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보호자’ 비장애인 형제… “우리도 돌봄이 필요해요” [조금 느린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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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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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형제 둔 아이들이 겪는 정서 문제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예전부터 다 잘했는데….”

일가족이 진료실에서 상담을 받고 있었다. 의사는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앓고 있는 A군(7)이 지시 수행 능력이 좋아졌다며 칭찬했다. 부모는 기뻐했다.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A군의 동생 B양(5)이 말했다. “나는 저런 것들 한참 전부터 다 잘했는데….”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천근아 교수가 전한 진료실 일화다. 천근아 교수는 “비장애인 형제는 소외감, 피해 의식, 질투, 죄책감, 두려움 등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어릴 때부터 겪는다”고 했다.

장애인을 형제로 둔 비장애인 형제는 부모보다 더 오랜 시간 장애인 형제를 보살핀다. 그래서 상당수 비장애인 형제는 행동과 생각이 어른 같은 아이인 ‘애어른’으로 자란다. 발달장애인인 남동생과 오랜 기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해 특수교사가 된 유인비(36)씨는 “어른들이 비장애인 형제를 보면 성숙하고 철이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가정이 장애인 형제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장애가 없는 자녀는 자연스럽게 어른 같은 아이로 자라게 된다”고 했다. 비장애인 형제 자조 모임 ‘나는’을 조직한 이은아(34) 대표 역시 “비장애인 형제는 장애인 형제를 위해 애쓰는 부모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착한 아이가 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성장하며 정서·경제 부담 안는다
비장애인 형제는 장애인 형제에 대한 정서적·경제적 ‘돌봄’ 부담을 떠안는다. 정서적 돌봄 부담은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부모와 장애인 형제를 모두 사랑하지만, 부모의 관심이 장애인 형제에게만 집중되는 탓에 자연스러운 서운함과 질투심을 느낀다. 이화여대 특수교육과 김유리 교수는 “소외감, 외로움, 부당함, 질투심, 부담감 등의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비장애인 형제가 많다”며 “동시에 사랑하는 가족에게 부정적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갖기도 한다”고 했다. 어릴 때 생긴 상처는 성장하면서 곪는다. 유인비씨는 “엄마가 돼보니 ‘우리 엄마가 참 힘들었겠다’는 연민과 동정이 생기면서도 어릴 적 받지 못한 관심에 대해서는 여전히 서운한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사회의 부정적 시선과도 맞서야 한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차별감을 가족이 함께 느끼며 ‘동반 낙인감’을 경험한다. 유인비씨와 이은아 대표 모두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인식은 끊임없이 느낀다”고 했다.

비장애인 형제가 성인이 되고 부모는 나이 들어가면서 부모가 겪던 장애 형제의 경제적인 돌봄 부담은 비장애인 형제에게 전가된다. 이은아 대표는 “아직 사회 환경은 장애인이 자립하기 어려운 실정이다”며 “비장애인 형제 본인이 스스로 느끼는 책임감뿐 아니라, 부모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비장애인 형제에게 심리적 지지를 요구하게 돼 더 큰 돌봄 부담을 느낀다”고 했다. 특히 비장애인 형제가 가정을 꾸린 후 부담이 극대화된다. 성신여대 교육학과 이정은 교수는 “안 그래도 책임감을 느끼는 비장애인 형제에게, 돌봐야 하는 가정의 범주가 늘어나는 것”이라며 “부모와 형제는 물론 새로 생긴 자신의 가족과 장애인 형제의 가족에 대한 돌봄까지 중첩되는 부담을 떠안는다”고 했다.

이들의 부담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더불어민주당 강선우 국회의원실에서 2022 발달장애인을 형제로 둔 433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발달장애인 가족 열 명 중 여섯 명은 자살을 고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유로는 ‘평생 발달장애 가족를 지원해야 하는 부담감’이 56.3%를 차지했고, ‘발달장애 가족 지원으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어려움’이 31.1%로 뒤를 이었다.

비장애인 형제 위한 사회 지원책, 일시적·피상적·국한적
비장애인 형제의 부담을 더는 사회적 지원책은 부족한 실정이다. 유인비씨는 “장애인 가족에 대한 지원이 충분하지 않은데, 그마저도 부모에게 편중돼 있다”고 했다. 현재 국가에서 진행하는 비장애인 형제를 위한 프로그램이 있긴 하다. 서울시에서는 비장애인 형제를 대상으로 학습·정서 멘토링을 제공하고, 예술 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하지만 해당 프로그램들은 일회성이거나 단기간에 그치는 경우가 다수다. 서울도서관 역시 ‘장애 형제가 있는 나’라는 홈페이지를 지난 1년간 시범·운영한 바 있다. 서울에서 제공하는 비장애인 형제 지원 프로그램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안내했으나 현재는 서비스가 종료된 상태다. 서울도서관은 “향후 운영에 대해서는 내부 검토 중”이라고 했다.

이정은 교수는 “비장애인 형제 대상 프로그램은 피상적 수준”이라며 “일회성에 그치거나 장애인 가족의 경험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실정”이라고 했다. 부족한 프로그램은 그마저도 수도권에 편중돼 있다. 장애인가족지원센터 역시 비장애인 형제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서울을 비롯한 큰 도시에 국한됐다. 이정은 교수는 “비장애인 형제의 심리를 돌보기 위해서는 연령대나 가족 상황에 맞게 개별적인 케어가 이뤄져야 한다”며 “비장애인 형제를 둔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공감과 위로를 얻는 자조 모임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조 모임, 정신과 진료, 가족의 이해 이뤄져야”
‘자조 모임’은 비장애인 형제가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가장 먼저 참여해볼 수 있는 방법이다. 자조 모임은 비슷한 심리사회적 문제를 공유하는 모임으로,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다양한 연구를 통해 참여하는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입증됐다. 이은아 대표는 “같은 어려움을 겪는 비장애인 형제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위안, 공감 등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노력으로도 일상 생활에 무리가 갈 정도로 ▲무기력하고 ▲체중이 늘거나 줄고 ▲식욕이 늘거나 줄고 ▲잠이 늘거나 주는 등의 변화가 지속된다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 한양대병원 발달장애인 거점병원·행동발달증진센터 김인향 센터장은 “실제로 비장애인 형제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우울·불안·불면 등의 수치가 높았고, 자살 사고 비율 역시 일반 아이들에 비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여럿 있다”고 말했다. 연세나무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현진 원장은 “비장애인 형제가 아직 학생이라면 학교에서의 생활 변화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부모의 양육 태도도 중요하다. 천근아 교수는 “부모 입장에서는 발달장애 자녀의 돌봄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비장애인 형제가 겪는 소외감·피해의식·질투·죄책감·두려움 등의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공감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비장애인 형제에게 장애인 형제가 공격적이거나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한다면, 이를 절대로 용인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김인향 센터장은 “무엇보다 부모 스스로의 정신 건강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다”며 “주양육자가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자녀 모두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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