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나는 이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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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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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가 지난 9월 경기 화성시 반월체육센터에서 목과 등을 꼿꼿이 편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화성=박시몬 기자


원래 축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부모님께 축구화를 사 달라고 조를 순 없다는 걸 3남2녀의 막내는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돈이 안 드는 달리기를 골라 천안농고 육상부로 들어갔다. 1학년 때 두각을 보이자 삽교고에서 학비 면제를 제안했다. 단 다시 1학년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1년을 꿇었다. 그렇게 재입학한 삽교고였지만 갑자기 육상부가 해체되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육상부가 있는 홍성의 광천고로 옮겼다. 3학년 때 전국체전 10㎞에서 3위에 오르며 관동대를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울시청을 택했다. 돈도 벌고 야간대도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인 1990년 전국체전에서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에 나가 2위를 차지했다. 그가 바로 ‘봉달이’ 이봉주다.

□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다. 마음고생이 컸던 ‘코오롱 사태’에도 불구하고 2000년엔 도쿄마라톤에서 2시간7분20초로 한국 최고 기록(지금도 깨지지 않았다)을 세웠다. 2009년 서울국제마라톤까지 무려 41번의 풀코스를 뛰었다. 그보다 빠른 선수는 있었지만 그만큼 긴 거리를 완주한 마라토너는 없었다.

□ 너무 많이 달린 탓일까. 2020년 ‘근육긴장이상증’이라는 희소병에 걸려 목이 90도로 꺾이고 등도 펼 수 없게 됐다. 뛰긴커녕 걷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척추 낭종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뒤 걷기, 등산, 수영 등을 번갈아 하면서 재활에 힘썼다. 아내가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는 결국 지난달 제3회 천안이봉주마라톤대회에서 ‘나는 이봉주, 당신과 함께 하는 마라톤, 모두의 페이스메이커로’라는 문구의 옷을 입고 5,000여 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5km를 뛰는 데 성공했다.

□ 우린 모두 마라톤이라는 인생을 달린다. 평탄한 길만 이어지면 좋으련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는 걸 이봉주는 보여주고 있다. 이봉주가 국민 모두의 페이스메이커로 함께 뛰는 한 두려울 것도 없다. 우린 모두 이봉주이고, 누군가의 페이스메이커가 될 수도 있다. 5,000만 명의 이봉주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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