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3일 110억원대 뇌물 수수와 340억원대 비자금 조성 등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동부구치소로 향하는 호송차에 탑승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권우성
왜 이런 시대착오적인 행동이 반복되는 것일까? 이 퇴행적인 반복에서 드러나는 심각한 문제는 정권과 정부와 국가의 상이한 차원 간의 명백한 구별이 사라져 버렸다는 데 있다. '정권'의 범위는 대통령의 권력 행사 범위인 행정부에 국한된다. 그러나 '정부'는 행정부와 독립된 입법부와 사법부를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대통령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정부만이 아니라 광의의 시민사회 전반을 포괄하는 '국가'는 더더욱 대통령의 권한 바깥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파 대통령들(이명박, 박근혜, 윤석열)은 정권을 잡으면 곧바로 국가와 정부를 정권이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대상으로 환원해 버린다.
정권은 집권 정당의 성격에 따라 정책 기조가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행정부 전체도 오랜 시간 축적된 다양한 법률과 제도로 촘촘하게 짜인 네트워크로서 대통령이나 장관 개인이 제멋대로 짜깁기할 수 있는 기구가 아니다. 행정부를 넘어 입법부-사법부로 분립되어 복잡하게 구성된 정부 전체도 특정 당파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특히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은 좌파든 우파든 정권의 입맛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헌법이 보장한 정치 활동과 언론 및 표현의 자유와 문화예술계의 각종 법률과 제도들을 정권의 정치적 관점에 따라 '제한'하거나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민주적인 사회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겁박이다. 특히 그 어느 때보다 '자유'를 '강조'하고 있는 윤석열 정권이 이렇게 '자유'를 공적으로 '제한'하겠다는 것은 반대로 말해 자신들의 '협소한' 정치적 입장을 정부 전체는 물론 국가 전체에 대해 자유롭게(제멋대로) 강제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중 이렇게 사상 표현과 예술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제한하고 정부와 국가를 정권의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주무른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외적으로는 나치 체제를, 국내적으로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유신 체제를 들 수 있다. 자신들의 정치관과 맞지 않는 세력에게는 사회 안정을 해치는 '빨갱이', '좌파', '불온 세력', '국익을 해치는 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여 사상 표현의 자유와 주요 기본권 등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들은 역사적인 비극을 초래했다. 세계사는 이를 반복되어서는 안 될, 극히 예외적인 광란의 시대로 평가한다.
1년 전 유인촌 장관 임명 당시 나는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시 한번은 코미디로 반복된다는 맑스(카를 마르크스)의 말이 현실이 되고 있음을 개탄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1년 전 유인촌을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해 문화 영역에서 나치-유신 체제로의 회귀를 실천했던 윤석열이 이번에는 선포를 통해 국가 전반에 대해 나치-유신 체제로의 회귀를 강제하려 시도했다. 예술은 잠수함의 토끼와 같다는 오랜 격언이 현실로 입증되는 셈이다. 자유로운 공기의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술 영역에 대한 탄압 자체가 조만간 다가올 사회 전반의 질식에 대한 예고였던 것이다.
2023년 가을 청문회에서 보여준 유인촌의 블랙코미디 관련 대답 같은 기괴한 반응도 이런 예고의 징후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수많은 다른 질문들에 대해 시종일관 '이명박 정부에서는 블랙리스트가 없었다'는 문장을 반복했다. 진지하고 심각한 질문들에 대해 엉뚱하면서도 경직된 답변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기에 영락없는 블랙코미디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작성한 명단이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배제 작가 명단' 같은 한글 제목의 문건이었다면 "'배제 작가 명단'은 '블랙리스트'가 아니다"라는 기이한 주장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하얀 캔버스 하단에 파이프 그림을 그려 넣고 상단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써놓았던 저 유명한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적인 발상을 정치적으로 '패스티시(혼성모방)'하여 청문회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블랙리스트가 정말 없었다면 과연 자신들과 정치관이 다른 이들의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제한'할 수 있었을까? 소위 '불온 작가 명단'이 없었다면 심사 대상이 되는 수천수만 가지 작품들의 다양한 표현 방법과 소재나 주제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판단과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을 일치시킬 뾰족한 방법이 없게 된다. 배제하려는 작가가 포함되고 또는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블랙리스트가 암암리에 통용되던 이명박-박근혜 시대와는 달리 이미 큰 문제로 대두된 새로운 상황에서 블랙리스트 없이 특정 작가를 배제할 수 있는 실효적 방법이 없을까?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고민했는지 최근 문화부는 '책임심의제'라는 제도를 새로 도입했다. 해마다 바뀔 수밖에 없는 다양한 분야의 심사에 일회적으로 참여하는 수많은 심사위원들에게만 의존하는 대신 각 지원 기관 소속이 전담 직원 1인이 심사에 함께 참여하여 전문성과 책임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를 미리 알고 있는 전담 직원이 잘 유도할 수 있다면 수많은 심사위원들에게 블랙리스트를 노출시킬 위험 부담 없이도 자신들의 뜻을 관철할 이점이 있다. 그 유도가 당장은 100% 관철되기 어렵겠지만. 전담 직원이 심사위원들의 성향을 잘 파악해 지속적으로 관리한다면 보장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결함, 이번 기회에 바로 잡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