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시간 만에 다시 누운 침대는 '다시는 일어나지 말라' 는 유혹을 하고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일어나야지.
그래도 좁은 승합차에서 보낸 지난 밤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오늘은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더 잘 수 있도록 시간을 맞췄다.
그래봐야 아침 10시에는 나가야되긴 하는데. 그게 어디야.
역시나 프로도는 진작 일어나서 준비를 거의 마쳤다.
너 안 피곤하니?
아무리 나보다 조금 먼저 잠들기는 했지만...
프로도도 사람이었다. 해가 지고나면 급격히 헤롱대고는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부터 '이따 스피어 볼 때 자면 안되는데'를 연신 말했다.
그래 맞아.
오늘은 이 여행의 거대한 근본이자 목표.
스피어 Sphere 를 보러 가는 날이다.
스피어 관람은 19시에, 인당 16만원의 거금을 들여 예매를 했다.
그 전에, 우리는 라스베가스 스트립의 주요 호텔들을 돌아다니며 호텔 투어를 할 생각이다.
라스베가스에는 다들 알다시피 엄청난 브랜드의 호텔들이 있고
가장 접근이 용이한 1층 로비 옆 카지노를 포함하여
딱 봐도 '돈을 얼마나 쓴 거야' 소리가 나오는 특징들이 많다.
호텔 투어에만 이틀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우리는 반나절 만에 완료해야 한다.
그나마 편한 날이라고 하는 일정인데도, 꽤나 빡센 일정이다.
휴식은 한국에서 하기로 했으니까...
(근데 귀국 10시간 후에 출근해야 하는데...)
자, 출발.
시작은 라스베가스에서 컨셉 하나로 버티고 있는 플라밍고 호텔이다.
위치가 아주 좋으며, 가격이 아주아주 좋다.
조금 노후화되고, 호텔 자체에서 할 것이 별로 없는 점이 단점.
한국 사람들은 보통 친구끼리 가거나, 아니면 그랜드 캐니언 가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짐을 맡기는 정도로 사용을 하는 듯하다.
현재 구역을 나눠 조금씩 리모델링을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호텔의 특징은 '플라밍고'다.
무슨 소리냐면, 이 호텔에서는 플라밍고를 키운다.
각 호텔마다 컨셉을 가지고 꾸며놓은 보타닉 가든으로 가면
여러 마리의 플라밍고가 건방지게 짝다리로 서 있다.
그래서 플라밍고 호텔이고, 상징색은 분홍색이다.
사실 호텔 투어가 으레 이렇다.
그냥 그 호텔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것을 한번 보고, 나오는 것이다.
카지노 구경 좀 하고, 로비 구경 좀 하고.
그런데 수많은 호텔이 있고 한 호텔에 30분씩만 해도 금세 몇 시간은 지나간다.
호텔을 하나하나 전부 설명할 수는 없으니,
그냥 주요 호텔들만 이야기하자면
분수쇼로 유명한 벨라지오 호텔은 보타닉 가든으로도 유명한데
이미 크리스마스 준비가 마쳐져 있었다.
로비에 있는 유리 공예도 유명하다.
에펠탑과 개선문이 있는 파리 호텔
벨라지오 분수쇼를 객실에서 관람이 가능해서 신혼여행 커플이 많이 간다는 코스모폴리탄 호텔
(재주는 벨라지오가 넘고, 돈은 코스모폴리탄이 버네)
크롬웰, 플래닛 할리우드, 파크MGM도 관람했다.
그리고, 스트립 메인 거리에서 가장 아래쪽에 떨어져 있지만
또 그만큼 돈을 많이 쓰고 유명한
뉴욕-뉴욕 호텔과 그랜드 MGM 호텔,
이탈리아 전체를 컨셉으로 하는 시저 CEASER 호텔이 있다.
심지어 뉴욕 뉴욕 호텔은 정말 뉴욕에서 유명한 건물들 외관으로 호텔을 지었고
(크라이슬러 빌딩,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자유의 여신상 등)
호텔 내부와 외부를 운행하는 롤러코스터까지 있다.
약 10개의 호텔을 도는 데에 3시간 정도가 걸렸다.
거의 카지노만 들렀다가 5분 안에 나온 호텔도 많고
디테일하게 보지 않고 유명한 상징만 해치우고 나온 걸 생각하면 쉽지 않은 여정이었던 것은 맞다.
그래도 각 호텔마다 컨셉에 충실한 디테일들이 살아있고
'돈 쓴 티'가 팍팍 나기에 관광객 입장에서는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각 호텔을 다니며 해결해야 할 미션이 있었다.
이전 글에서 썼던 것처럼, 카지노 슬롯 바우처를 모으는 것이었다.
호텔 상점에서는 수 많은 기념품들을 팔고 있지만 종류가 다양하고, 금액도 비싸다.
처음에는 따로 기념판매하는 '카지노 칩'을 하나씩 사 모으려 했는데
호텔마다 상점 위치가 다르기도 하고, 가격도 쌓이면 비싸서
실제 슬롯을 해야만 나오는 바우처를 뽑기로 했다.
카지노는 못 찾을 수가 없으니까 시간도 빨리 가능하다.
* 이전 글을 보지 않은 사람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카지노에서는 현금을 넣고 게임을 하다가 잔돈이 남으면 다시 현금으로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현금으로 교환이 가능한 바우처를 인쇄해준다.
그 돈이 아무리 작게 남았어도 바우처를 주기 때문에 바우처야말로 어떻게 보면, 그 카지노에서 게임을 했다는 가장 직관적인 기념품이 되는 것이다.
처음 3개 정도의 호텔 카지노를 갔을 때는
당연히 내 돈 1달러 지폐를 넣고, 25센트 슬롯을 세 번 돌린 후에
0.25달러가 남았다고 찍힌 바우처 한 장을 인쇄하여 기념품으로 챙겼다.
이대로 10개가 넘는 호텔을 간다면, 10달러를 넘게 쓰게 되겠지.
그런데 네 번째 호텔 카지노에 갔을 때
이게 웬걸. 잔돈이 남아있는 슬롯이 있는 게 아닌가.
예를 들어, 한 판에 50센트짜리 슬롯이 있다고 해보자.
따고 잃고를 반복하다보면, 애매하게 40센트 정도가 남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어차피 한 판도 더 돌릴 수가 없으니 그냥 바우처를 출력해야 하는데
너무 작은 돈이라서 그냥 두고 가는 것이다.
하필이면 그게 프로도의 눈에 들어왔다.
프로도는 나에게 알려줬고, 나는 그대로 출력했다.
1달러를 쓰지 않고도 슬롯 바우처를 얻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우리는
그때부터 모든 카지노의 슬롯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잔돈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슬롯을 찾기 위해.
0.01달러여도 좋다. 금액이 아니라 그 바우처가 필요한 것이니까.
그리고 2시간이 지났을 때, 나와 프로도 가방에는
각각 3장의 [내돈내산] 바우처와
7장의 [남돈내산] 바우처가 차례대로 들어가 있었다.
사실, 그 1달러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했냐는 생각을 할 텐데
당연히 정말 1달러가 없어서, 1달러가 아까워서 벌인 짓은 아니었다.
그저, 재밌잖아.
비슷하고 담배냄새 나는 카지노를 휘저으며
매의 눈으로 둘이서 모든 슬롯의 남은 금액을 보고
남아 있으면 슬쩍 가서 CASH OUT 버튼을 누르는
'카지노 바우처 헌터 게임'을 참을 수 있는가?
나와 프로도는 참지 못했다.
한국인이 미국 카지노에서 남은 20원을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하여
그것이 절도죄라던가 점유이탈물횡령죄가 적용되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만약, 죄가 되는 행위였다면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합니다.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끝없는 자본주의 호텔들과,
이어서 세계에 몇 군데 없는 m&m's 매장과 코카콜라 스토어를 보고
이어서 '기묘한 이야기' 팝업스토어가 있어서 들어가봤는데
우리나라의 '굿즈 판매만을 위한 상술용 팝업'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그 콘텐츠 안에 들어온 느낌의 고퀄리티 팝업이었다.
분명 한국도 처음에 팝업들은 그런 콘셉트가 명확했는데
갈수록 남발되며 퀄리티가 매우 떨어진 느낌이 들어 아쉽다.
체험과 경험보다는 이슈와 판매에 집중한 느낌.
다시 한 번 자본주의를 경험한 후에
이제는 정말 점심을 먹어야 한다.
시간은 이미 오후 2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한 번도 의자에 앉지 못해서 무릎 뒤가 저려왔다.
라스베가스의 음식들은 비싸고, 그 가격대비 맛이 별로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누구인가.
네이버 블로그 몇 개 찾아보면 가격 괜찮고 맛있는 식당 한 두 개 찾는 것은 62초 정도면 충분하다.
그 중 하나가 유명한 프랜차이즈 '핫 앤 쥬시' Hot & Juicy 였다.
여러 메뉴가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비닐 봉다리에 새우와 옥수수, 감자를 넣고 쉐킷쉐킷 흔든다.
케이준 양념이나 갈릭버터 양념을 첨가하여.
2달러를 더 내면, 머리를 잃어버린 새우들로 주는데
블로그에서 노헤드 1파운드면 성인 2명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1파운드의 새우는 많았고 나와 프로도는 열심히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블로그도 간과한 점은,
우리가 굉장히 매우 배가 고프고 배 터지게 먹어본 적 없는 한국인 두 명이었다는 것.
머리 없는 좀비 새우들을 잔뜩 해치웠는데도
아직 빈자리가 남은 우리의 위장들은 'MORE ZOMBIE' 를 외쳤다.
무시할 수 없는 비명에 결국 1/2 파운드를 추가 주문했다.
이 정도 사치는 괜찮잖아.
공기밥 한 개까지 추가 주문해서 양념에 야무지게 비벼먹은 뒤에야
더 이상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계산해야지.
인당 23달러 정도가 나왔다. (약 32,000원)
우와. 싸긴 싸구나. 한국에서 새우를 이정도 먹으려면 얼만데. (진짜 모름)
배부르니까 또 움직여볼까.
메인 이벤트에서 잠드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호텔에서 10분 같은 1시간의 휴식을 취하고
이제 정말 대망의 메인 이벤트, 스피어를 보러 갈 시간이다.
거대한 크기 덕분에, 꽤 가까워 보였는데 막상 걸어가보니 생각보다 멀었다.
역시, F1 그랑프리 때문에 주요 도로들을 다 막아놔서 조금 돌아가느라고 더 멀게 느껴졌다.
우리가 가진 티켓은 저녁 19시에 관람이 시작된다.
열심히 걸어서 18시 20분쯤 스피어 앞에 도착했고 역시 사람이 많았다.
가까이에서 본 스피어는 그 LED 한 알 한 알의 간격이 예상보다 넓어서 신기했고
그럼에도 엄청난 화질에 그저 감탄만 뱉을 뿐이다.
스피어를 배경으로 사진을 좀 찍으려다가, 정신이 없어서 관람 후에 찍기로 하고 입장 건물로 들어갔다.
정체도 모르는 줄이 곳곳에 늘어져 있었는데
일단 그 중 가장 짧은 줄에 프로도를 세워놓고 그 줄의 정체를 알아보러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