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와인은 프랑스산을 최고로 아는 이들이 많다. 이런 고정관념을 깬 게 1976년 ‘파리의 심판’이다. 와인 전문가 9명이 프랑스 최고급 와인과 미국 와인으로 블라인드 심사를 했는데 화이트(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와 레드(스택스립 SLV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 모두 미국산이 1위에 오른 것. 자존심이 상한 프랑스는 10년 후 재대결에 나섰지만 이번에도 미 캘리포니아 와인 클로뒤발 카베르네 소비뇽이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신대륙 와인은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했고, 구대륙 와인도 경쟁에 나서며 전 세계 와인 시장은 600조 원 규모까지 커졌다.
□ 영원할 것 같던 와인 성장세가 최근 꺾이고 있다. 공급은 늘었는데 소비는 줄면서 가격은 하락하고 재고는 쌓이고 있다. 기후 변화로 생산비는 더 든다. 고육지책으로 프랑스는 포도밭을 갈아엎는 농가에 1억2,000만 유로(약 1,800억 원)를 지원키로 했다. 계획대로라면 축구장 4만2,000개 크기의 포도밭이 사라진다. 지난해에도 와인을 손 세정제나 산업용 에탄올로 증류하는 작업에 3,000억 원 가까이 지원했다. 호주엔 팔리지 않은 와인 28억 병이 쌓여 있다. 중국과의 외교 갈등으로 수출길이 막힌 까닭이다.
□ 와인이 남아도는 건 젊은 Z세대가 선호하지 않는 영향이 크다. 건강을 중시하는 Z세대는 도수와 당도, 칼로리가 높은 와인보다 무알코올이나 저도수 술을 찾고 있다. 1인 가구가 많은 Z세대가 혼자 마시기엔 양(750㎖)도 너무 많다. 고물가로 가격도 부담이다. 실제로 올 상반기 우리나라의 와인 수입량은 2만4,460만 톤으로, 2021년 상반기 대비 반토막이 났다.
□ 와인산업 종사자에게는 힘든 시간이나 와인 애호가에겐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귀한 와인을 좀 더 저렴하게 즐길 가능성이 커졌다. 가을엔 판촉 행사도 많다. 주말 서울에선 와인앤버스커(JW메리어트 동대문) 오아시스선셋와인마켓(반얀트리) 와인데이즈(소피텔앰배서더) 행사가 진행되고, 다음 달 4일 한강 세빛섬에선 ‘파리의 심판’을 모방한 와인 블라인드 콘테스트도 열린다. 나에게 딱 맞는 ‘신의 물방울’을 부담 없이 찾아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