못된 만남은 결국 파탄으로 이어진다는 걸 우린 다시 목도했다. 당사자들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정경유착은 더 이상 있어선 안 된다.

박일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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