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우 대표가 ㈜의식주컴퍼니를 창업하기까지①
동아일보는 14일 창업가 인터뷰 시리즈 ‘Question & Change’ 연재를 시작했다. 하지만 창업가가 걸어온 길을 한정된 지면에 싣는 데는 한계가 있다.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지면에 미처 싣지 못한 대화 내용을 추가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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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 센트럴파크타워에 있는 ㈜의식주컴퍼니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카페 같은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노란색과 초록색이 배합된 냉장고, 시내 전망이 확 트인 창가를 따라 놓인 책상, 안마의자가 놓인 1평 남짓의 Rest Room과 식물들. 이 곳은 세탁 서비스를 하는 회사 맞는가.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통유리 문에 새겨진 각 회의실의 명칭이었다. ‘Dryclean Room’ ‘Wash Room’ ‘Spot Room’….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의 조성우 대표에게 회의실 이름을 그렇게 붙인 이유를 물었다.
“재미나 브랜딩 차원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면 사무실 직원들도 현장 중심적 사고를 할 것일지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저희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 고객 경험과 직결되기 때문에 현장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거든요.”
―창업을 고민하게 된 시점은 언제부터인가.
현대중공업 홍보실에서 근무한 지 5년이 넘어갈 무렵이다. 당시 모시고 있던 고위직의 인사이동으로 갑자기 부서가 해체됐다. ‘정말 열심히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이별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회사 생활에 한계를 느꼈다.
당시 같이 일했던 선배와 술 한 잔 했는데, 그 선배가 “회사 다니는 건 홀로 서는 거다. 너도 이제 앞으로 혼자 서는 길을 가야한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현대중공업에서 젊은이들의 도전정신에 대해 홍보하는 역할을 했는데, 정작 나는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는 것 같아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퇴사는 2011년에 했다. 퇴사일이 내 생일이라 날짜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마음으로 사표를 던져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날 냈다.
㈜의식주컴퍼니 사무실
㈜의식주컴퍼니 회의실
당시에는 대기업에 입사하는게 ‘가장 잘됐다’라고 얘기하던 때였다. 부모님도 현대중공업에 다니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하지만 아들의 인생을 부모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부모님과 상의 없이 퇴사했고, 퇴사를 한 후에 “회사를 그만 뒀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앓아누우셨다.
당시 ‘벤처’는 어감이 좋지 않았다. 겉멋 든 사람들이 하는 무모한 도전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잘 나가던 대기업 관두고 창업한다고 하니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현대중공업을 퇴사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창업을 했더라.
퇴사할 무렵 티몬, 위메프, 쿠팡 등이 막 등장하면서 소셜커머스가 ‘뜨고’ 있었다. 이걸 보면서 나도 도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인받은 금액만큼 카페나 레스토랑 이용권을 붙여 덤으로 주고, 사람들끼리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모델을 만들었다. 그래서 회사 이름을 ‘덤앤더머스’라고 붙였다. 매출의 1%는 사회공헌 활동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델도 넣었다. 하지만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수익이 나지 않으니 사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당시 포털 배너 광고비가 1시간에 3500만 원이었다. 자본금의 5분의 1을 거기에 썼다. 배너를 타고 들어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서버가 다운됐고, 기술력이 부족하다보니 2주 동안 복구를 못했다.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시작했던 모든 것들이 와장창 깨지기 시작했다. 회식 한 번만 해도 100만 원씩 없어졌다. ‘30명 가까운 사람들의 소중한 미래와 인생을 너무 무책임하게 생각하고 사업을 시작했구나’라는 반성이 들었다. 무서웠다. 결국 6개월가량 버틴 뒤 울면서 직원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이별했다.
―첫 창업이 망한 것인데. 그 뒤로는 어떤 과정을 겪었나.
함께 창업했던 5명이 모여 굉장히 깊은 토론을 했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해보자’라고 생각해 남성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종합 서비스로 피봇팅(Pivoting·방향전환)을 했다. 처음엔 ‘대동회식도’라는 이름의 회식장소 추천 서비스였다. 이용자가 예산과 인원 수, 지역 등의 조건을 입력하면 식당을 추천받고 예약까지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러면서 발전된 아이디어가 ‘구독’이었다. 이 자체가 큰 개념이다보니 정기성을 갖는 아이템들을 배달해주는 방향으로 다시 한 번 피봇팅을 했다. 샐러드 도시락이 가장 잘 되는 모습을 보고 신선식품에 집중했다. 직장인들이 회사에 있을 때 신선식품 배송이 집으로 오면 불안하니, 출근하기 전에 배달되는 콘셉트를 착안했다. 국내 새벽배송의 효시 격이다. 하지만 3번의 피봇팅이 1년 안에 일어나는 혼란이 있다보니 그 과정에서 초기 멤버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덤앤더머스 당시의 조성우 대표.
―이 회사를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이 인수했던데.
콜드체인을 만들면서 2014년도에 약 20억 원의 매출이 났다. 그 전까지는 엔젤 투자만 받았는데, VC(벤처캐피털)투자도 한 번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한 VC에서 우아한형제들을 만나보라고 조언해줬다. 당시 이 회사는 큐레이션 서비스를 했다가 성과가 잘 안 나는 상황이어서 우리 서비스를 긍정적으로 봤다고 들었다.
만나고 나서 한 달 정도 지날 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회사를 방문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그 때 우아한형제들의 김봉진 대표도 같이 왔다. 김 대표는 그 자리에서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인수 제안을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서 덤앤더머스를 팔거나 M&A를 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고민이 됐다. 우리 힘으로 여기까지 잘 왔고, 더 잘 되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 큰 회사, 더 좋은 회사의 힘을 받아 더 많이 잘 성장해야겠다. 더 이상 일개 스타트업이 할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대표인 후배에게 의사를 물어봤고, 부대표는 내게 “형님 뜻대로 하세요. 저는 (매각)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인수 후 서비스는 ‘배민프레시’로 이름이 바뀌고, 초기에 굉장히 잘 됐다. 하지만 배달의민족에는 배민프레시뿐 아니라 배민라이더스라는 또 다른 크고 중요한 사업도 있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프레시 산업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 분위기도 있었다. 2년 6개월가량 배민프레시 대표를 지내다가 ‘충분히 내 역할은 다 했다’고 생각해 퇴사하게 됐다.
배민프레시 시절의 조성우 대표.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을 그만두고 나서 어땠나.
스타트업 창업자로서 창업부터 M&A까지 한 번의 사이클을 7년에 걸쳐 끝내고 자유의 몸이 된 것이었다. 기쁨의 눈물이 나와야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무리를 짓고 집에 딱 들어간 순간 주변이 하얘지는듯한 느낌을 받았고, 눈물이 쏟아졌다. ‘창업이라는 게 다시 혼자가 되는 과정이구나’라는 걸 느꼈다. 사업 중간 중간 창업자들은 다 떠났고, 부모님은 힘들어하셨다.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에 너무 허무했다.
우울증이 오고 몸도 아팠다. 독감시즌도 아닌데 독감에 걸리고 대상포진도 걸렸다. 한 달 동안 집밖을 안 나가다가, 7년 동안 나를 위해 한 번도 투자한 적이 없다는 생각에 대학시절 교환학생을 다녀온 미국 서부지역으로 여행에 나섰다.
두 번째 창업의 계기가 된 미국 여행 중 도난사건.
―미국 여행에서 지금의 ‘런드리고’(비대면 모바일 세탁 서비스) 아이디어를 얻어왔다는데.
친구와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던 중 도둑이 렌터카 뒷 유리창을 깨고 짐을 다 가져가는 도난 사건을 겪었다. 그런데 도둑이 유일하게 안 가져간 게 있었다. ‘아마존프레시’ 가방에 담아놨던 빨래다. ‘그 가방에 좋은 옷도 많았는데, 왜 안 가져갔을까’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다닐 때 경험도 문득 생각났다. 오전 7시에 정장을 입고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면 빨래가 늘 스트레스였다. 뭔가 느낌이 왔다.
미국 동부에 있는 필라델피아로 지인을 만날 겸 놀러갔다. 그리고 지인으로부터 주변에 세탁 관련 사업을 하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미국 한인사회의 ‘세탁왕’ 같은 분이었다. 그 분을 통해 중국인이 운영하는 세탁 공장도 가 보게 됐다. 셔츠를 기계들이 다림질하고 있었다. 식품과 달리 세탁은 기계화·자동화가 많이 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필라델피아에 갈 때까지만 해도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었다. 일단 ‘알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공장 방문을 계기로 진지하게 어떤 직감이 확 왔다. 그때부터 일본, 한국의 공장을 다니며 3개월을 고민했다.
‘창업이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창업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변화와 혁신이 없는 세탁시장을 바꿔볼 수 있겠다, 청결하게 잘 세탁해주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해주면 세계적으로도 충분히 좋은 서비스를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느낌이 왔다고 곧바로 미국 서부에서 동부로 날아가다니.
“이게 설명이 잘 안 되는 부분이다. 뉴욕에서도 세탁왕을 만나러 가는 길은 서울 강남에서 김포까지 가는 거리였다. 그 분의 연락처를 받고 연락을 안 했을 수도 있고 여행길에 굳이 먼 길을 찾아가 만나지 않아도 됐던 상황이었다. 창업가는 망각의 동물인 것 같다. 막상 창업하면 왜 또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마약과 같다고나 할까. 성취를 했을 때의 즐거움과 기쁨, 좋은 것만 생각난다.”
<TO Be Continued…>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