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17 11:10최종 업데이트 24.12.1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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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대변인 자격으로 '국민께 드리는 당부 말씀'을 발표하고 있다.연합뉴스

지난 10일 오후 국무회의 종료 후,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 장관 유인촌이 정부 대변인 자격으로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정부는 어떤 순간이라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하지만 계엄선포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치안과 법무행정을 책임지는 장관들이 탄핵소추로 공석이 되었다. 이미 계엄선포 전부터 스무 명이 넘는 공직자에 대한 야당의 연속적인 탄핵소추로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어려웠다. 안정적인 국정운영이 어려워지는 상황만은 반드시 막아야 국민의 안전과 우방국의 신뢰를 해치지 않고 경제와 민생이 위기를 견딜 수 있다. 차분한 법치가 위기의 시대에 국민을 구할 수 있으니 거대 야당은 모든 정치적 절차를 법치주의에 따라 전개하는 지혜와 자제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온 국민이 겪고 있는 고통과 혼란의 책임이 실은 집요한 공직자 탄핵으로 국정운영을 어렵게 만들어온 거대 야당에 있으니 더 이상 국정운영을 불안하게 만들지 말고 매사가 법치에 따라 전개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계엄선포가 그동안 국정운영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온 야당에 대한 '경고성 계엄'이었다는 윤석열의 입장을 정부가 나서서 공식적으로 두둔한 것이다.

하지만 4일부터 10일 사이 국방부 장관과 계엄사령관, 특전사령관, 경찰청장의 발언과 707특임단장의 기자회견 등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번 계엄선포는 헌법과 법치를 완전히 위반한 내란범죄에 해당된다. 정부는 어떤 순간에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한다면서 어떻게 대통령의 내란범죄를 두둔할 수 있을까?

이 어이없는 주장의 세부 근거가 12일 오전 10시 윤석열의 네 번째 대국민 담화에서 제시되었다. 그는 이번 사태에 대한 정치적·법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고 향후 여당과 정부에게 국정운영을 맡기겠다던 7일의 발표를 내동댕이치고 자신이 대통령임을 강하게 환기시켰다. 계엄선포가 탄핵 남발과 예산 삭감 등 국정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거대 야당에 의한 국정운영 마비에서 비롯된 것임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경고성'이었고, 한두 시간 제한된 병력을 투입했다가 곧 철수시켰고 방송장악을 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번 계엄선포는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통령으로서의 정당한 통치행위였음을 확신하며 탄핵이든 내란수사든 그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임을 천명했다. 이어 14일 국회에서 탄핵 반대 표결을 한 국민의힘 의원 85명은 이 투쟁 의지가 윤석열 개인의 것만이 아님을 공식화했다. 이로써 12.3 사태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3자 사이의 연결 고리가 그 완전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 고리의 중심인 윤석열의 12·12 담화는 공교롭게도 1979년 12.12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던 날짜와 일치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경악스러운 의미가 함축돼 있어 보인다. 먼저 발표 날짜를 일치시켜 자신의 친위쿠데타가 45년 전 군사쿠데타를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이는 계엄선포가 대통령의 정당한 통치행위라는 전두환의 논리를 반복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또 탄핵과 내란 수사에 맞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하며 여당과 극우세력의 결집을 선동하고 있다. 추락하는 극우세력의 대동단결을 통해 30여 년 전에 사라진 군사독재정권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계승, 부활시키겠다는 대국민 선전포고인 셈이다. 세간에 떠돌던 '윤두광', '윤틀러'라는 별명을 직접 실행에 옮긴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리려는 이 시대착오적인 반복과 그것이 계승하려는 원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45년 전 12.12 군사쿠데타는 이후 1980년대 한국 사회 전반에 공포와 혼란과 죽음을 몰아왔던 참담한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소위 '성공한' 쿠데타였다. 반면 이번 12.12 담화는 지난 12.3 친위쿠데타의 실패를 경고성 계엄이라는 초헌법적인 모순어법으로 '셀프 변호'하며 철 지난 '극우선동'을 통해 탄핵을 저지하려는 희대의 블랙코미디다.

윤석열 입장 두둔하는 '호소문' 발표한 유인촌

2023년 7월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유인촌 대통령 문화체육특별보좌관에게 위촉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경고성 계엄'이라는 표현 자체가 지극히 '광란적인' 말이다. 거대 야당에게 '경고'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치광이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헌법이 정한 근거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한 계엄선포가 대통령의 '정치적 통치행위'라는 주장 역시 그렇다. 자신을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는 절대왕정의 권력자로 착각하는 과대망상이다. 하지만 그가 정신질환자인가? 그를 보호, 지지하는 국민의힘과 국무위원들도 모두 정신질환자인가?

복잡다단한 층위와 역학을 지닌 정치경제의 현실을 정신의학의 단일 층위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의 계엄선포와 이후의 발언들은 그간 공적 자리에서만 걸치고 있던 민주공화국 대통령이라는 갑갑한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이제는 자기 스타일대로 행동하기로 한 결단의 표현으로 보인다. 음지에 흩어진 세력들을 새롭게 결집하기 위해 파시스트의 '생얼'을 시원스럽게 드러내고 자신에게 걸맞은 '조폭 스타일'로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다. 국민의힘을 장악해 온 친윤계의 탄핵 반대 행위도 내란수괴 윤석열과 그 공범들에게 증거인멸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것일 따름이다.

어느 쪽으로 보든 정치 자체를 부정하는 비열한 폭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뿐이다. 망상 편집증에 빠진 내란수괴가 겁박을 통해 국무위원과 정당 전체를 내란공범으로 몰아가든, 반공독재 정권의 계승에 대한 망상편집에 함몰된 파시스트적인 위헌 정당과 그들을 대표하는 국무위원들이 내란수괴를 음으로 양으로 지지하며 증거인멸의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든 말이다.

아마도 이 두 가지 흐름은 어느 한 방향으로 고착되기보다는 <대통령 ↔ 국무위원 ↔ 정당(국민의힘)> 사이에서 부단히 왕복운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왕복운동에서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 셋이 있다. 국민의힘 당대표였던 한동훈, 국무위원을 대표하는 한덕수, 그리고 정부 대변인 유인촌이다.

한동훈과 한덕수는 그들이 차지한 정치적 위상 덕에 이 위기의 급류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 유인촌은 단지 문화부 장관이 정부(국무회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는 이유에서 대국민 호소에 나섰다. 하지만 유인촌이 이번 사태 속에서 특별한 몫을 차지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 비상계엄 포고령 1호 중 2항과 3항 모두가 평상시 그의 관할 업무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가 그것이다.

비상계엄이 성공했더라면 그는 국방부 장관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엄선포 전 국무회의 심의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는 국회의 해제 요구를 수용하는 국무회의 의결에만 참여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번 사태에 대한 그의 개인적 의견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계엄선포는 대통령의 정당한 통치행위라는 윤석열의 담화 내용에 사전 포석을 깔아주는 식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계엄선포 이전의 국무회의에서는 계엄 반대 의견을 전달할 기회가 없었다지만 그 후 일주일이라는 넉넉한 시간이 있었기에 이번 호소문의 내용에 자신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이번 계엄선포가 위헌, 불법이라고 생각했다면 적어도 정부 대변인 자격으로 호소문을 발표하기 전에 사표를 제출해야 했다. 법무부 감찰관이 그랬듯이.

13일 한 보도에 의하면 국민의힘 한기호 의원은 신임 국방부 장관 후보직을 제의받자 '누가 이 상황에서 장관을 하겠냐'라고 고사했다고 한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전시나 사변의 상황이 아님에도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통제하려 했던 위헌·위법적인 비상계엄의 상황에서는 해당 영역의 주무 부서인 문화부 장관직을 내려놓는 것이 정상인의 자세가 아닐까? 그와 달리 그가 장관직을 유지하면서 내란수괴의 입장을 두둔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가 해왔던 일을 되돌아보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유인촌은 왜 사표를 내지 않았을까

2023년 10월 5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남소연

2008~2010년 이명박 정부에서 첫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유인촌은 80년대 인기 드라마 <전원일기>로 널리 알려졌던 TV 탤런트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예술 진흥과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도 당시 유인촌의 문화부는 군부독재 시대의 억압적인 문화정책을 계승·부활시킴으로써 '유명세'를 탄 바 있다. 문화예술계 인사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대한 부당한 표적 감사와 부당 징계 및 학과 해체 위협, 임기가 보장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사실상 내쫓고 한국문화예술위원장 및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불법 해고한 일 등이 그것이다. 마치 법률 전문가 중에서도 최고 전문가라 할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박정희, 전두환의 위헌·위법적인 비상계엄을 '계승·부활'시키고자 한 것처럼 말이다.

윤석열이 주장하는 '경고성 계엄'은 이명박 정부의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과 유사하다. 윤석열은 국회를 해산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한 자신의 위헌적 행동을 거대 야당 주도로 기울어진 정치 판도의 균형을 바꾸기 위한 경고성 선포라고 변명했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실행을 통해 좌파 주도로 기울어진 문화예술계의 균형을 바꾸려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2023년 9월 유인촌 내정자는 기관장 교체에 관한 서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정치적으로 임명된 기관장의 경우 정권 교체 시 물러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국회 차원에서 제도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법보다 정치가 앞선다는 '탈법적'인 생각, 법과 상식과 논리를 정치적으로 초월할 수 있다는 '초법적'인 주장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쟁점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되었다.

대중연예인이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후쿠시마 오염수와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견해를 표현할 수 있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경우 그에 따른 책임도 따르기 때문에 공개적 표현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오염수 방류 우려' 입장을 개인 SNS에 쓴 연예인에 대해 여당 대표가 "개념 없는 연예인"이라는 비판을 한 것에 대한 후보자의 의견을 묻자, "개인적 발언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대중연예인은 공인이기에 공개적 표현에 "신중해야 한다"라면서 '공인 중의 공인'인 여당 대표의 발언에 대해서는 "개인적 발언"이라면서 "평가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라는 것이다. 유인촌은 이렇게 상식과 논리를 뒤집는 기괴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블랙리스트 미이행 과제 관련 질문에 대해서는 "향후 예술인들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창작활동을 지속하고 권익이 보호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이어 윤석열 정부는 그동안 정치풍자, 사회문제를 다루는 예술을 정치적으로 오염된 것으로 예술이 아니라고 매도한 바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지만 예술을 도구로 삼거나 목적 달성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답했다. 정치 풍자나 사회 문제를 다루는 예술은 예술을 도구나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이기에 예술이 아니라는 것인가? 따라서 이런 예술관을 가진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창작 활동을 지속하고 권익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이런 생각은 다음 두 가지 문건의 내용과 일치한다. 하나는 2008년 8월 27일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실에서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이와 거의 유사한 내용을 담은 2008년 9월 문화미래포럼이 국회 문방위 고흥길 위원장에게 제출한 '문화예술계의 현안과 과제'다.

두 문건의 핵심 내용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1) "문화 권력화(문화를 통한 국민 의식의 좌경화)" 실태에 대한 분석 및 좌파에 대한 의도적인 자금줄 차단과 체계적인 관리. 2) 자금을 우파 쪽으로만 배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문화예술 전반이 우파로 전향하도록 추진. 유인촌은 국회 서면 질의응답에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그 문건에서 주장하는 바대로 2009년 이후 정치 풍자나 사회문제를 다루는 다수의 예술가나 예술단체에 대한 지원은 전격 차단되었다. 동일 제목의 문건을 그가 본 적이 없다고 해도 '그 문건 속의 생각'은 그에 의해 관철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 시스템 위협하는 우파 대통령

2018년 3월 23일 110억원대 뇌물 수수와 340억원대 비자금 조성 등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동부구치소로 향하는 호송차에 탑승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권우성

왜 이런 시대착오적인 행동이 반복되는 것일까? 이 퇴행적인 반복에서 드러나는 심각한 문제는 정권과 정부와 국가의 상이한 차원 간의 명백한 구별이 사라져 버렸다는 데 있다. '정권'의 범위는 대통령의 권력 행사 범위인 행정부에 국한된다. 그러나 '정부'는 행정부와 독립된 입법부와 사법부를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대통령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정부만이 아니라 광의의 시민사회 전반을 포괄하는 '국가'는 더더욱 대통령의 권한 바깥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파 대통령들(이명박, 박근혜, 윤석열)은 정권을 잡으면 곧바로 국가와 정부를 정권이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대상으로 환원해 버린다.

정권은 집권 정당의 성격에 따라 정책 기조가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행정부 전체도 오랜 시간 축적된 다양한 법률과 제도로 촘촘하게 짜인 네트워크로서 대통령이나 장관 개인이 제멋대로 짜깁기할 수 있는 기구가 아니다. 행정부를 넘어 입법부-사법부로 분립되어 복잡하게 구성된 정부 전체도 특정 당파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특히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은 좌파든 우파든 정권의 입맛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헌법이 보장한 정치 활동과 언론 및 표현의 자유와 문화예술계의 각종 법률과 제도들을 정권의 정치적 관점에 따라 '제한'하거나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민주적인 사회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겁박이다. 특히 그 어느 때보다 '자유'를 '강조'하고 있는 윤석열 정권이 이렇게 '자유'를 공적으로 '제한'하겠다는 것은 반대로 말해 자신들의 '협소한' 정치적 입장을 정부 전체는 물론 국가 전체에 대해 자유롭게(제멋대로) 강제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중 이렇게 사상 표현과 예술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제한하고 정부와 국가를 정권의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주무른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외적으로는 나치 체제를, 국내적으로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유신 체제를 들 수 있다. 자신들의 정치관과 맞지 않는 세력에게는 사회 안정을 해치는 '빨갱이', '좌파', '불온 세력', '국익을 해치는 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여 사상 표현의 자유와 주요 기본권 등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들은 역사적인 비극을 초래했다. 세계사는 이를 반복되어서는 안 될, 극히 예외적인 광란의 시대로 평가한다.

1년 전 유인촌 장관 임명 당시 나는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시 한번은 코미디로 반복된다는 맑스(카를 마르크스)의 말이 현실이 되고 있음을 개탄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1년 전 유인촌을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해 문화 영역에서 나치-유신 체제로의 회귀를 실천했던 윤석열이 이번에는 선포를 통해 국가 전반에 대해 나치-유신 체제로의 회귀를 강제하려 시도했다. 예술은 잠수함의 토끼와 같다는 오랜 격언이 현실로 입증되는 셈이다. 자유로운 공기의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술 영역에 대한 탄압 자체가 조만간 다가올 사회 전반의 질식에 대한 예고였던 것이다.

2023년 가을 청문회에서 보여준 유인촌의 블랙코미디 관련 대답 같은 기괴한 반응도 이런 예고의 징후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수많은 다른 질문들에 대해 시종일관 '이명박 정부에서는 블랙리스트가 없었다'는 문장을 반복했다. 진지하고 심각한 질문들에 대해 엉뚱하면서도 경직된 답변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기에 영락없는 블랙코미디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작성한 명단이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배제 작가 명단' 같은 한글 제목의 문건이었다면 "'배제 작가 명단'은 '블랙리스트'가 아니다"라는 기이한 주장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하얀 캔버스 하단에 파이프 그림을 그려 넣고 상단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써놓았던 저 유명한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적인 발상을 정치적으로 '패스티시(혼성모방)'하여 청문회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블랙리스트가 정말 없었다면 과연 자신들과 정치관이 다른 이들의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제한'할 수 있었을까? 소위 '불온 작가 명단'이 없었다면 심사 대상이 되는 수천수만 가지 작품들의 다양한 표현 방법과 소재나 주제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판단과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을 일치시킬 뾰족한 방법이 없게 된다. 배제하려는 작가가 포함되고 또는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블랙리스트가 암암리에 통용되던 이명박-박근혜 시대와는 달리 이미 큰 문제로 대두된 새로운 상황에서 블랙리스트 없이 특정 작가를 배제할 수 있는 실효적 방법이 없을까?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고민했는지 최근 문화부는 '책임심의제'라는 제도를 새로 도입했다. 해마다 바뀔 수밖에 없는 다양한 분야의 심사에 일회적으로 참여하는 수많은 심사위원들에게만 의존하는 대신 각 지원 기관 소속이 전담 직원 1인이 심사에 함께 참여하여 전문성과 책임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를 미리 알고 있는 전담 직원이 잘 유도할 수 있다면 수많은 심사위원들에게 블랙리스트를 노출시킬 위험 부담 없이도 자신들의 뜻을 관철할 이점이 있다. 그 유도가 당장은 100% 관철되기 어렵겠지만. 전담 직원이 심사위원들의 성향을 잘 파악해 지속적으로 관리한다면 보장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결함, 이번 기회에 바로 잡아야

지난 14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여의도공원에 모여있던 시민들이 기뻐하고 있다.권우성

이번 '12.3 사태'는 광주항쟁과 6월항쟁을 통해 피와 땀으로 구축해 낸 한국의 민주주의가 대통령에 의해 하루아침에 붕괴할 수도 있다는 경악스러운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지난 45년 동안 1인당 국민소득 기준으로 30배 이상 성장해 온 한국 자본주의의 압축성장에 모두가 시선을 빼앗기는 동안 세계적인 모범으로 간주되어 온 한국의 민주주의가 갑자기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이번 일을 통해 드러난 두 가지 결함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말이다.

1) 먼저 자본주의적인 성장(A)과 민주주의적인 성숙(B)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에 대한 국민적 인식 강화가 시급하다. 지난 20년 사이에 연이어 등장한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정권은 이들에게 투표했던 국민들의 마음에서 세월이 지나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쉽게 잊히고 후자(B)가 전자(A)로 환원되기 쉽다는 점을 잘 드러냈다. 하지만 군부 주도 개발독재 시대, 1인당 국민소득이 천 불 단위에 불과했던 시대에 배양되었던 이런 식의 경제만능주의는 이제는 정말 시대착오적인 망상에 불과해졌다.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적하듯, 1인당 국민소득 3만 5000불이라는 선진국 수준의 경제성장의 지속 가능성 여부는 열린 개방성과 창의성을 요구하며 이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 및 문화 다양성을 촉진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로부터 나온다. 경제적 생산양식의 발전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확대‧축소 재생산 기능을 조절하는 정치적 통치 양식의 성숙 없이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번 12.3 사태는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오른 한국 사회가 새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그동안 형식적인 절차 정도로 간주해 온 민주주의의 중요성과 그 취약성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함을 잘 보여준다.

당장 정당과 정치인에게 투표할 때 자본주의적 성장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성숙을 함께 결합해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00년 총선에서 처음 시도했던 '낙선운동'과 같은 방식을 체계적으로 상설화하여, 위헌과 위법을 일삼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거나 교란한 정치인들, 소수자의 주권 행사를 방해하고 탄압한 정치인들을 다음 선거에서 반드시 퇴출해야 한다.

2)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실질적으로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국민적 인식의 강화와 정치인들에 대한 책임 추궁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교란한 공직자들에 대해서도 엄중한 평가와 책임 추궁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번 12.3 사태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공직자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과 책임이 이루어져야 이후에도 유사한 사례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 12.3 사태의 돌발은 그간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과 처벌이 모호하게 이루어졌던 데에 그 뿌리가 있다. 내란수괴와 그 공범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엄중한 법적 처벌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던 탓이다.

사실 죄는 있으나 벌이 없는 이런 모순은 친일 부역 잔재와 군부독재 잔재의 실질적 청산을 방해해 왔다. 그리고 그 잔재들이 단절 없이 승계되어 오늘의 내란정당으로 수렴되어 있다. 차제에 이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70~80년대 악랄했던 국가폭력 집행자들의 상당수가 그래왔듯이, 지난 10여 년 동안 블랙리스트 국가범죄를 집행했다는 의혹을 가진 자들이 윤석열 정부에 들어와 버젓이 부활해 이제는 내란범죄를 지지하고 있듯이, 오늘의 내란수괴와 그 공범들도 시간이 지나면 활개 치며 민주주의를 다시 교란할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미뤄진 '블랙리스트 특별법'을 어떻게 하루속히 제정할 수 있을까? 부정부패로 얼룩진 행정부만이 아니라 사법부와 검찰 공직자들이 어떻게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도록 제도화할 것인가? 나아가 모든 분야의 상급 공직자의 임기 중 국민들이 정기적인 평가를 통해 소환하거나 해고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다 보면 현재 대의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수많은 공백과 결함들을 어떻게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새롭게 보완할 것인가와 같은 심층적인 질문들이 떠오른다. 이런 과정에서 적합한 해결책을 찾아내어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창조해 내는 일은 이번 12.3 사태가 다시 열어놓은 '광장의 정치'에 제기된 역사적 책무라 할 수 있다. 2016년 촛불이 열었던 광장의 정치가 문재인 정권 창출이라는 협소한 지평으로 환원되고 말았던 역사적 과오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한 광범위한 국민적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14일 국회에서의 대통령 탄핵 표결 가결은 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명예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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