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3학년 2학기> 스틸컷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3학년 2학기> 스틸컷서울독립영화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이란희 감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천막>(2016)을 통해서였다. 경영 악화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했던 콜트콜텍과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고 복직을 위해 10여 년의 시간을 투쟁했던 이들의 모습을 극영화로 옮긴 작품이었다. 해고 노동자들이 프레임 속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했고, 영화는 그들의 모습을 마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담아냈다. 이 작품에서 연대와 공동체, 저항은 단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생명처럼 꿈틀거린다.

그가 2021년에 연출한 또 다른 작품 <휴가>(2021) 역시 같은 선상에 있다. 한국영상위원회 지역 영화 기획개발 및 제작 지원 사업과 인천영상위원회의 제작 지원으로 전작인 <천막>의 이야기를 발전시킨 작품이었다. 천막 농성을 위해 오래 집을 떠나 있던 아버지 재복(이봉하 분)이 정리해고 무효소송 최종 패소 판결 이후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그렸다. 당시의 이란희 감독은 10년이 넘게 농성 중이던 한 해고 노동자가 농성장을 세 번 떠나고 다시 세 번 돌아와 정말 '끝'을 내는 모습을 보며 이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두 편의 작품 속에 그의 그런 마음이 오롯이 녹아있다.

[참고] [넘버링 무비 301] 인디그라운드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15 <휴가>

영화 <3학년 2학기>는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앞서 설명한 두 작품이 직업을 잃은 노동자의 오랜 투쟁과 관련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작품은 이제 막 사회로 나아가려는 학생들의 모습을 담는다. 직업계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학생인 창우(유이하 분)와 그 친구들을 통해서다. 취업을 위해 중소기업의 현장실습을 하게 되는 청년들의 모습은 지난 작품 속 모질고도 절망적이던 어른들의 시간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다만 여전히 성실하게 노동의 기회를 찾고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02.
"오히려 더 잘 됐어. 너 병역 특례 되면 3년 더 다녀야 해. 여기 비전 없어."

졸업을 앞두고 취업하기 위한 창우의 첫 시작은 그리 순탄하지 못하다. 건실한 중견기업에 현장실습을 지원해 보지만 떨어지고 만다. 자격증도 3개뿐인 데다 성적까지 낮은 자신을 어떤 회사에서 뽑아주기는 할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가정 형편도 좋은 편은 아니다. 담임이 추천한 중소기업에라도 나가게 되는 것은 병역특례나 연계 대학 입학과 같은 부수적인 유인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마(강진아 분) 혼자 세 아들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빠른 취업을 통해 가정의 경제적 상황에 도움이 되는 일이 그에게는 중요하다.

하지만 처음 회사에 나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끊임없이 괴롭혀 오는 상사들의 은근한 괴롭힘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다. 먼저 입사해 일하고 있던 또래 성민과 끊임없이 비교한다. 그는 일머리가 좋아 선임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일을 빠르게 하면 대충한다고, 꼼꼼하게 하면 느리다고 어떻게든 이유를 붙여 꼬투리를 잡는다. 함께 입사한 같은 반 친구 우재(양지운 분)가 그런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난 후에는 그 모든 압박이 창우의 것이 된다.

그나마 학생들의 입장에서 배려해 주는 한 주임으로부터 용접을 배우며 마음을 붙이지만 한 달 내내 일하고 받은 첫 월급은 고작 64만 원. 아직 정식 고용 계약을 하지 않은 상황이고, 실습 기간이 끝나고 취업이 되면 장려금이 별도로 나온다지만 가혹한 액수다. 막내 동생 진우가 좋아하는 브랜드 치킨 두 마리만 사도 5만 원이 훌쩍 넘는데, 결국 이 자리에서도 강요되는 것은 버팀과 인내의 시간뿐이다.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3학년 2학기> 스틸컷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3학년 2학기> 스틸컷서울독립영화제

03.
이 작품의 수많은 장면 가운데 꼭 하나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공장으로 찾아온 담임 선생님과 창우가 면담을 끝내고 난 다음의 장면. 성민(김성국 분)과 다혜(김소완 분)와 함께 옥상 한구석에서 그가 사 온 햄버거를 먹으며 공단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컷이다. 이 장면으로 인해 영화 <3학년 2학기>의 모든 이야기는 개인의 것이 아닌 전체의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게 된다. 세 사람이 바라보는 공단 내부만 하더라도 이들과 같은 상황에 처한 청년이 몇이나 될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업무 강도가 높다거나 개선되지 못한 근무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육체적 어려움은 참을 수 있다(그래서도 안되지만). 병역 특례나 대학 추천 입학 등의 달콤한 말로 학생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고, 가장 기본이 될 작업의 안전보다는 속도나 비용 절감에 훨씬 더 치중하는 분위기. 실습이라는 이유로 법으로 규정된 최저 임금조차 지급하지 않는 노동 구조는 이제 막 사회로 나와 걸음을 시작하는 이들의 고개를 짓누르고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된다. 자신의 내일을 쥐고 있는 어른에게 이들이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을까.

04.
"사람이 일하다가 죽을 수 있다는 거 생각도 못 했어."

협력업체에서 일하던 선배 수호의 죽음은 영화의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단번에 쏟아낸다. 조금 전 이야기했던 공단 내 수많은 지붕 아래에 감춰진 진실이다. 회사의 에이스로 인정받으며 병역 특례를 받는 것은 물론 연계 대학까지 진학하며 모두의 자랑처럼 여겨지던 그의 죽음이다. 영화는 이제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며 선제적으로 보호하지 않는 산업 현장의 현실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기 시작한다. 수호의 죽음 역시, 정확한 이유가 명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회사의 안전불감증으로 인해 보호받지 못하고 산업재해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 정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철야 그라운딩 작업 도중 팔을 다치는 창우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 지점을 위해 이전의 장면들로부터 벌써 몇 번이나 복선을 깔아두며 이야기를 진행시켜 왔다. 현장실습을 나온 고등학생에게 철야 근무를 시키는 일, 안전한 작업을 위한 보호구를 마련하지 않는 일, 심지어 사고 이후 조 과장이 보이는 느긋하고 대수롭지 않은 태도는 이 사회가 청년들의 노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집합체다. 현장 검증을 위해 교육청에서 나온 노무사의 일정에 맞춰 다친 창우를 회사로 부르고, 깁스 지지대를 풀게 만들며, 사고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은근한 압박을 주는 장면은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을 정도다.

마주앉은 노무사를 대하는 성민과 창우 두 사람의 상반된 태도는 그래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회사가 지금까지 감춰왔던 여러 문제를 밝히고 퇴사해 버리는 성민과 실질적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창우다. 물론 창우의 경우에는 이사를 앞둔 가족이 필요로 하는 자신의 취업 장려금 문제를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회사를 다녀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상황을 고발해야 하는 성민의 협의(俠義)도, 직접적인 피해자임에도 나설 수 없는 창우의 가책(呵責)도 이제 막 졸업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짊어져야 할 상황이나 감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이런 상황에 밀어 넣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3학년 2학기> 스틸컷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3학년 2학기> 스틸컷서울독립영화제

05.
감독의 지난 작품인 <휴가>를 보고 나서 '어둡고 혼탁한 물속에 깊이, 또 오래 잠겨있는 일에 가깝다'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이번 작품 속 아이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분명히 다른 상황에 놓인, 서로 다른 인물인데 어째서 나는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이란희 감독은 이 작품 <3학년 2학기>의 노트를 통해 '부모를 잘 만나지 못해도, 타고난 재능을 찾지 못해도, 꿈이 없어도,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빛나는 성취를 이루지 못해도, 운이 좋지 못해도, 성실하게 노동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나 인간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인정받으며 살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가 말하는 이 마땅하고 타당한 표현들이 사회 곳곳에서 외면당하고 생략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서울독립영화제 3학년2학기 이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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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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