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국회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재표결한 지난 14일 카카오톡 대학 과 학번 단톡방엔 선물하기 커피 쿠폰 바코드가 떴다. 부산에 사는 동기가 서울 여의도 집회엔 참가할 수 없지만 추운 날씨에도 시위에 나간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며 선결제를 한 것이다. 현장에서 상봉한 이들은 바코드로 주문한 커피를 마시는 인증샷을 올려 화답했다.
□ 선결제가 새로운 집회 문화로 뜨고 있다. 시위에 나가고 싶지만 여러 사정으로 참여할 수 없는 이가 집회 현장 인근 카페나 식당의 음료 음식 값을 미리 지불, 참석자가 무료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기부다. 한 해외 동포는 커피 1,000잔을, 어떤 이는 김밥 500줄을 선결제했다. 선결제 가게의 위치와 수령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지도 사이트(시위도 밥먹고)도 등장했다. 이젠 광화문과 헌법재판소 주변으로도 옮겨 갔다.
□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에게 강한 지지와 연대의 정을 전하는 건 대한민국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이 시위 참여자들에게 갖는 일종의 부채 의식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평소엔 각자도생이지만 아직 우리 사회의 공동체 의식은 꽤 강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심지어 대척점에 서 있는 경찰에게까지 이러한 선행을 베푸는 장면은 감동을 준다. 다른 나라 시위 현장에서 약탈과 폭동이 빈번한 것과도 대조된다.
□ 집회 선결제 문화는 1980년 5월 광주 어머니들의 주먹밥, 87년 6월 민주화 항쟁 당시 시민들이 시위대에 나눠준 빵과 우유와도 닿아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디지털 기술 발전 덕에 그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외국인이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속으로는 부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빵과 떡, 국밥 등을 선결제한 가수 아이유를 한 미국 유튜버가 중앙정보국(CIA)에 신고하는 일도 벌어졌다. 관심 좀 끌어 보겠다는 꿍꿍이라 하더라도 황당하다. 유독 극우 집회에선 이런 선결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흥미롭다. 대통령이 한순간 추락시킨 국격을 시민들이 그나마 K집회 선결제 문화로 끌어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