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현지시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마닐라 말라카낭 대통령궁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반도체 회사를 비롯한 제조업 분야에서 필리핀 출신 엔지니어들에 대한 수요는 여전합니다. 동남아 국가 중 교육 수준이 높고, 기술이 뛰어나며, 영어가 통하기 때문입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필리핀에서 구할 수 있는 변변한 직장이 없는 것도 싱가포르에 필리핀 엔지니어들이 몰려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도 반도체 팹으로 직장을 옮겼지만 여기서 함께 일하는 엔지니어의 대부분이 필리핀 출신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일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됩니다.
음식이나 여행, 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서로 좋은 점을 추켜세워 주고 은근히 자국의 장점을 내세우며 대화가 흘러갑니다. 특히 케이팝과 넷플릭스를 통해 전해지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필리핀 동료들도 한국이 최고라고 입을 모읍니다.
하지만 정치 이야기를 할 때는 좀 다릅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래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시아에서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필리핀 동료들은 한국이나 필리핀이나 뭐가 그리 다르냐는 식으로 받아칩니다.
2016년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필리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저는 그가 한국의 전두환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를 섞어 놓은 것 같다며 어떻게 그런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있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필리핀 동료들은 두테르테가 필리핀의 구악을 해소할 적임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너무 폭력적이지 않냐고 물으니 이명박 정부 당시 서울 광화문에 컨테이너를 쌓아 시민들을 막았던 명박산성이나 전쟁과 같았던 용산참사를 이야기하며, 두테르테는 최소한 선량한 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응수했습니다.
얼마 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필리핀 대통령이 됐을 때는 어떻게 나라를 망가뜨린 독재자의 아들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냐는 저의 지적에 독재자의 자식을 대통령으로 뽑은 건 한국이 먼저라고 답하는 바람에 할 말을 잃기도 했습니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