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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한식(寒食)의 유래 - 개자추, 할고봉군(割股奉君)

2024.12.21. 오전 10:27

개자추(介子推)는 일명 개지추(介之推)라고 불린다. 그는 진(晉) 문공(文公)의 신하로 진(晉) 헌공(獻公)의 부인 여희(驪姬)가 국정을 어지럽힐 때, 진 문공과 함께 망명 생활을 하며 고생하였던 충신이다.

진 문공과 함께 적나라로 도피한 신하 5명이 바로 호언·호모·조최·선진·개자추 등이었다. 개자추는 19년 동안 진 문공과 전국 각지를 떠돌면서 망명 생활을 하였지만, 이들의 목표는 진나라로 귀국하여 국정을 바로잡는 것이었기에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그중에는 배신자도 있었다. 진 문공이 위나라 경계에 머무를 당시, 진 문공 일행이 가지고 있던 식량이 바닥난 적이 있었다. 두수(頭須)는 머리도 좋고 계산 능력이 좋아서 진 문공이 총애하던 신하였으나, 주군을 배신하고 먹을 것과 돈을 챙겨 달아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진 문공과 신하들의 굶주림은 배가하였다. 그러나 개자추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굶주린 주군의 배를 채워주었다. 그렇게 개자추가 헌신적 충성을 보였기에, 후대의 사관들은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여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할고봉군(割股奉君)이다.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굶주린 주군을 먹여 살렸다는 뜻으로 헌신적인 충성을 의미하는 고사성어이다.

진 문공이 다시 진나라로 돌아가 제후가 되었지만, 개자추는 거기에 부합되는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즉, 논공행상에서 개자추를 제외한 4명은 높은 벼슬과 큰 상을 분배받았다. 이 과정에서 서로가 자신의 공이 높다며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탐천지공(貪天之功)이라고 하는 고사성어도 나왔다. 탐천지공은 하늘의 공을 탐낸다는 말로, 남의 공을 가로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논공행상에서 빠진 개자추는 그것에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공을 높이려 다투는 이들을 혐오하였다. 그리고 그는 초연히 늙은 어머니와 함께 면산으로 들어가 신분을 감추고 조용히 살았다.

이후에 진 문공은 개자추의 충성심을 잊고 있었다가 문득 생각해 내고 그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개자추는 이미 면산으로 들어간 지 오래 되어 행방이 묘연하였다. 이에 진 문공은 그를 면산에서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았다. 산이 전소된 후에 살펴보니 개자추는 어머니를 업은 채로 나무를 붙들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때서야 진 문공은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진 문공은 개자추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매년 그의 기일에는 뜨 거운 음식을 먹지 않고 차가운 음식만 먹도록 하였다. 이날이 바로 한식(寒食)의 유래이다. 개자추에 관한 이야기는 『열국지』 제27회부터 제37회까지에 나온다.

그리고 진 문공은 개자추가 붙들고 죽었던 나무로 신발 밑바닥을 만들어 신었으며 죽는 날까지 그를 그리워하였다고 한다. 그의 은공(恩功)이 생각날 때마다 그 신발을 보며 “발아래 있는 그대를 생각하니 슬플 따름이다.(悲乎, 足下)”라고 말하였는데, 여기에서 개자추가 자신의 발아래에 있다는 말로 ‘족하’(足下)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진 문공을 살린 개자추는 이렇게 죽었지만, 정작 돈과 식량을 챙겨 달아난 두수는 진 문공이 제후로 즉위하자 뻔뻔하게 다시 궁궐에 나타났다고 한다. 진 문공이 분노했지만, 두수는 자신이 나라를 살리는 데 충성을 다하겠다며 용서를 구하였다. 결국, 진 문공은 그를 살려주고 또 후한 벼슬까지 내렸다. 이 기회를 타고 두수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부귀영화와 천수를 다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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