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전,란> 스틸컷.
장지혜
첫째, 군주 혹은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 <전,란>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를 배경으로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노비 천영(강동원)이 선조(차승원)를 따르는 고위 무관과 의병 혹은 반란군으로 맞서는 서사를 뼈대로 한다. 두 인물의 형상화나 그들이 맺는 관계는 상투적이고 납작하다. 하지만 조선 역사상 최악의 군주 중 한 명인(다른 두 명은 인조와 고종이라고 생각한다) 선조(차승원)의 형상화는 눈에 띈다.
실제 역사와 영화 속 선조의 모습이 다르다고 비판하는 건 초점을 벗어난 것이다. 군주가 신하와 백성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 점만 보면 된다. <전,란>에서 그래도 좋게 본 것은 선조라는 한심한 군주와 그런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를 지키려는 의병의 대립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타락한 내부 권력이 침공한 외적인 일본군(왜군)보다 더 문제라는 걸 영화는 뾰족하게 드러낸다. 임진란을 다룬 기존 영화에서는 주목하지 않은 점이다. 선조는 백성이 경복궁을 불태우는 걸 보면서 "누가, 왜?"라고 묻는다. 나라는 엉망인데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길에 받은 밥상이 부실하다고 탓한다. 전쟁 뒤에는 불탄 경복궁을 600칸이 아닌 6000칸으로 짓자고 우긴다.
그런 군주는 <글래디에이터2>에도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 로마 제국을 몰락의 길로 이끌었던 형제 황제였던 카라칼라(프레드 헤킨저)와 게타(조셉 퀸)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누미디아(현재의 알제리와 튀니지를 포함하는 북아프리카 지역)를 정복하고 돌아온 아카시우스 장군(페드로 파스칼)에게 영토 확장을 위한 새로운 전쟁의 지휘를 명령한다. 아카시우스는 더 이상의 전쟁은 로마에 도움이 안 된다고 반대한다. 동생 게타를 죽이고 단독 황제가 되어 원숭이를 제1 집정관으로 임명하는 카라칼라에게 권력은 쟁취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그에게 로마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안목은 없다.
둘째, 군주와 장군. 졸렬한 수준의 군주는 누가 충신이고 간신인지를 분별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보다 뛰어난 신하나 장군을 용납하지 않는다. 많은 인기를 얻는 이순신 장군을 다룬 영화 <명량>. <한산>, <노량> 등이 보여주듯이 저급한 수준의 왕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부상하는 걸 원치 않는다.
영화 <올빼미>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아들을 시기, 질투하는 인조의 모습이 나온다. 선조가 구국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 살아서 돌아오길 원하지 않았기에 이순신의 죽음에는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판단이 작용했다고 나는 판단한다. <전,란>에도 그런 인물이 나온다.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운 김자령 장군(진선규)이다. 김자령 캐릭터는 실제 전라도 지역에서 활약한 양반 출신 김덕령 의병장을 모델로 한 캐릭터라고 하는데, 그를 대하는 선조의 모습은 역시 바람직한 군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전쟁이 끝나고 김자령이 왕을 만났을 때 선조는 "순신은 죽었는데 자령은 왜 살아있는가"라며 묻는다. 그렇게 걸출한 인물은 제거된다.
<글래디에이터2>에서 자령과 비슷한 운명을 겪는 인물은 아카시우스 장군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글래디에이터1>의 주인공인 로마의 영웅이자 최고 검투사였던 막시무스의 숨겨진 아들인 루시우스(폴 메스칼)이지만, 나는 루시우스 캐릭터에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루시우스는 아버지 막시무스가 걸었던 행보를 거의 똑같이 걸어간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막시무스이고 루시우스는 막시무스의 그림자처럼 보인다.
오히려 주목할 인물은 1편에서 막시무스의 부하였던 아카시우스와 영화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검투사 운영자이자 음모가인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다. 로마 황제 중 처음으로 황제의 핏줄을 타고나지 않았고 원로원 출신도 아닌 황제였던 마크리누스 황제를 모델로 했지만, 이 인물은 전혀 다른 캐릭터다. 형제 황제는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아카시우스를 콜로세움에서 죽음으로 내몬다. 그러나 어리석은 황제들은 마키아벨리스의 면모를 갖춘 인물이자 명분이 아니라 오직 힘의 정치를 믿는 인물인 마크리누스에게 제거당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랐던 군주의 운명이다.
영화의 결말은 마크리누스와의 결투 끝에 승리한 루시우스가 그의 할아버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목표로 삼았던 로마의 꿈을 다시 세우자는 멋진 말로 끝난다. 나는 그 장면에서 희망보다는 공허감을 느꼈다. 루시우스가 꿈꾸는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그래서 황제가 단지 제 1시민의 위상을 지녔던 초기 로마 제국의 모습을 복원하자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그 위상이 제 1시민이든 실질적 권력자이든 카라칼라, 게타 같은 군주가 다시 등장할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이 질문을 우리 시대 대중민주주의의 리더십 선출 과정에도 던진다.
시민에게 고통 주는 권력자,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