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18 06:53최종 업데이트 24.12.18 06:54
  • 본문듣기
이번 학기에 셰익스피어를 강의하고 있다. 어려운 것은 질색인 풍조에서 몇백 년 전의 쉽지 않은 영어로 쓴 셰익스피어 작품을 가르치는 것은 만만치 않다. 하지만 학생의 평가와는 별개로 강의자로서 고전의 힘을 실감한다. 고전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작품에 관해 막연히 가진 인상과 실제 작품을 꼼꼼히 읽어본 실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 비극 중 최고작품이라고 판단하는 <리어왕>은 통상 못된 딸들에게 버림받은 왕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보다 약 백 년 정도 앞서 활동했던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근거해 아버지와 딸의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 공적인 왕의 역할,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시각에서 작품을 읽어보면 무능하고 한심스러운 리어왕의 면모가 새롭게 부각된다.


그리고 무능한 왕 혹은 지도자는 <리어왕>의 결말이 보여주듯이 한 국가의 쇠락을 초래한다. 이런 지도력의 문제가 단지 왕권 국가에서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다. 오래전 읽은 책의 한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인류는 수많은 정치 체제를 시험해 왔지만, 단 한 번도 지도자가 없는 정치 시스템은 가져본 적이 없다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대의민주제와 선거제에 입각한 현대 대중민주주의라고 예외는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지도자가 대중의 순간적 판단에 따라 권력을 잡고 대중의 삶을 위협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묻게 된다. 민주주의에서 주권자인 시민과 권력을 위임받은 행정, 입법, 사법부 대표자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민주주의에서 바람직한 지도자상(리더십)은 무엇인가?

영화 <전,란>과 <글래디에이터2>를 보면서도 묻게 되는 질문이다. 나는 두 영화를 볼까 말까 주저했다. 관람평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위의 질문에 대해 던져준 생각거리를 살펴보고 싶다.

한심한 군주의 운명

넷플릭스 <전,란> 스틸컷.장지혜

첫째, 군주 혹은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 <전,란>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를 배경으로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노비 천영(강동원)이 선조(차승원)를 따르는 고위 무관과 의병 혹은 반란군으로 맞서는 서사를 뼈대로 한다. 두 인물의 형상화나 그들이 맺는 관계는 상투적이고 납작하다. 하지만 조선 역사상 최악의 군주 중 한 명인(다른 두 명은 인조와 고종이라고 생각한다) 선조(차승원)의 형상화는 눈에 띈다.

실제 역사와 영화 속 선조의 모습이 다르다고 비판하는 건 초점을 벗어난 것이다. 군주가 신하와 백성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 점만 보면 된다. <전,란>에서 그래도 좋게 본 것은 선조라는 한심한 군주와 그런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를 지키려는 의병의 대립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타락한 내부 권력이 침공한 외적인 일본군(왜군)보다 더 문제라는 걸 영화는 뾰족하게 드러낸다. 임진란을 다룬 기존 영화에서는 주목하지 않은 점이다. 선조는 백성이 경복궁을 불태우는 걸 보면서 "누가, 왜?"라고 묻는다. 나라는 엉망인데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길에 받은 밥상이 부실하다고 탓한다. 전쟁 뒤에는 불탄 경복궁을 600칸이 아닌 6000칸으로 짓자고 우긴다.

그런 군주는 <글래디에이터2>에도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 로마 제국을 몰락의 길로 이끌었던 형제 황제였던 카라칼라(프레드 헤킨저)와 게타(조셉 퀸)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누미디아(현재의 알제리와 튀니지를 포함하는 북아프리카 지역)를 정복하고 돌아온 아카시우스 장군(페드로 파스칼)에게 영토 확장을 위한 새로운 전쟁의 지휘를 명령한다. 아카시우스는 더 이상의 전쟁은 로마에 도움이 안 된다고 반대한다. 동생 게타를 죽이고 단독 황제가 되어 원숭이를 제1 집정관으로 임명하는 카라칼라에게 권력은 쟁취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그에게 로마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안목은 없다.

둘째, 군주와 장군. 졸렬한 수준의 군주는 누가 충신이고 간신인지를 분별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보다 뛰어난 신하나 장군을 용납하지 않는다. 많은 인기를 얻는 이순신 장군을 다룬 영화 <명량>. <한산>, <노량> 등이 보여주듯이 저급한 수준의 왕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부상하는 걸 원치 않는다.

영화 <올빼미>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아들을 시기, 질투하는 인조의 모습이 나온다. 선조가 구국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 살아서 돌아오길 원하지 않았기에 이순신의 죽음에는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판단이 작용했다고 나는 판단한다. <전,란>에도 그런 인물이 나온다.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운 김자령 장군(진선규)이다. 김자령 캐릭터는 실제 전라도 지역에서 활약한 양반 출신 김덕령 의병장을 모델로 한 캐릭터라고 하는데, 그를 대하는 선조의 모습은 역시 바람직한 군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전쟁이 끝나고 김자령이 왕을 만났을 때 선조는 "순신은 죽었는데 자령은 왜 살아있는가"라며 묻는다. 그렇게 걸출한 인물은 제거된다.

<글래디에이터2>에서 자령과 비슷한 운명을 겪는 인물은 아카시우스 장군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글래디에이터1>의 주인공인 로마의 영웅이자 최고 검투사였던 막시무스의 숨겨진 아들인 루시우스(폴 메스칼)이지만, 나는 루시우스 캐릭터에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루시우스는 아버지 막시무스가 걸었던 행보를 거의 똑같이 걸어간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막시무스이고 루시우스는 막시무스의 그림자처럼 보인다.

오히려 주목할 인물은 1편에서 막시무스의 부하였던 아카시우스와 영화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검투사 운영자이자 음모가인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다. 로마 황제 중 처음으로 황제의 핏줄을 타고나지 않았고 원로원 출신도 아닌 황제였던 마크리누스 황제를 모델로 했지만, 이 인물은 전혀 다른 캐릭터다. 형제 황제는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아카시우스를 콜로세움에서 죽음으로 내몬다. 그러나 어리석은 황제들은 마키아벨리스의 면모를 갖춘 인물이자 명분이 아니라 오직 힘의 정치를 믿는 인물인 마크리누스에게 제거당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랐던 군주의 운명이다.

영화의 결말은 마크리누스와의 결투 끝에 승리한 루시우스가 그의 할아버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목표로 삼았던 로마의 꿈을 다시 세우자는 멋진 말로 끝난다. 나는 그 장면에서 희망보다는 공허감을 느꼈다. 루시우스가 꿈꾸는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그래서 황제가 단지 제 1시민의 위상을 지녔던 초기 로마 제국의 모습을 복원하자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그 위상이 제 1시민이든 실질적 권력자이든 카라칼라, 게타 같은 군주가 다시 등장할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이 질문을 우리 시대 대중민주주의의 리더십 선출 과정에도 던진다.

시민에게 고통 주는 권력자, 어떻게 해야 할까

<글래디에이터 2> 스틸컷롯데엔터테인먼트

셋째, 군주와 백성 혹은 시민. 대중민주주의의 토대는 주권자인 시민이 어리석은 군중(우중)이 되지 않을 때만, 오래전 함석헌 선생이 일갈했듯이 '생각하는 백성'이 될 때만 단단해진다.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시민은 언제나 옳다'는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가 힘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글래디에이터2>에서 장대하게 펼쳐지는, 혹은 눈요기로 제시되는 콜로세움의 격투 장면에 환호하는 로마 시민의 모습에서 그런 포퓰리즘의 힘을 확인한다. 영화에서 원로원 의원들이 비꼬듯이 말하듯이 관중은 검투사가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고 더 많은 자극을 원한다. 카라칼라와 게타는 그 점을 잘 활용한다. 이런 모습이 단지 야만적인 고대 시절의 에피소드에 불과할까? 만약 우리 시대에 로마 시대처럼 칼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목숨을 건 결투, 우승자에게 막대한 상금을 주는 검투사 경기가 벌어진다면 어떨까?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오징어 게임>은 우리 시대의 검투사 경기를 흥미롭게 보여준 게 아닐까?

물론 리들리 스콧 감독은 대중을 그렇게만 보지는 않는다. 영화의 뒷부분에서 아카시우스를 죽이려는 황제에 맞서 격렬한 항의와 시위를 벌이는 로마 시민의 모습에도 관심을 둔다. 어쨌든 대중은 그렇게 하나의 모습으로 잡히지 않는다. <전,란>의 도입부는 정여립의 대동계(양반과 천민을 따지지 않고 평등하게 참여한 조직)를 소개하며 정여립의 죽음과 잔당 색출의 모습을 보여준다.

감독은 영화 제목을 전란(戰亂)으로 하지 않고 굳이 '전'과 '란' 사이에 쉼표를 넣은 이유를 전쟁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신분제가 흔들리는 혼돈을 담아내려는 의도였다고 설명한다. 그런 의도가 설득력 있게 관철되었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화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느냐는 질문과는 별개로, 왕은 임금과 노비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느냐고 묻고, 지배층은 양반의 피와 노비의 피는 다르다고 철석같이 믿는 시대에서,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왕에게 강력히 항의하는 백성의 모습을 통해 왕과 백성의 관계를 묻는다.

강력한 군주가 통치했던 시대에도 백성, 혹은 시민을 무시하고 무책임했던 왕들은 거센 저항에 부딪혔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렇다면 선거를 통해 대의 권력을 위임받은 개인이나 집단이 민주주의 정신을 배신하고 주권자인 시민에게 고통과 좌절감과 분노를 유발한다면 그런 권력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화의 만듦새로는 별로인 <전,란>과 <글래디에이터2>를 보면서 갖게 되는 질문이다.

추신: 초고를 완성하고 퇴고를 하는 시점에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내란 사태가 벌어졌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민주공화국의 국헌을 파괴하려 시도한 내란 우두머리는 탄핵되었다. 모든 내란 가담자는 철저한 조사를 거쳐 엄벌에 처해야 한다. 민주공화국을 지켜야 한다.

지난 12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 관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가운데,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생중계를 시청하고 있다.권우성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
  翻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