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 대주주 = 無 절대 강자
정부 압력에 낙마한 구현모·최정우
이복현 “용퇴, 용기 있는 행동”
4연임 포기했지만 ‘참호’ 비판받은 백복인
지배구조 전문가 “국가 개입보단 이사회 기능 제고를”
[Gettyimage]
주식회사에서 압도적 지분을 보유한 주체가 없다는 것은 절대 강자가 없다는 말과 동의어다. 이는 소유분산기업 최고경영인(CEO)의 취임, 임기 만료 등 거취 결정 때마다 끊임없이 ‘관치’ 논란을 일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부는 국민연금 등 기관을 통해 웬만한 기업의 일정 지분을 갖고 있다. 대주주 없이 모두의 지분율이 고만고만한 상황에선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아예 손을 놓는 것도 능사로 여겨지진 않는다. 기업 경영진이 주주들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는 데 우선하는, 이른바 ‘참호’ 구축 문제가 생기는 까닭이다. 지배주주가 있는 기업에선 그가 경영진을 교체하면 그만이지만 소유분산기업에선 그러기 어렵다. 소액주주들의 집단행동이 활성화되지 않은 현실상 경영진이 방만 경영을 하거나 비리를 저질러도 내부 견제가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리해도, 저리해도 문제인 지배구조 분야 난제(難題)다. 전문가들은 “어려울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며 “정부가 나서기보단 이사회 본연 기능 강화를 통한 내부 견제 시스템에 기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진단한다.
성과 거뒀는데도 外風에…
지난해 KT는 모진 ‘외풍(外風)’에 시련의 세월을 보냈다. 2022년 11월 당시 구현모 대표가 연임 의사를 표명한 것이 발단이다. 2020년 3월 취임해 임기 만료를 앞둔 때였다. 초반은 순조로웠다. 2022년 12월 13일 KT이사회는 구현모 전 대표를 연임 적격으로 판정했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소유분산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제동이 걸렸다. 이때 재심사에서 구 전 대표는 복수 후보 경선을 제안했고, 27명을 제치며 12월 28일 최종 후보로 낙점됐다.그러자 정치권이 나섰다. 지난해 1월 3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금융위원회 업무 보고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소유분산기업의 지배구조가 선진화돼야 한다”며 “투명하고 공정한 지배구조를 제도적으로 마련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깊이 있게 고민해 달라”고 말했다. 2월 2일엔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당시 비대위원)이 “소유분산기업의 대표이사가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며 토착화하는 호족 기업이 돼서는 안 된다”고 압박했다. 결국 23일 구 전 대표는 연임 포기 의사를 밝히며 3월 임기 만료를 끝으로 물러났다. 이후 CEO 후보로 확정된 윤경림 사장도 여권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사퇴하는 등 KT는 9월 김영섭 대표 취임까지 6개월간 경영 공백 사태를 겪어야 했다.
포스코그룹도 외풍에 들썩거렸다. 지난해 12월 28일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은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포스코홀딩스의 CEO 후보추천위원회 구성이 공정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사실상 최정우 회장의 3연임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올해 1월 8일 포스코그룹 CEO후보추천위원회(이하 후추위)는 최 회장이 향후 심사할 CEO 내부 후보 대상자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최 회장의 3연임이 좌절된 순간이다.
최 회장은 2018년 첫 회장에 취임한 후 2021년 연임했다. 올해 3월 임기 만료를 앞둬 3연임 여부가 업계 초미의 관심사였다. 최 회장이 스스로 포기한 것인지, 후추위에서 부적격 판정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부 인사 가운데 CEO 희망자는 1월 3일까지 지원서를 제출해야 했는데, 최 회장의 지원서 제출 여부가 공개되지 않은 까닭이다.
다만 지난해 12월 11일 최 회장이 3억 원 상당 포스코홀딩스 주식을 취득한 점, 1월 2일 5000자에 달하는 이례적 장문 신년사를 밝힌 점 등을 감안할 때 업계에선 그에게 3연임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구 전 대표와 최 회장은 경영 면에서 준수한 실적을 거뒀다고 평가받는다. 구 전 대표 취임 전 1조~1조2000억 원을 오가던 KT 영업이익은 2022년 1조7274억 원으로 늘었다. 최 회장은 포스코그룹을 ‘철강기업’에서 ‘2차전지 소재기업’으로 탈바꿈시켜 기업가치를 끌어올렸다. 지난해 포스코그룹은 급격한 주가 상승을 통해 13년 만에 롯데를 제치고 재계 5위에 오르기도 했다.
왼쪽부터 최정우 포스코홀딩스 회장. 구현모 KT 전 대표. 백복인 KT&G 사장. [포스코그룹, KT, KT&G]
지난해 5대 금융지주 中 4곳 회장 교체
두 사람은 문재인 정부 시절 취임한 대표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에 윤석열 정부에서 이들을 탐탁잖게 여겼으리라는 시각이 많다. 실제 최 회장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 해외순방 경제사절단에 한 번도 포함되지 못하는 등 정부 행사에 배제되면서 ‘패싱’ 논란을 겪어왔다. 1월 2일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경제계 신년인사회에도 다른 주요 그룹 총수들과 달리 초청받지 못하기도 했다.이에 대해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구 전 대표와 최 회장 모두 실적만 놓고 보면 연임시켜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변호사)도 “두 CEO는 모두 주가를 올리는 등 좋은 실적을 거뒀다”며 “소유분산기업 CEO의 거취엔 정부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융지주를 이끄는 수장들의 변화도 눈에 띄는 점이다. 2022년 3월 함영주 회장이 취임한 하나금융지주를 제외하고 지난해에만 KB·신한·우리·NH농협금융지주 등 4곳의 회장이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도 역시 관치 논란이 불거졌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중심에 있다. 이 원장은 2022년 12월 조용병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훌륭한 후배들이 올라와 있어 세대교체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밝히자 “3연임할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후배에게 기회를 주는 결정을 보고 존경스럽다고 생각했다”며 조 전 회장의 용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지난해 1월엔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물러났다. 당시 이 원장은 손 전 회장이 라임펀드 불완전판매 관련 중징계를 받은 것을 두고 “금융 당국의 최종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8월 윤종규 회장 용퇴에도 이 원장이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윤 회장이 용퇴를 결정하기 이전 “KB금융 회장 선임 절차가 업계 모범이 됐으면 한다”며 압박한 바 있다.
뒤이어 회장에 취임한 인사들이 친(親)정부 인사라는 점도 논란을 부추긴다.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윤석열 정부 출범 당시 입각을 제안받은 인물이다. 지난해 1월 NH금융지주 회장에 취임한 이석준 회장도 윤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그의 선거캠프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이에 대해 박경서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부가 개입하면 기업 지배구조의 틀 자체를 흔드는 것”이라며 “미국·유럽 등 기관투자자가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서구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사실상 국민연금이 정부 치하에 있다.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하면 정부의 입김이 작용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박주근 대표 역시 “모든 지배구조 해법 가운데 정부의 개입이 최악의 수”라고 평가했다.
“오너만 장기 집권하는 게 아니다”
적절하진 않아도 현실상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지배구조 전문가 A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소유분산기업은 대개 국가 기간산업 분야 회사다. 일반 사기업과 달리 국가 이익을 고려해서 운영돼야 한다. 실적으로 경영진을 평가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기업 특성상 국가의 지원을 많이 받기도 하고, 종업원이나 하청업체를 희생시켜서 수치를 좋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근래 경영 원칙이 되고 있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의거해 보면 오히려 나쁜 경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럴 땐 국민연금 등 정부 기관이 나서서 제동을 걸어줄 수 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역시 “오너 일가만 장기 집권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경영인도 참호를 파 자리를 보전한다”며 소유분산기업 경영진에 대한 견제가 필요함을 말했다. 박경서 교수도 “오랫동안 연임한 전문경영인이 이사회를 자신의 사람으로 채워 유명무실하게 만든 후 장기 집권하곤 한다”고 비판했다.
KT&G가 사례로 꼽힌다. 김규식 회장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지만 KT·포스코·금융지주들보다 KT&G의 지배구조가 가장 나쁘다”고 지적했다. KT&G는 백복인 사장이 2015년 사장에 취임한 후 2018년 3월 재임, 2021년 3월 3연임에 성공했다. 백 사장은 1993년 KT&G 전신 한국담배인삼공사에 공채로 입사해 쭉 근속한 공채 출신 첫 사장이다. 올해 3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어 4연임 도전 여부에 이목이 쏠렸다.
연임 때마다 논란이 있었다. 첫 연임 때엔 사장 자격을 KT&G 전·현직 임원 혹은 자회사 대표 출신으로만 제한해 외부 인사를 막았다. 3연임 때엔 사외이사 6인으로 구성된 사장후보추천위원회(사추위)가 사장 공모를 발표한 이후 불과 이틀 만에 서류 접수를 마감했다. 대개 5일 이상 공모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때도 지원 자격을 전·현직 전무 이상으로만 한정했다. 연임, 3연임 때 모두 단독 후보로 당선했다. 특히 3연임 때엔 후보부터 사장 확정까지 11일밖에 걸리지 않아 비판받았다.
떨어진 주가도 발목을 잡았다. 지난해 말 기준 재임 기간 중 코스피가 약 30% 오르는 가운데 KT&G 주가는 약 17% 떨어졌다. 이로 인해 플래쉬라이트캐피털파트너스(FCP) 등 행동주의 펀드로부터 공격받기도 했다. 또 매출이 2015년 4조1340억 원에서 2022년 5조8514억 원으로 올랐지만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1조3663억 원에서 1조2676억 원으로 감소하는 등 경영 성과에서도 뚜렷한 이점을 보이지 못했다. 결국 1월 10일 백 사장은 “글로벌 도약과 변화를 위해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며 “미래 비전 달성과 글로벌 기업으로 한 차원 더 높은 성장을 이끌 역량 있는 분이 차기 사장으로 선임되길 바란다”며 4연임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구현모 전 대표와 최정우 회장 역시 참호 논란에서 자유롭진 못하다. 구 전 대표는 2014년 5월~2017년 10월 상품권을 매입한 뒤 되팔아 현금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약 11억5000만 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임직원과 지인 명의로 100만~300만 원씩 나눠 국회의원 후원회에 전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지난해 7월 벌금 700만 원 형을 받았다.
최 회장은 지난해 4월 비상경영 체제에도 불구하고 이사회 임원 등에게 100억 원 상당 자사주를 지급해 논란을 일으켰다. 또 올해 1월 11일 서울 수서경찰서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8월 사외이사 포함 이사 12명 및 포스코홀딩스 직원 4명까지 16명과 함께 5박 7일간 ‘캐나다 이사회’ 명목으로 해외에 나가 숙박비로만 1인당 175만 원을 지출하는 등 총 6억8000만 원을 지출해 업무상 배임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
“사외이사 강화로 정부 개입 차단해야”
전문가들은 “이사회 자체 기능 강화가 최선의 해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키워드는 ‘사외이사’다. 박경서 교수의 말이다.“선진국엔 우리나라보다 소유분산기업이 더 많지만 잡음이 별로 없다. 이유는 의사결정이 이사회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이 이사회가 합리성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전제는 이사회의 ‘독립성’이다. 우리나라에선 이사회의 이사들이 CEO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경우가 많아 서로 봐주는 경향이 강하다. 또 소유분산기업의 경영진이 자신들을 견제해야 할 사외이사를 선발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사외이사도 경영진에 종속되곤 한다. 게다가 사외이사가 감시에 소홀하더라도 사법부에선 잘 처벌하지 않는다. 사외이사가 주주를 무서워하기보다는 경영진의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다.”
박주근 대표는 “오너든, 전문경영인이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썩는다”며 “삼성의 준법감시위원회처럼 감찰 기능을 수행하는 기구를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현실적으론 사외이사가 견제 수단”이라고 말했다. 이어 “경영진이 잘못된 경영을 했을 때 사외이사를 함께 처벌해야 한다. 미국에선 2001년 ‘엔론 사태(미국 천연가스 기업 엔론에서 벌어진 대형 분식회계 사건)’가 발생하자 이와 관련된 경영인은 물론 사외이사까지 강력히 처벌했다”며 “사외이사 제도를 강화하면 정부 개입 없이 이사회만으로도 방만 경영을 방지할 수 있고, 관치와 참호 문제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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