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5년이 넘었지만 자동차가 없다. 아이가 없기도 하고, 비교적 대중교통 환경이 양호한 서울에 살기 때문이다. 차가 없어도 밥 먹고 일하고 여가 생활을 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가끔 시가나 처가의 가족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공유 자동차를 빌려 이용한다. '없는' 삶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시가에 가면 아버지 자동차를 이용하고 처가에 가면 장모님 승용차를 이용한다. 아버지 자동차는 덜컹이는 방지턱을 넘을 때면 CD가 자동으로 재생된다. 자동차 이 녀석이 자신을 조심히 다루라고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일까. 그런데 하필이면 뽕짝이다. 뽕짝으로 정신을 쏙 빼내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처가에 가면 '방지턱 뽕짝 공격'은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창문 내리면 안 돼' 다급하게 외친 이유
"아, 창문 다 내리지 말라고!"
어느 날 자동차의 창문을 내리던 아내(?)를 바라보던 장모님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였다. 차 안에 있던 우리는 의아했다. 잠시 후 장모님이 다가왔다.
자동차 창문을 다 내리면 창문이 다시 잘 안 올라간 단다. 그러니까, 나름 장모님 입장에서는 응급 상황이었던 것이다. 내지르는 듯한 외침에 살짝 당황했던 우리는, 장모님이 소리친 이유를 듣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모님도 함께 웃음이 터졌다.
결혼 이후 처가에 가서 자동차를 탈 때마다 아내와 처남은 제발 새로운 자동차를 사자고 권유하고 졸랐다. 그때마다 장모님은 끄떡없었다. 자동차 검진 결과,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받았고 자동차 상태는 괜찮다고 하셨다.
장모님 자동차의 모델은 2006년식, 약 18년 된 아반떼xd. 뒤 범퍼는 찌그러졌고 사방이 알 수 없는 상처로 가득하다. 약간의 오르막이라도 오를 때면 자동차가 끙끙 앓는 신호를 보낸다. 뒷좌석에 앉은 이들은 엉덩이에 살짝 들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작년에 캄보디아 여행을 다녀왔다. 프놈펜에서 시엠립으로 이동하는 버스를 탔다. 비행기를 타고 온 시간만큼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장거리였다. 버스 내부에 들어서니 곳곳에 한글이 적혀 있다.
여행하며 한글을 언젠가 한 번은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곳이 버스일 거라고는 상상 못 했다. 대한민국 국토를 누볐던 버스가 이제는 새롭게 캄보디아 땅을 누비는 것이다.
국내 중고차가 동남아나 아프리카 지역으로 수출되곤 한다. 아프리카 부룬디, 르완다 지역을 갔을 때도 국산 차를 볼 수 있었고 동남아 베트남이나 필리핀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캄보디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외관이 자동차가 캄보디아를 활보하고 있었다. 아반떼xd보다 더 낡은 자동차들이었다.
문득 주인(장모님) 말만 잘 듣는 아반떼xd가 생각났다. 연식도 오래되고 여기저기 고장 났지만, 운행과 안전에 문제만 없다면 그야말로 이상 없는 것 아닌가. 하나의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습관이 타박받을 일이 아니라 전혀 문제가 없는 자동차를 팔고 새 자동차로 휙휙 바꾸는 문화를 반성해야 되는 것 아닐까.
무더위에 지친 장모님의 위대한 소비
가끔 장모님 자동차를 운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운전하기 위해 운전석에 탔는데 사이드미러가 접혀 있었다. 수동으로 사이드미러를 펴야만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손으로 당겨도 펴지질 않는다. 좀 더 강하게 잡아당기면 그대로 뽑힐 것 같은 느낌. 이런 예감이 들 때마다 물건을 부숴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사이드미러를 거칠게 다룰 수 없었다. 아내와 내가 사이드미러 앞에서 씨름하는 사이, 보다 못해 장모님이 차에서 내리시더니 사이드미러를 절도 있게 잡아당겼고 혼이 난 사이드미러는 제자리를 찾았다.
사이드 미러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흔히 깜빡이라고 부르는 방향지시등을 켰는데 깜빡이 소리가 이전과 달랐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평소 박자를 반으로 쪼개어 깜빡이 소리가 방정맞게 들렸다. 원인은 정확히 몰랐지만 고장이 난 것이다. 어떤 물건이든 오래 사용하면 손 볼 곳이 하나둘 생기는 것이 순리다. 자동차가 여기저기 아프다고 신호를 보낸다.
캄보디아의 가르침 덕분일까. 아직은 탈만하다고 생각했다. 안전에 위협이 되거나 자동차 주행 기능 자체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장모님께 말씀드렸다.
"장모님, 자동차 아직 끄떡없습니다. 캄보디아에 가보니 도로 위에 장모님 자동차보다 낡은 자동차가 한둘이 아닙니다. 자동차정비 결과에서 안전에 무리만 없다면, 타셔도 될 것 같아요! 제가 보증합니다."
농담반, 진담반 사기꾼 같은 내 보증 이야기에 모두가 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처가에 방문했는데 자동차가 바뀌어있었다. 캄보디아 여행 후 낡은 중고차를 타시겠다는 장모님을 응원하던 나에게는 '갑자기'였고 아내에게는 '드디어'였을 테다. 끝장을 볼 태세였던 올곧은 장모님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올해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초여름이나 초가을 날씨에는 양쪽의 창문을 활짝 열고 절반의 오픈카 주행 모드라도 즐기겠지만 한여름에는 창문을 열어도 소용이 없다. 더위가 범인이었다. 더위가 장모님의 아반떼와 끝까지 가보겠다는 굳은 의지를 꺾어버린 것이다.
장모님 자동차의 에어컨은 정말 '시원찮았다'. 아반떼 이 녀석도 더위를 먹었는지 여름에도 뜨거운 바람을 내뱉는다. 사이드미러, 방향 지시등 고장에 이어, 이제는 에어컨까지 화룡점정이다. 바야흐로 때가 된 것이다.
게다가 장모님이 거의 매일 가시는 밭에는 주차장이 별도로 마련되지 않아 땡볕에 주차해야 한다. 조금만 바깥에 세워두면 찜통이 되어버린다. 한여름 이 아반떼에 탑승하면 눈앞에 아지랑이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기억해보라, 올여름의 무더위면 자동차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 고장 나고도 남았다.
결국 더위가 일을 냈다. 장모님이 큰 결심을 하시고 새로운 중고차(?)를 구입하셨다. 우리 부부는 이 위대한 소비에 박수를 보냈다. 다행히도 아는 분이 중고차를 내놨기 때문에 저렴한 금액으로 구매하실 수 있었다. 물론 25만 km 정도 탔기 때문에 최상의 중고차라고 볼 순 없지만, 내부는 깨끗했고 관리도 잘 되어있었다.
아반떼는 어떻게 되었을까? 필자는 자연스레 폐차 되었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장모님은 여기서 상상치 못할 일을 추진하셨다. 중고거래 애플리케이션에 기존 아반떼를 올리신 것이다.
무료 나눔도 아니었고 70만 원에 판매하셨다. 내가 바로 그 아반떼를 타보고 운전도 해본 당사자이지 않은가. 자동차에 관해 무식한 탓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 차가 70만 원에 거래되는 거지? 여름에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아반떼를 70만 원에 사는 이가 있다니.
장모님 중고거래 이야기를 들으니 수긍이 되었다. 중고거래에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외국인 분에게 연락이 왔는데, 한국의 중고차를 외국에 가져다 파는 일을 하시는 분이었단다. 외국인의 사업 수완에도 놀랐지만 장모님의 수완에 더 놀랐다. 마치 본인의 아반떼가 중고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걸 확신이라도 한 것 같았다.
자동차 오래 타는 문화를 응원한다
우리 집은 늘 한철 지난 중고차를 탔다. 자동차 회사에서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한참 이전의 모델이 중고차 시장에 나오는데 그런 자동차를 탔다. 지금까지 가족 소유로 된 새 자동차를 타본 적이 없다. 물론 그게 부끄러울 때도 있었다. 한철 지난 유행 옷을 입는 것처럼 말이다. 내 신분과 주머니 사정이 도로 위에서 벌거벗겨진 것 같달까.
어느 순간엔가 자동차에 집착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이 소탈하게 느껴졌다. 장모님도 마찬가지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자동차의 본질적인 기능에만 집중하신다. 이것이 진정 합리적인 자동차 소비 아니겠는가. 여전히 보이는 것에 민감한 나로서는 존경스러울 뿐이다. 물론 장모님도 에어컨 없는 자동차는 견디실 수 없었지만 말이다.
자동차는 우리에게 이동의 자유를 가져다줬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오늘날 자동차 소비는 단순히 이동의 필요성 때문만은 아니다. 국내 인구 두 명당 한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구매한 자동차를 오래 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빨리빨리'의 민족 아닌가. 자동차 기업은 너무나도 자주 신차를 출시하고 우리는 쉽게 자동차를 바꿔버린다.
정비사가 괜찮다는 자동차를 타겠다는 장모님이 이상한 게 아니라, 외관상 바꿔야 할 것 같은 압박을 주는 시대가 이상한 것 아닌가. 나는 장모님이 새로 구입한 중고차를 몇 년이나 더 타실지 궁금하다. 새로운 중고차야, 장모님을 잘 부탁한다. 아마 네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장모님은 널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영원한 단짝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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