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에서 백혈병으로 산재 인정을 받고도 8년 넘게 손해배상은 받지 못하고 있어요.”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 분쿄시빅센터에서 열린 ‘후쿠시마 원전 피폭 소송 8년 보고회’에서 만난 아라카부(가명·물고기 ‘쏨뱅이’라는 뜻)는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사고 이후 복구 공사에 투입된 하청 노동자였다. 2011년 3월11일 동일본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직후부터 2년여간 후쿠시마 제1원전 4호기 건물 내진 공사 등에 참여했다. 2013년부터 발열과 기침 증세가 생기더니 2014년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몇주만 더 늦게 발견됐어도 생명이 위태로웠다. 극심한 구토와 설사, 패혈증이 겹쳤다. 아이 셋과 아내를 두고,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공포감에 불면증과 우울증 진단도 받았다. 후쿠시마 제1원전 운영사이며 원청 업체인 도쿄전력은 작업장의 위험을 정확히 알리지 않았고 제대로 된 안전 장비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도쿄전력 등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지만, 1심 판결조차 받지 못한 채 8년째 법정 투쟁을 벌이고 있다. 끝이 없는 원전 사고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공포를 보여주는 사례다.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사고로 나라가 두 동강 날 뻔했던 일본 정부는 최근 원전 재가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달 21일 일본 최대 경제단체인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게이단렌)의 도쿠라 마사카즈 회장이 니가타현에 있는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 7호기 앞에서 “이 원전은 일본 경제, 특히 (도쿄를 포함하는) 간토 지역을 지탱한다”며 “한시라도 빠른 원전 재가동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사고 이후 가동을 멈췄던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 7호기는 2017년 재가동에 필요한 안전심사 합격증을 받았고, 올해 봄 핵연료가 주입됐다. 7호기와 동시 재가동을 목표로 하는 6호기도 내년 봄에 핵연료를 주입하기로 결정됐다.
일본에서 원전의 ‘화려한 부활’을 기다리는 건 경단련뿐이 아니다. 기업 경영자들의 개인 참여로 꾸려진 일본 ‘경제동우회’는 후쿠시마 원전 폭발 뒤 줄곧 ‘원전 축소’ 입장을 고수했지만, 지난해 ‘원자력을 활발하게’로 기조를 바꿨다. 중소기업 중심의 일본상공회의소 역시 원전은 “탈탄소 효과가 높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재가동을 재촉하고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사고 뒤, 당시 일본 민주당 정부는 ‘원전 제로(0)’ 정책에 따라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과 홋카이도 도마리 원전 3호기 등 전체 54기의 운영을 전면 중단했다. 그러나 2012년 말 자민당이 정권 탈환에 성공한 뒤 원전 재가동으로 돌아섰다. 불과 3년 만인 2015년 원자력규제위원회 허가를 얻은 규슈전력이 센다이 원전 1·2호기 운전을 시작했다. 세월은 ‘후쿠시마의 공포’라는 기억을 옅게 만들었고, 일본에선 해마다 재가동 원전이 늘고 있다.
일본원자력산업협회 누리집을 보면, 9일 현재 일본에서 가동되는 원전은 모두 14기다.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이전 4분의 1 규모다. 이 가운데 아직 영업용 운전 단계까지는 가지 않은 미야기현 오나가와 원전 2호기를 빼면, 재가동 원전은 일본 국토 중앙인 도쿄를 중심으로 모두 서쪽에 있다. 일본 사회 전체를 소용돌이에 빠트렸던 원전 폭발의 트라우마가 여전하다는 걸 상징한다. 지난 10월 오나가와 원전 2호기의 재가동이 특별히 주목받은 것도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사고 뒤 피해 지역인 동일본에서는 원전이 처음 재가동된 사례이기 때문이다. 오나가와 2호기 재가동으로 민주당 정부가 한때 추진했던 ‘원전 제로’ 정책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어 지난 7일에는 일본 서부 시마네현 마쓰에시의 시마네 원전 2호기가 원자로를 재가동했다. 현재 재가동 심사 절차를 진행하는 원전도 8곳에 이른다.
일본이 ‘후쿠시마의 공포’를 떨치지 못하면서도 재가동에 집착하는 까닭은 우선 전력 부족이 꼽힌다. 2022년 일본 정부는 ‘전력 수급 위기 경보’를 발령하는 등 수도권 일대 200만~300만가구가 대규모 정전 사태를 맞을 뻔했다. 지난여름에도 도쿄 일대 전력을 담당하는 도쿄전력의 전력 수요가 한때 95%에 이르러 주부전력에서 전기를 꿔오는 일도 있었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54기에 이르던 영업용 원전이 12기까지 줄었고, 지진 등 영향으로 일부 화력발전이 멈출 때마다 대규모 정전 우려가 반복되고 있다.
세계적 탈탄소 움직임은 원전 가동에 명분을 주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50년 탄소배출 제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원전 외에 대안이 없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일본 에너지 수급 실적을 보면, 화력발전 비율이 68.6%였다. 반면 재생에너지 비율은 22.9%(전년 대비 1.1%포인트 증가)로 이 가운데 원전은 8.5%(2.9%포인트 증가)를 차지했다. 일본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36~38%로 늘린다는 계획인데, 이 가운데 20~22%를 원전이 책임진다고 제시했다. 원자력 에너지 증가가 연간 1%포인트 정도에 불과한 건 원전 재가동 지연 탓이고, 이 때문에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도 늦어진다는 주장이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에너지 위기 우려도 일본 정부가 원전 가동 확대로 나서는 이유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일본은 지난해 5월 노후 원전을 60년 이상 가동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그린 트랜스포메이션(GX) 탈탄소 원전법’도 통과시켰다.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사고 뒤 민주당 당시 정부는 원전 가동 기간을 원칙적으로 40년으로 하고 심사를 거쳐 20년 가동을 연장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지난해 5월 통과된 법에 따르면 안전 심사 등으로 인한 원전 정지 기간은 계산에서 빼는 방식으로 원전 수명을 연장하게 했다. 안전 심사 등으로 인한 원전 정지 기간이 10년이면 70년도 가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사실상 원전 수명에 대한 규제가 없던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는 조처다.
일본 정부는 기존 원전 재가동에 이어 원전 신규 건설까지 타진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올해 개정할 예정인 ‘에너지 기본계획’에 신규 원전 건설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포함할 것으로 보인다고 일본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이시바 시게루 자민당 정부에 협조하고 있는 야당인 국민민주당은 에너지 기본계획에 신규 원전 건설을 포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주민 안전 대책 논란도 여전하다. 오나가와 원전 2호기 근처 마을인 이시노마키시 주민 16명은 2021년 ‘중대 원전 사고 때 시가 작성한 피난 계획에 나오는 대피용 버스 확보가 불가능하고, 방사선량 계측 장소가 없는 등 실효성이 없다’며 법원에 원전 가동 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센다이고등법원은 “주민들이 ‘피난 계획의 실효성과 생명·신체에 관한 권리 침해’를 인정할 만한 근거를 구체적으로 증명하지 못했다”며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사토 다이스케 반핵아시아포럼 사무국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전력이 부족하다거나 원전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정부 주장은 거짓말이며, 원전이 더 많이 재가동될수록 진짜 재생에너지 확대는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며 “최근 정부의 원전 확대 움직임에 맞서 니가타, 이바라키 등 주민들의 반대 운동이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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