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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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게 아니라, 세계를 옮기는 일”

[김재준의 다빈치스쿨] 명확성 강점 한국어, 다의성 못 살려 서양철학 번역 때 의미 전달 한계

  • 김재준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입력2024-11-2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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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여름 이탈리아 밀라노의 폰다지오네 프라다(프라다재단)에 전시회를 보러 갔다. 그곳에서 이탈리아 조각가 피노 파스칼리의 전시를 관람했다. 그는 1967년에 시작돼 1970년대까지 지속된 이탈리아 미술사조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를 대표하는 작가다. 아르테 포베라를 직역하면 ‘가난한 예술’이다. 여기서 포베라는 단순히 가난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어 ‘povera’는 소박함, 단순함, 결핍 외에도 본질로 회귀 같은 다층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아르테 포베라란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본질에 다가가려는 예술 운동을 의미한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한국어는 명확성을 강점으로 하지만, 다의성을 잘 살리지 못해 서양철학이나 문학을 번역할 때 원의미를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다. [GETTYIMAGES]

    한국어는 명확성을 강점으로 하지만, 다의성을 잘 살리지 못해 서양철학이나 문학을 번역할 때 원의미를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다. [GETTYIMAGES]

    아르테 포베라를 가난한 예술로 단순 번역하는 것은 해당 표현이 본래 가진 풍부한 함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나는 일이다. 이탈리아어와 영어, 독일어 같은 서양 언어는 단어 하나에 다양한 의미를 담는 다의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리스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인 로고스(logos)는 영어로 reason(이성), word(말), principle(원리)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이성으로 단순 번역하면 말이나 우주적 원리라는 의미가 희미해진다. 가령 성경 요한복음의 첫 문장 “태초에 말씀이 계시더라”를 번역한다고 가정해보자.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로 번역하면 얼마나 어색한가.

    중국어나 일본어는 다의성을 살리는 데 비교적 유리하다. 중국어에서 로고스는 ‘道(도)’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길’뿐 아니라 ‘우주의 질서’나 ‘철학적 진리’를 상징하는 다층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어로는 로고스를 ‘言葉(ことば)’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원어 그대로인 ‘ロゴス’로 표현하기도 한다. 일본어는 한자와 가나, 외래어를 혼용할 수 있는 만큼 언어적 유연성을 발휘해 번역 과정에서도 다의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한국어는 다의적 표현보다 감성과 간결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로고스를 이성이나 논리로 번역하면 한국어 특유의 직관적이고 간결한 언어적 장점은 살릴 수 있지만, 본래의 풍부한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서양철학은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종종 단순화된다”는 비판 역시 여기서 비롯된다.
    번역의 난제는 현대 철학에서도 두드러진다. 발터 베냐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Gewalt)’를 살펴보자. 독일어 ‘Gewalt’는 폭력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넘어 권위, 힘, 지배라는 의미까지 포괄한다. 베냐민은 단어가 가진 다의성을 절묘하게 활용해 법과 폭력의 관계를 해부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폭력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진다. 하나는 ‘법 창조적 폭력(rechtsetzende Gewalt)’이다. 이는 프랑스 대혁명처럼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혁명적 힘이다. 다른 하나는 ‘법 유지적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이다. 경찰이나 군대가 행사하는, 기존 질서를 지키는 강제력이 여기에 포함된다.

    흥미로운 점은 두 폭력이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혁명으로 세워진 새 질서는 그것을 지키기 위한 또 다른 폭력을 필요로 한다. 경찰의 폭력 역시 법을 지키는 동시에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법과 폭력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권력 구조를 창조한다. 국제정치를 보면 이 말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베냐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적 폭력(Divine Violenc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법적 폭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신적 폭력은 기존 모든 권력 구조를 무너뜨리며 진정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혁명적 가능성을 연다. 마치 ‘메시아적 순간’처럼 이 폭력은 모든 억압적 질서를 초월한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폭력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이 다소 어색하다.

    번역=아르테 포베라

    이탈리아 조각가 피노 파스칼리는 아르테 포베라를 대표하는 작가다. 이탈리아 밀라노 폰다지오네 프라다에 전시된 파스칼리의 작품들. [김재준 제공]

    이탈리아 조각가 피노 파스칼리는 아르테 포베라를 대표하는 작가다. 이탈리아 밀라노 폰다지오네 프라다에 전시된 파스칼리의 작품들. [김재준 제공]

    이처럼 복잡한 논의를 우리말로 옮길 때 가장 큰 걸림돌이 ‘Gewalt’라는 단어의 번역이다. ‘폭력’이라고 하면 물리적 강제력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지나치게 부각된다. ‘권력’이라고 하면 제도화된 지배를 뜻하게 되고, ‘힘’으로 번역하면 너무 일반적인 의미가 된다. 이처럼 원어가 가진 다층적 의미를 하나의 단어로 옮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한국어는 명확성을 강점으로 하지만, 다의성을 잘 살리지 못해 서양철학이나 문학을 번역할 때 원의미를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다. 반대로 중국어는 다의성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지만, 논리적 명료성이 약화될 위험이 있다. 번역자는 이러한 언어적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좋은 번역자는 단순히 단어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번역자는 문화적·철학적 뉘앙스를 재구성하는 창조적 해석을 해야 한다. 번역은 언어의 틈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아르테 포베라처럼 번역 역시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고 본질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아닐까. 결국 번역이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옮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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