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왜 벌써 은퇴하는가

[티브이데일리 하영민 칼럼] 할리우드의 스타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51)가 은퇴를 선언해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그의 팬들이 동요하고 있다.

타란티노는 12일(한국시각) 산타 모니카에서 열린 ‘아메리칸필름마켓’(AFM)에서 “10번째 영화를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영화 연출에서 발을 빼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는 내달 영화 ‘증오의 눈’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으며 내년 1월에는 ‘헤이트풀 에이트’ 촬영에 돌입한다. 즉 이 영화 제작이 끝나는 2016년 초가 그가 메가폰을 내려놓는 시점이 된다.

은퇴 후 그는 연극 대본을 쓰는데 집중할 것이라고 향후 계획까지 덩달아 전하고 있다. 은퇴의 이유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 그는 “영화를 찍는 건 젊은 사람들이 할 일”이라며 “나는 대중이 좋은 평가를 해주는 시점에서 물러날 생각”이라고 ‘박수칠 때 떠나라’는 교훈을 간접적으로 전했다.


타란티노는 그야말로 미국 독립영화의 대표적인 B급 감독이다. 1992년 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은 미국 독립영화의 걸작 중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보석을 훔쳐 일확천금을 챙기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프로페셔널 갱스터들이 경찰에 노출되자 서로 의심하는 과정을 시점과 시간의 이동을 통해 감각적으로 담아낸, 그야말로 여자와 특수 장치 없이 대사와 플롯 그리고 연출로 일궈낸, 거대자본을 앞세운 할리우드를 조롱하는 명작이다. 극중 주연 미스터 브라운으로 출연한 타란티노의 “‘Like a virgin’은 큰 00을 가진 놈과 관계를 갖는 여자에 관한 노래야”라는 대사가 증명한다.

잔혹한 폭력묘사와 잡담에 가까운 대사들에 독특한 스토리 전개방식 등은 타란티노 특유의 연출 스타일을 널리 세상에 알렸고 이런 연출방식과 작품의 모노톤 분위기는 ‘황혼에서 새벽까지’ ‘킬 빌’ ‘씬 시티’ 등을 통해 죽 이어져갔다. 또한 이 작품을 통해 하비 케이틀, 스티브 부세미, 마이클 매드슨, 팀 로스 등이 작품성을 따지는 연기파 배우로 각광받게 됐다.

타란티노는 1963년 미국 테네시 주 녹스빌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족에게는 북아메리카 남동부 애팔래치아산맥 남부에 거주하는, 북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가진 인디언인 체로키족의 피가 흐른다. 체로키는 바로 미국의 대표적인 4륜구동 자동차의 한 모델명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광이었던 홀어머니를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극장에 드나들더니 결국 중학교를 중퇴하고 연기공부를 시작한다. 5년 동안 몇몇 TV시리즈물에 출연한 그는 진로를 수정해 LA의 한 비디오점에 점원으로 취직해 온갖 장르의 영화를 섭렵하며 작가 겸 감독수업을 했다.

이때부터 그는 각본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나중에(1993) 거장 토니 스캇 감독에 의해 완성된 걸작 ‘트루 로맨스’를 일찍이 영화화하기 위해 제작자를 물색했지만 실패하고 1992년 하비 케이틀의 도움을 얻어 제작비 150만 달러로 불과 일주일만에 ‘저수지의 개들’을 찍어 미국 영화 역사책을 바꾼다.

이 영화가 성공을 거둔 데 이어 2년 후 ‘펄프 픽션’으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저수지의 개들’의 연출력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한 동시에 한물간 배우였던 존 트라볼타를 다시 할리우드의 톱스타 대열에 복귀시킨다.

그 후 그의 활동은 각본과 연출에만 머물지 않고 다방면에 걸쳐서 다양하게 이뤄진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내추럴 본 킬러’(1994)의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로베르트 로드리게즈를 포함한 선댄스 영화제 출신 감독 3명과 의기투합해 옴니버스 코믹 액션 ‘포 룸’(1995)을 만든다.

또한 이때 맺은 인연으로 1996년 로드리게즈에게 메가폰을 쥐게 한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제작 각본 주연을 겸하는 등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자질을 발휘한다. 이듬해에는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킬 빌’ ‘씬 시티’와 함께 그의 5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재키 브라운’으로 1970년대 B급 영화에서 활동했던 흑인 여배우 팜 그리어를 스타덤에 올린다.

그의 연출작 중 가장 화제를 뿌린 작품은 역시 ‘킬 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영화계의 걸작 ‘7인의 사무라이’를 좋아했던 그의 취향이 그대로 녹아있는 이 작품은 그의 연출력이 총집결됐으며 그래서 사실상 이 작품을 계기로 그의 연출력이 소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킬 빌 1’(2003) ‘킬 빌 2’(2004) 이후 ‘씬 시티’(2005)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2009) ‘장고 : 분노의 추적자’(2012) 등으로 예외 없이 녹슬지 않은 연출력을 인정받긴 했지만 예전의 폭발적인 B급 정서가 퇴색했으며 매 작품이 성공하는 것은 아닌, ‘타란티노의 신화’가 빛을 잃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2010년 그가 제작한 ‘타란티노+로드리게즈’ 식 범죄액션 ‘마셰티’가 대중에게 안겨준 실망감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왜 아직 한창일 나이에 은퇴를 선언한 것일까? 그리고 그 은퇴 공약은 지켜질까?

한국 영화계도 급성장하는 가운데 할리우드의 제작시스템을 따라가고 있는데 미국 영화계 전체가 결코 할리우드식 스튜디오(거대 투자배급사) 시스템만 맹종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감독 역시 여느 나라 감독처럼 자본의 간섭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체제를 거부하는 독립영화의 산실 선댄스 영화제가 있는 것이고 여기를 통해 ‘인터스텔라’의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거장이 탄생하기도 했다.

타린티노는 선댄스 출신은 아니지만 그런 성향의 ‘독립군’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는 B급 성향의 작가인 동시에 엔터테이너적 성향도 강한, 독특한 취향과 능력의 소유자다. 그가 보유한 필모그래피 중 연출보다 출연이 더 많으며 제작 각본 기획 프로듀서 등에 이름을 널리 올리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미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은 ‘아바타’의 제임스 캐머런, ‘트랜스포머’의 마이클 베이, ‘스타 워즈’의 조지 루카스, 그리고 그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작품성을 담보한 흥행의 귀재로 유명하다.

역시 대표적인 흥행감독으로 리들리 스콧, 피터 잭슨, 샘 레이미, 팀 버튼, 크리스토퍼 놀란, 브라이언 싱어 등이 있지만 이들은 전술한 감독들과는 ‘핏줄’이 다르다. B급 영화 출신이다. 그 중에서 잭슨과 레이미 그리고 버튼은 B급 호러영화계의 ‘전설’이고 특히 잭슨은 미국이 아닌 뉴질랜드 출신이다. 놀란과 싱어는 선댄스영화제 출신이란 공통점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연장자인 스콧은 영국 출신으로 ‘블레이드 러너’와 ‘에일리언’으로 SF와 괴수를 소재로 한 호러와 SF계의 전설을 쓴 감독이다.

이들은 모두 신선한 기획과 소재를 발굴해내는 작가이자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연출력을 지녔으며 능력있는 제작자의 기능을 해낸다.

특히 현시점에서 가장 ‘핫’한 감독으로 인정받는 놀란은 영화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영향을 받아 여기에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콘택트’와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메테우스’가 미처 풀지 못한 미제를 해결해낸 천재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거장이라고 죄다 ‘장마다 꼴뚜기’는 아니다. 역대 호러영화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 ‘엑소시스트’를 연출한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좋은 예다. 리들리 스콧과 같은 1935년생인 그는 1967년 당시 팝계의 스타커플이었던 소니 보노와 쉐어(소니앤쉐어로 활동)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굿 타임스’로 데뷔했지만 별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1973년 다섯 번째 연출작 ‘엑소시스트’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그의 모든 능력은 이 한 편에 쏟아짐으로써 단숨에 소진된 듯 보인다. 그후 2011년 ‘킬러 조’까지 20편에 가까운 영화를 연출하지만 단 한 번도 흥행에 크게 성공한다거나 평단을 떠들썩하게 만든 적 없이 그저 ‘엑소시스트’의 전설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리들리 스콧이 ‘글래디에이터’(2000)의 흥행성공으로 건재를 과시하고 ‘블랙 호크 다운’(2001)으로 명장의 면모를 보여준 뒤 한때 슬럼프에 빠져 자신의 주특기인 역사액션 ‘로빈 후드’(2010)로 체면을 구겼지만 최근 ‘프로메테우스’로 훌륭하게 재기한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이런 명감독들의 행보에 비춰볼 때 ‘영화는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란 타란티노의 논리는 많이 빈약해 보인다. 거장이나 명장의 발자취를 볼 때 젊었을 때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와 연출력으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늙었다고 연출력이 다 쇠잔하는 것은 아니다. 스콧이나 스필버그 그리고 캐머런은 타란티노보다 한참 ‘형님’이다. 게다가 그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 마틴 스코시즈(1942년생) 역시 아직도 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타란티노는 프랑스 출신의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겸 감독 뤽 베송보다 훌륭한 영화감독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계 전반적인 시선에 눈높이를 맞춘다면 종합점수에서 확실히 베송이 타란티노보다 한 수 위다. 이는 베송의 ‘그랑 블루’ ‘아틀란티스 : 바다의 오페라’ ‘레옹’ ‘제5원소’가 타란티노의 걸작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품격으로 영화역사에 올라있으며 만약 타란티노의 팬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베송의 제작목록이 타란티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풍성하고 화려하기 때문이다. 베송은 타란티노보다 4살 많고 감독 데뷔는 9년 빠르다. 타란티노의 ‘젊은 영화인 론’의 논리부족의 근거다.

감독이 제작을 겸하거나 순수제작자로 변신하는 이유는 돈에 대한 욕심도 있겠지만 감독 특유의 독립영화 정신이 가장 크다. 자본의 간섭을 안 받고 자신의 작가적 시각으로만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그 다음이 돈에 대한 집착이다. 후자에서는 자신의 연출력의 한계도 엿보인다.

베송이 그렇다. 데뷔작 ‘마지막 전투’부터 명장의 탄생을 알린 베송은 이후 ‘그랑 블루’로 절망과 허무주의의 끝을 보여주더니 ‘레옹’에서 역시 인간의 야만성을 소재로 작품성은 물론 흥행까지 함께 잡으며 프랑스 출신의 할리우드 체질 감독의 탄생을 알린다.

하지만 ‘제5원소’로 그의 작가주의는 끝난다. 장 폴 고티에르라는 대표적인 명품 디자이너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철저하게 상업주의화된 그는 이후 제작자로 변신해 ‘택시’ 시리즈 등을 제작하며 돈맛에 길들여진다.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는 연출보다는 제작 기획 각본 등이 더 많다.

이런 행보는 타란티노가 이어왔다. 베송의 최근 연출작 ‘루시’는 평가와 흥행에서 예전만큼의 이름값을 해내지 못했다. 타란티노가 겁나는 것은 바로 이것으로 추측된다. ‘바스터즈’와 ‘장고’가 그의 연출작 중 가장 흥행에 성공했지만 화제성에서는 뒤졌다. 한국에서의 철저한 외면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에 순수제작의 ‘마셰티’는 흥행에서 재미를 못 봤고 그의 마니아들의 혹평을 들어야했다.

타란티노는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회 위원장과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을 정도로 국제영화제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돈도 벌 만큼 벌었다. 더구나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우마 서먼과 연인이 됐음을 알리더니 최근 젊은 여배우 바네사 페를리토와 다정하게 키스하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는 등 연애에 푹 빠져있다. 더 이상 각본과 연출 그리고 제작에 골몰하느라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할 수 없을 만큼 그는 감독이 아닌, 연예인 생활이 즐겁다.

감독이 제작자나 배우와는 다른 차원에서 관객에게 신뢰를 주고 그만큼의 지지를 받는 것은 작품의 완성도에 근거한 메시지와 깨달음 때문이다. 영화는 재미있어야 돈 내고 입장권을 구매하는 것인데 그 재미가 단순한 상업성이나 얄팍한 잔재주, 그리고 일시적인 유행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묵직한 울림이 있어야 한다는 게 감독의 이름에 따라 입장권을 구입하는 관객들의 공통적인 기준이다.

타란티노의 은퇴선언은 ‘박수칠 때 떠나라’는 교훈에 근거할 때 아름다운 패배의 인정으로 보인다. 이제 놀란같은 훌륭한 후배들에게 자연스럽게 권좌를 이양하는 멋진 뒷모습을 보이는 선배로 남겠다는 결정은 상당히 거룩해 보인다.

물론 ‘저수지의 개들’에 열광하고 ‘킬 빌’같은 동서양 B급 정서의 절묘한 조합을 다시 한 번 기대했던 마니아들에게는 서글픈 소식일 수 있지만 선댄스는 계속 잘 돌아가고 있으며 훌륭한 감독은 서양은 물론 동양에서도 계속 탄생하고 있다.

미국에 윌리엄 프리드킨과 쿠엔틴 타란티노가 있다면 미국에 비해 영화 환경이 열악한 태국에도 논지 니미부트르와 대니 팽, 옥사이드 팽 형제도 있다. 물론 한국의 봉준호나 박찬욱도 프랑스와 미국이 인정했다.

타란티노의 비교적 빠른 은퇴선언은 피터 잭슨, 샘 레이미, 크리스토퍼 놀란 등이 대표적인 독립영화계의 신동이었지만 현재 가장 확실한 흥행감독이라는 아이러니의 반영이다. 미국이라는 자본주의의 대표 국가에서도 자본의 논리가 가장 확실한 시장 할리우드의 스타감독이 ‘저수지의 개들’에 머물 수 없는 현실의 본질이고, 그런 모순을 타란티노는 인정하고 스스로 빠른 퇴장을 결심한 것 아닐까?

[티브이데일리 하영민 칼럼니스트 news@tvdaily.co.kr / 사진=티브이데일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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