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고객” “10년 후를 보라”… 세계 1위 반도체기업 키운 저력 [Leadership]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모리스 창 전 TSMC 회장이 지난 9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자서전 출간 행사에서 책을 살펴보고 있다. 자서전에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재직하던 1964년부터 TSMC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2018년까지의 행보가 담겼다. 로이터 연합뉴스

■ Leadership - TSMC 설립 모리스 창 前 회장

‘고객사와 경쟁 않는다’ 신념
초기부터 신뢰 쌓아 오랜 거래
혁신·상생 함께하는 파트너로

위기땐 오히려 과감한 투자
글로벌 금융위기때도 설비 확충
이후 첨단 공정 선점해 매출 ↑

‘대만 지키는 신령한’ 기업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64%
내년 2㎚ 6G칩 양산 눈앞에

베이징 = 박세희 특파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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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출간된 뒤 대만 최대 온라인 서점 보커라이(博客來)에서 30일 현재 한 달 넘도록 베스트셀러 1위를 지키고 있는 책이 있다. 모리스 창(張忠謀·장중머우·93)의 자서전이다. 자서전에는 미국 반도체 업계에서 일하다 대만으로 돌아와 TSMC를 세우고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으로 키워낸 이야기가 담겼다. 그는 지난 2018년 87세의 나이로 회장직에서 은퇴한 뒤 자서전을 집필해왔다.

창 전 회장은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서 태어난 뒤 미국으로 이민,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공부하고 미국 반도체 기업인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에서 20여 년간 일하며 동양인으로선 이례적으로 그룹 총괄 부회장 자리까지 올랐다. 이어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역임했지만 대만 정부로부터 대만산업기술연구원(ITRI) 원장직 자리를 제안받은 뒤 1985년 대만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1987년, 56세의 나이에 TSMC를 창업했다. 남들은 은퇴하는 나이에 회사를 설립하고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 회사로 키워낸 그의 리더십은 고객사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신뢰 리더십’, 위기에 닥쳤을 때 이를 타개하려 돌진하는 ‘불도저 리더십’,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 리더십’으로 요약된다.

◇ 신뢰로 ‘갑’ 뛰어넘는 ‘슈퍼 을’이 되다 = 파운드리는 ‘을’의 사업이다. 반도체 공장을 갖고 있지 않은 채 설계만 하는 엔비디아, 퀄컴 등 회사들로부터 설계도를 받아 주문대로 만들어준다. 고객사들과의 신뢰가 기업의 존망을 결정짓는 시장인 셈이다. 이에 창 전 회장은 회사를 설립할 때부터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으로 회사의 위치를 정의했다. 그가 세운 3원칙은 ‘고객의, 고객에 의한, 고객을 위한’이었다. 창 전 회장은 직원들에게 “항상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라”고 강조했다. 회사 초기, 직접 잠재 고객들을 찾아다닌 그는 “우리는 고객의 경쟁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통해 고객사들과의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회사의 모토는 “고객사와 경쟁하지 않는다”였다. 파운드리 한 우물만 파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대만에서 반도체 업계를 30년 넘게 취재한 ‘TSMC 세계 1위의 비밀’ 저자 린훙원(林宏文) 기자는 책에서 1990년 중반 TSMC에 갔다가 로비 데스크에서 씨름을 벌인 일화를 전했다. 그는 취재를 하러 기업에 갈 때마다 방문객 출입관리대장을 쓰면서 앞서 누가 다녀갔는지 보기 위해 앞장을 넘겨보곤 하는데 TSMC의 대장엔 앞장을 넘겨볼 수 없도록 집게가 꽂혀 있었다. 고객사들끼리 서로를 알지 못하도록 회사가 취한 조치였다. 이처럼 TSMC는 보안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모든 팹(Fab·반도체 생산공장) 사이에 강력한 ‘파이어월’(firewall)을 설치해 해킹을 통한 반도체 디자인 유출을 방지했고 생산 라인도 고객사별로 독립적으로 운영했다.

창 전 회장은 고객사들과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상생을 추구했다. 애플과의 파트너십이 대표적이다. 2010년대 초반 애플이 자사 아이폰에 들어갈 고성능 칩을 대량 생산할 파트너를 찾던 때, 창 전 회장은 단순히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공급 업체가 아니라 혁신을 함께 실현하고 함께 성장하는 전략적 파트너로서 다가갔다. 애플이 요구하는 더 작고 효율적인 칩을 공급하기 위해 7㎚(나노미터), 5㎚ 공정 기술을 선제적으로 개발하는 등 애플의 요구를 미리 파악하고 기술 개발에 힘쓴 것이다. 2010년 제프 윌리엄스 애플 COO와 창 전 회장의 식사로 시작된 애플과 TSMC의 관계는 이후 급속도로 발전했다. 특히 창 전 회장은 애플이 지식재산권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원한다는 점을 알고 이를 철저히 지켜냈다. “애플이 요구하지 않은 수준까지 보안을 강화했다”는 게 TSMC 임원 출신 딕 서스턴의 전언이다.

◇ 위기를 기회로…전례 없던 ‘나이트호크 프로젝트’ = 창 전 회장은 위기를 맞을 때면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빠르게 행동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위기가 본격화하자 그는 임원들을 소집해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창 전 회장은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앞서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면서 “다른 기업들이 움츠러드는 동안 우리는 과감히 투자해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는 등 보수적인 전략을 취할 때 오히려 과감한 투자를 감행하자고 임원들을 설득한 것이다. TSMC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 3년간 총 50억 달러(약 7조 원) 이상을 설비 투자에 쏟았다. 이는 당시 TSMC 연간 매출의 두 배 이상 규모였다. 2000년대 들어 정보기술(IT) 산업의 성장으로 반도체 수요는 크게 늘었고 TSMC는 이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TSMC의 시장 점유율은 1997년 18%에서 2002년 50% 이상으로 급증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계속되던 때에도 창 전 회장은 이 시기야말로 기술 격차를 늘릴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했다. 32㎚ 공정을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던 때, 그는 28㎚ 공정 개발을 위해 연구·개발(R&D) 인력을 확충했고 최첨단 장비 등을 도입했다. 이에 TSMC는 2011년 28㎚ 공정 생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애플, 퀄컴 등 주요 고객사들이 TSMC의 28㎚ 공정을 채택했고 2012년 TSMC 매출은 전년 대비 19% 늘고 순이익은 24% 상승했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불도저처럼 돌진하는 그의 성향을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가 또 하나 있다. 2014년 12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14㎚ 핀펫 공정을 개발하자 TSMC는 발칵 뒤집혔다. 당시 TSMC는 16㎚ 핀펫 공정 기반이었다. 1년 후면 삼성에 14㎚ 주문을 빼앗길 것으로 예상됐고 인텔도 10㎚ 기술 개발을 먼저 시작한 상황이었다. 이에 창 전 회장은 차세대 공정기술인 10㎚ 공정 개발에 사활을 걸겠다고 밝혔고 ‘나이트호크 프로젝트’를 선언했다. 전 세계 반도체 R&D 역사상 최초로 R&D 인력 400여 명을 24시간 3교대로 일하게 한 것이다. 물론 파격적인 조건도 함께였다. ‘저녁조’는 연봉의 15%를 추가 지급했고 ‘야간조’에겐 연봉의 30%를 추가로 지급한 데 더해 연말 성과급도 50% 더 줬다. TSMC의 나이트호크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뒀다. 2016년 애플 아이폰 6s 시리즈 A10 칩부터 전량을 TSMC에 발주하기로 한 것이다. 앞서 아이폰 6s 시리즈 A9 칩은 삼성전자와 TSMC가 절반씩 생산했었다.

◇ 4G 시대엔 5G를, 5G 시대엔 6G를…선견지명 리더십 = 창 전 회장은 수시로 직원들에게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항상 10년 후를 생각하라”고 이야기했다. “경영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라고도 했다. 실제로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선견지명으로 회사를 이끌었다.

2010년대 초반 많은 기업들이 4G 기술에 집중할 때 창 전 회장은 5G에 집중했고, 2015년 5G 관련 기술 개발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특히 5G 네트워크의 핵심인 7㎚ 이하 초미세 공정 기술 개발에 많은 자원을 투입, 2018년 7㎚ 공정 기술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이로써 주요 5G 칩 설계 기업들을 TSMC의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지금 TSMC의 시선은 5G를 넘어 6G를 향하고 있다. 2020년부터 3㎚ 공정 기술 개발에 착수해 확보했고, 내년부터는 2㎚ 공정 제품 양산에 들어갈 예정으로 전해졌다. 2026년에는 1.6㎚ 공정이 양산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창 전 회장은 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1989년 대만에서 직접 만나 영입 제안을 했던 이야기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TSMC 재직 시절 그는 줄곧 이러한 삼성을 견제한 것으로 보인다. 대만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국에 이건희가 있다면 대만에는 내가 있다”고 밝히는가 하면 측근에게 “삼성이 거대하지만 고릴라도 발가락을 세게 밟히면 아프듯 삼성에도 약점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TSMC를 삼성을 뛰어넘는 기업으로 키워냈다. 현재 TSMC의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약 64%로, 경쟁사인 삼성전자, 중국 SMIC(中芯國際·중신궈지), 대만 UMC 등을 큰 격차로 따돌린 상태다.

TSMC의 호황에 힘입어 대만의 올해 경제성장률이 4%를 넘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는 가운데, 린훙원 기자는 “TSMC는 어느새 대만의 호국신산, 즉 나라를 지키는 신령한 산이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