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고 부수고 만들었죠”… ‘내 길’을 찾는 것 [주말특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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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10.26. 오전 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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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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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비브라포니스트 김예찬 인터뷰
무대에서 연주하는 김예찬씨의 모습. 김예찬씨 제공

거대한 실로폰처럼 생긴 악기의 건반을 하나둘 두드리면 청아한 음색이 흘러나온다. 곡의 박자를 책임지는 드럼 같은 존재면서, 피아노처럼 멜로디도 만들어 낸다. 재즈에서 주로 쓰이는 희귀 악기 비브라폰 이야기다. 국내서 재즈 비브라폰을 연주하는 뮤지션은 4~5명에 불과할 정도로 드물다.

그런 비브라폰 연주로, 재즈계에서 ‘라이징 스타’로 주목받고 있는 뮤지션이 있다. 클래식 음악을 하다 남들보다 조금은 늦게 재즈 음악과 사랑에 빠진 비브라포니스트 김예찬(28)씨다. 김씨는 지난해 색소포니스트 이수정, 보컬리스트 김유진 등과 함께 재즈계 유명 잡지 ‘재즈피플’이 선정하는 재즈 신예로 뽑혔다. 이어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20주년 무대에 섰다. 재즈계에 발을 들인 지 3년 만의 성과였다.

김예찬씨 프로필. 김씨 제공

최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김씨를 만났다. 그는 “운이 좋게도 필드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명 연주자들과 함께 할 기회가 많았다”며 멋쩍은 듯 웃었다. 트럼페터 최선배, 드러머 오종대, 피아니스트 이한얼 등. 모두 그가 한 무대에서 호흡을 맞춘 뮤지션들이다. 국내서 보기 드문 재즈 비브라포니스트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김씨는 “전 세계적으로도 재즈 비브라폰 연주자는 보기 힘든 편”이라고 설명했다. 유율 타악기에 속하는 비브라폰은 한 가지 음정만 내는 드럼(무율 타악기)과 달리 건반을 두드려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다. 생김새와 크기 때문에 클래식 마림바와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마림바는 페달이 없고 건반이 목재라서 울림이 일정한 반면, 건반이 쇠로 된 비브라폰은 피아노처럼 페달로 음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

김씨의 비브라폰. 김씨 제공

김씨는 원래 클래식 마림바 전공생이었다. 그는 어릴 적 다니던 교회에서 취미로 드럼을 배우며 음악을 시작했다. 처음엔 호기심 정도였던 음악에 대한 열정은 고등학교 2학년 때쯤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어 타악기 학원을 찾았다가 선생님의 권유로 클래식 마림바를 접했다.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선생님 말에 덜컥 전공의 길로 들어섰다.

김씨가 사는 대전과 학원이 있는 서울을 오가며 남들은 통상 1년에 걸쳐 익히는 클래식 입시곡 50개를 반년 만에 외웠다. 입시 준비 1년 6개월 만에 대학 입학에 성공했다. 그러나 막상 클래식 학도의 길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오케스트라의 일원인 클래식 연주자는 지휘자가 선정한 곡을 악보에 충실하게 구현하는 연습을 해야 했다.

그제야 처음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고집부리면서도 “왜 음악이 하고 싶은 건데?”라는 아버지의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왜 하고 싶은지는커녕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입학 3년 차에 해군 군악대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실용음악 전공자들과 소통하며 재즈에 눈을 떴다. 마림바 대신 재즈에 자주 쓰이는 비브라폰을 배우겠다며, 당시 가장 유명했던 비브라포니스트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재즈로 어떤 걸 하고 싶냐”는 질문에 또 답하지 못했다.

해군 군악대 시절의 김씨. 김씨 제공

김씨는 그제야 스스로 외면했던 진실을 받아들였다. 공부가 재미없어 음악을 택했고, 클래식이 싫어 재즈로 전향했다. 정말 무엇을 원했다기보단, 상황에 맞춰 갈 길을 골랐던 것이다. 김씨는 다시 길을 닦기로 했다. 군 제대와 동시에 대학을 자퇴했다. 여태 익혀온 클래식의 어법을 깨부수고, 재즈로 말하는 법을 다시 배웠다. 꼬박 1년을 배우고서 24살 나이에 후발주자로 다시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진학했다.

무대에서 연주하는 김씨의 모습. 김씨 제공

재즈 뮤지션은 자신의 솔로 파트 때 곡의 코드에 맞춰 즉흥연주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피아노의 솔로를 받아 드럼이, 드럼의 솔로를 받아 베이스가 즉흥연주로 ‘말’을 한다. 악기의 순서는 상관없다. 악보를 따라야 하는 클래식과 정반대로, 뮤지션들이 자신의 즉흥연주로 ‘대화’하며 연주가 흘러간다. 김씨는 “글씨를 아주 아름답게 쓰는 방법(클래식)만 연습하다가 갑자기 글로 저만의 이야기(재즈)를 전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시기를 견디는 게 힘들었어요. 나름 클래식을 잘하고 있다가 완전히 초보로 돌아가서 말하는 방법부터 다시 배워야 하니 그 틀을 깨는 게 고통스러웠죠.”

화성학 등 이론부터 차근차근 익힌 뒤 겨우 ‘재즈를 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됐나 싶어졌을 때 김씨는 그동안 답하지 못한 질문을 다시 마주했다. 난 음악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우선 피아노, 베이스, 드럼 등 곡에 자주 쓰이는 악기들과 달리 희귀 악기인 비브라폰은 불러주는 공연이 거의 없었다. 공연이 없다는 건 뮤지션으로서의 경력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과 같았다.

길은 하나였다.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 김씨는 아예 비브라폰을 중심으로 한 재즈 콰르텟(4중주), ‘포레스텟(Forestet)’을 결성했다. 포레스텟은 숲(Forest)에 콰르텟(Quartet)을 더한 말이다. 김씨는 “자연처럼 꾸밈없고, 순수하고,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것에 집중하는 그룹”이라고 말했다.

포레스텟 멤버들. 왼쪽부터 홍승민(베이스), 김예찬, 김선빈(드럼), 나도윤(피아노). 김씨 제공

김씨는 현재 비브라포니스트가 아닌 다른 재즈 뮤지션과 비교해도 무대에 많이 서는 편이다. 불러줄 공연을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공연을 만들어 낸 결과다.

“연주할 때 그 순간의 감정에 집중하기보다 보여주기에 급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조금 덜 화려하고, 조금 덜 있어 보여도 솔직한 음악을 하고 싶어요. 누군가에게는 심심할지 몰라도 제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드러내는 음악이요.”

제21회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오른 포레스텟 멤버들. 김씨 제공

700만원대에 달하는 악기를 매번 조립하고 해체하며 직접 운반하면서도 그는 “무대에 서는 게 좋다”고 말한다. 재즈 뮤지션으로서 굵직한 이력을 갖게 됐지만, 오히려 별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큰 무대에 서면 제가 굉장히 다른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창작을 하는 순간엔 변함없이 별로인 저 자신을 마주해야 하더라고요. 새롭지 않아 좌절하고, 연주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해하는 저 자신이요. 그래서 ‘내 길을 가는 것에 완성이란 없구나, 과정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씨 제공

김씨는 자신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몰입의 순간을 경험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잠시 잡념을 차단하고 낯선 것에 몰입하며 자신의 취향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는 바램도 전했다. 음악을 비롯해 사람들의 취향이 알고리즘에 따라 정해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시야를 돌리면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것들이 도처에 있는데 (오히려) 알고리즘 때문에 그걸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제 연주를 들으며 몰입하는 순간의 짜릿함을 경험하시고, 자신이 그렇게 푹 빠져 좋아할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을 찾아나가시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그 새로운 게 재즈나 연주 음악이길 바라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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