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석유의 시대가 열리면서 굴곡진 중동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은

2024.12.15. 오후 11:03

석유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탐욕과 굴곡진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오해부터 풀어야 할 겁니다. 석유는 ‘발견’이 아닌 ‘발명품’이란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석유류 자원을 처음 발명한 국가는 미국입니다. 물론 문헌 기록들을 찾아보면, 로마제국, 페르시아, 일본, 인도,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도 석유를 조명으로 사용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석유의 직접적인 발명가는 859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시추 기술자인 에드윈 드레이크(Edwin Laurentine Drake)입니다. 19세기 이전까지 등불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연료는 고래기름(whale oil)과 석탄에서 추출한 기름(coal oil)이었습니다. 이들 원료에 비해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는 대체 조명용 원료 개발은 전 세계적인 화두였습니다. 시추 기술자인 에드윈 드레이크(Edwin Laurentine Drake)는 땅을 굴착하여 원유를 발견하는 데 성공합니다. 에드윈 드레이크 이전에도 석유를 사용한 적은 있었지만, 그는 유전 개발을 통한 석유 대량 공급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자연상에 존재하는 원유를 채굴하고 이를 석유로 정제하여 사용하는 방식을 처음 제시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석유의 시대를 처음 제시한 국가는 미국으로 꼽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석유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화두를 제시한 것은 오히려 영국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었습니다. 1911년 영국 해군 장관이었던 처칠은 1차 세계대전의 전운을 감지합니다. 그는 독일의 해군력 증강 기조를 견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독일의 해군력에 비해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영국 함대를 석탄이 아닌 석유를 기반으로 운행되는 함대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석유는 석탄보다 에너지 효율이 높은 자원입니다. 따라서 석유는 석탄에 비해 동일한 부피만큼 선적했을 때, 더 높은 열량을 발휘하여 군함의 속도를 높이거나 작전 반경을 늘릴 수 있습니다. 처칠이 석유에 주목하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자체적으로 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은 석유를 원활히 수급할 수 있는 중동지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국은 중동 지역의 석유 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중동의 많은 토후국들의 갈등과 반목을 조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국가가 사우디아라비아입니다.

현재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지구상에 그런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아라비아 반도는 1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영토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 영국은 중동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라비아 반도의 여러 부족과 토후국을 지원하여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아라비아 반도는 여러 부족과 토후국이 난립하게 되었고, 이러한 혼란을 틈타 사우드 왕가가 주변 부족과 토후국을 정벌하여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라는 국가를 세웁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페르시아 지방의 원유에도 관심을 보입니다. 오늘날 이란 지역에 해당하는 페르시아 지역이 막대한 유전을 보유한 곳임을 확인한 영국은 이란 지역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팔레비 왕가가 해당 지역을 장악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그리고 팔레비 왕가를 통해 이란 지역의 석유 개발권을 확보하여 BP를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중동의 만성적인 분란은 영국의 무리수 때문

영국이 당시 중동지역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무리수를 두었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중동지역에서 체결한 다양한 국제 조약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쉽게 확인 가능합니다. 영국은 1917년 벨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통해 중동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발표합니다. 밸푸어 선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 우간다 지역에 유대인들의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이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벨푸어 선언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위치가 변경된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 벨푸어 선언의 내용은 불과 2년 전에 발표한 맥마흔 선언(McMahon Declaration)의 내용과는 정면으로 충돌되는 것이었습니다. 맥마흔 선언 당시에는 중동 지역의 많은 토호 국가들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해당 지역은 아랍국가가 건설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천명한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맥마흔 선언 이후 중동의 많은 지역들이 토후국가 간의 싸움으로 혼란스러워졌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세계대전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의 지원이 필요하게 된 영국은 벨푸어 선언을 통해 이전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영국은 벨푸어 선언과 맥마흔 선언 중간인 1916년에는 프랑스와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을 체결하여 아라비아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르면, 영국은 요르단 강 사이 해안 지역, 요르단, 이라크 남부 등의 항구 지역을 얻었으며 지중해에 대한 점유권을 가지게 됩니다. 반면, 프랑스는 터키 남동부, 이라크 북부, 시리아, 레바논 지역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이후에는 앞서 언급한 1944년 영미석유협약(Anglo-American Petroleum Agreement)에 따라 중동 지역의 석유는 미국과 영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됩니다.

영미석유협약 이후 영국과 미국은 각각 4명씩 총 8명으로 구성된 국제석유위원회(International Petroleum Commission)를 구성합니다. 영국과 미국은 이 기구를 통해 세계 주요 산유국의 생산량을 결정하고, 이를 통해 시장 가격을 결정하기로 합의합니다. 이후 영국과 미국의 밀월관계로 인해 영국계, 미국계 석유 관련 기업들은 세계 최대 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엑손모빌, BP, Shell, 셰브런 등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일쇼크 이후 중동국가들로 하여금 OPEC를 설립해 국제적으로 석유 가격을 통제하는 방식에 커다란 힌트를 준 것은 영미석유협약으로 인한 국제석유위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중동국가들은 국제석유위원회를 통해 석유 가격을 통제해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미국과 영국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자신들도 저와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중동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나라는 이란이었다.

프리미엄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박정호 교수의 여의도멘션 구독으로 더 많은 콘텐츠를 만나보세요!

  翻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