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호

귀신이 세상과 작별하는 방법

[고담기담-마지막회]

  • 윤채근 단국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2024-12-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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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태어나기도 쉬울 리 없겠지만, 제대로 죽기란 또 얼마나 어렵단 말인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 세상을 이리저리 끝없이 떠도는 내 신세가 딱 그러하다. 사람들 대부분은 숨이 멈추고 생각이 끊어지는 순간, 현생의 모든 기억을 잃고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나 역시 마지막 숨을 사약 삼키듯 넘기며 그러리라 믿고 한 줄기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어느 순간 저 아래로 시신이 된 내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니던가! 주변을 둘러보니 방의 천장 바로 밑인 게 분명했는데, 난 그 사이를 공기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볼을 꼬집으려 손을 움직여봤지만 더는 내겐 몸뚱이란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난 그런 상태로 가족들이 내 몸을 염습해 장사 치르는 과정을 천장에 달라붙어 지켜봐야 했다.

    차라리 죽음을 인정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왜 하필 내가 귀신이 됐는지는 짐작하기조차 힘들었다. 왜 나였단 말인가. 그 뒤로 난 사람이 막 죽은 초상집을 찾아다니며 나처럼 귀신이 된 자가 있는지 두루 탐문했다. 놀랍게도 귀신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힘들었다. 세상엔 귀신이 씨가 말랐는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난 귀신을 만날 수 없었다.

    처음 만난 귀신

    내가 처음 귀신과 마주친 건 벌건 대낮 운종가 큰길 한복판이었다. 귀신이 밤에만 나타난다는 건 무지한 속세가 만든 낭설이다. 우리는 밤낮없이 부지런히 돌아다니지만 주로 조용한 밤에 목격돼 그런 오해가 생겼을 따름이다. 아무튼 사람들로 붐비는 장터를 쏘다니며 맛있는 음식 냄새도 흠향하고, 유독 겁쟁이처럼 보이는 자의 등에 올라타 뒷목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견디고 있던 내 눈에 이상한 여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귀신 눈에는 귀신이 잘 보이는 법. 난 장터 구석에서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는 여자가 사람이 아니란 걸 바로 깨달았다. 그녀도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꽤나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슬슬 다가가자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신경 끄고 가던 길 가시지! 귀신끼리 웬 관심?”

    한참 우물쭈물하던 내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귀신이 되고 나서 처음 만난 귀신이 당신이라오. 뭘 좀 묻고 싶소만.”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띤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초짜구먼? 뭐가 궁금한데?”

    나는 상대가 너무 바빠 보여 급히 물었다.

    “죽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왜 귀신은 이리도 만나기 힘든 거요?”

    잠시 깔깔대던 그녀가 빠르게 속삭였다.

    “원한 품은 사람이 드무니까 그렇지! 죽어서 귀신까지 되려면 아주 심한 원한이 맺혀야 되거든! 그게 아니면 다 어디론가 사라져!”

    내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도 큰 원한 탓에 원귀가 된 거요?”

    어딘가를 힐끗 노려본 그녀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저기 저 녀석을 봐! 저 녀석이 내 남편이었어. 악랄한 첩의 꼬임에 빠져 내 목을 졸라 죽였지. 너무 분해서 끝까지 쫓아다니며 복수하려는 거야! 됐어?”

    남편을 향해 움직이려는 그녀를 향해 내가 서둘러 또 물었다.

    “한양에 당신 같은 원귀가 몇이나 되오?”

    귀찮다는 표정의 그녀가 쓴 나물 씹어뱉듯 대답했다.

    “생각보다 많아! 다들 숨기를 좋아해 잘 나타나지 않을 뿐이야.”

    원귀들

    첫 귀신을 만나고부터 난 원귀들의 세계에 비로소 눈을 떴다.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수많은 원귀가 부엌 천장이나 뒷간 그늘 또는 헛간 기둥 사이에 이를 갈며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내겐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난 망설이지 않고 흥인문 들보에 웅크리고 있던 한 원귀에게 다가가 대뜸 물었다.

    “그대는 무슨 원한이 있기에 그곳에 숨어 있소?”

    위아래로 날 훑어보던 상대가 치렁치렁 늘어진 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보다시피 난 일흔을 넘긴 노인이오. 원한? 그런 건 이젠 없지.”

    가만히 상대를 살펴보자니 바싹 여윈 몸에 걸친 헤진 옷은 족히 백년은 돼 보였고, 퀭한 눈동자 어디에도 깊게 서린 원한 따위란 없어 보였다. 그가 힘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원한이라고 하자면,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해진 옛얘기가 돼 버렸어. 혹 내가 누군지 아나? 알 리가 없지! 난 임진년 전쟁 때 삼남에서 큰 공을 세운 의병장이었어. 수백 명을 이끌고 왜군 수천은 족히 죽였을 거야.”

    한참 망설이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런 분께서 어쩌다 이리 되셨소?”

    나를 힐끗 째려본 그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오직 대의만 바라보고 떨쳐 일어난 내가 나라에 공을 자랑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어! 그저 주변에서 하도 성화를 하기에. 비록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뒤였지만, 애써 한양까지 올라와 내가 세운 군공을 병조에 고했지. 큰 상을 바란 건 아니었고, 녹훈을 바란 건 더더욱 아니었어! 그저 나란 놈도 있었다고 나라가 알아주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었지. 그런데 대뜸 형조 관원들이 묵던 숙소에 들이닥쳐 날 포승줄로 묶는 게 아닌가 말이야! 없는 공을 내세운 사기꾼이라며 모진 매질을 당했어!”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내가 살며시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래서 어찌 되셨습니까?”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그가 대답했다.

    “그때가 자네 나이쯤 됐을 때야. 마흔 살이었지. 전옥서에 갇혔다 간신히 풀려나와 보니,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고향에 내려가 의병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증언을 채록했지. 그 문서를 들고 다시 병조를 찾아갔던 거야. 어쨌는지 아나? 이번엔 의금부 나졸들이 들이닥쳐 나를 비롯해서 문서 속에 이름이 있는 사람들을 죄 잡아가더란 말이지. 우리가 역적모의를 했다는 거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어. 할 일이 없던 의금부가 큰 공을 세우려 우릴 이용한 거였지. 난 거의 목이 날아갈 뻔했으나, 어찌어찌 감형이 돼 근 30년을 감옥에서 썩었어.”

    나는 아주 극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감옥에서 돌아가신 건가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그가 처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어. 손자 녀석이 내 시신을 수레에 싣고 이 흥인문을 빠져나갔어. 그 순간 몸뚱이에서 튕겨 나와 그 오랜 세월 이러고 있는 거야. 그게 깊은 원한일까?”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얼른 끄덕이고는 정중히 허리 굽혀 인사를 올렸다. 그를 흥인문에 그대로 두고 떠나오는 내내 내 마음은 오래도록 아리고 아팠다.

    남는 의문

    그 후로도 나는 수많은 원귀를 만나 사연을 들어주고 함께 웃거나 울었다. 그러던 차에 어떤 권세가 양반 앞날을 잘못 맞혔다가 맞아 죽은 점쟁이 귀신을 만나게 됐는데, 그가 요상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 것이었다.

    “근디 말이여. 자넨 워쩌다가 뒈졌는감? 분명 자네에게도 뭔 원한이 깊게 자리 잡았어야 마땅한디? 안 그려?”

    그 순간 나는 누군가 내 뒤통수를 절구로 내리찍는 듯한 전율에 휩싸였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곰곰이 따져들고 보자니, 과연 내겐 무슨 원한이 있었는지 몹시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점쟁이 귀신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참으로 이상하긴 합니다. 전 갓 서른여덟 살이었고, 나이 늦도록 책만 들이파며 장가도 들지 않았었지요. 원한이라면 아내를 얻지 못한 것뿐인데, 실은 그마저 저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라 딱히 원한이랄 것도 없고요.”

    점쟁이 귀신이 음산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가정 형편은 살 만은 했는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가 내가 대답했다.

    “부모님 모두 좋은 집안 출신이셨고 살림도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다섯 남매 가운데 제가 셋째였어요. 큰형님께선 일찍 과거에 급제해 홍문관에서 근무하셨고, 둘째 형님도 거뜬히 대과에 붙어 성균관에 봉직하셨고요. 넷째 아우는 왕실에 장가들어 부마 소리를 듣는 미남자였습니다. 게다가 막내 여동생은 형조판서 댁 안방마님이 됐지 뭡니까! 집안이 이리 잘나가다 보니, 저 같은 허깨비 하나쯤 있어도 다들 그러려니 여기더란 말입니다. 그저 재밌는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던 자가 바로 접니다!”

    입맛을 쩍 다신 점쟁이 귀신이 말했다.

    “거참, 암만 봐도 이상하이! 자네처럼 늘어진 팔자가 우째 귀신이 돼스까?”

    답답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점쟁이 귀신과 헤어져 폐허로 방치되고 있던 경복궁 근정전 뜨락을 이리저리 날던 나는 빨갛게 타들어 가는 노을 바라보며 갑자기 울음이 복받쳤다. 다들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그 흔한 원한이 내게 없다면, 이렇게 무턱대고 영원히 이승을 떠돌아야만 한다는 건데, 그 길고 긴 외로움을 견뎌낼 재간이 내겐 없었다. 무슨 수를 내도 내야 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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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놀이

    귀신들과 나누는 대화도 지겨워져 남산 아래 소나무 숲에서 토끼들과 놀고 있던 내 머릿속으로 퍼뜩 희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귀신이 지겨우면 사람들과 놀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부지런히 남산을 벗어나 숭례문으로 향했다. 아무데나 들어가긴 그랬고, 뭔가 재미있는 인생을 살 것 같은 사람을 골라야 했다.

    내 눈에 한 사내가 쑥 비집고 들어왔다. 다 헤져 부서지기 직전의 낡은 갓을 쓰고서 얼핏 봐도 더는 쓸모가 없어진 곰방대를 멋으로 쥔 채 길가를 갈지자로 뜻 없이 어슬렁대는 그는 딱 봐도 모질고도 엉뚱한 사연으로 넘치는 인생을 살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뒤를 바싹 쫓았다.

    사내는 숭례문 밖 한 허름한 초가집으로 들어서더니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그 소리를 들은 아내와 자녀 세 명이 천천히 나와 차례로 마루에 걸터앉았다. 아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돈은 좀 융통을 했수?”

    그녀의 가녀린 목은 곧 꺾여 떨어질 것만 같았는데, 아무래도 무능한 남편 때문에 쌓인 근심의 무게를 견디느라 그렇게 된 듯도 했다. 뒷짐을 진 사내는 헛기침을 멈추고 거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돈 융통하는 기술은 타고났지 않은가? 자네 고모부 집에 들러 또 스무 냥을 꿨다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한 지가 벌써 1년은 지났으니, 거 뭐, 또 꿀 때가 제법 됐지 않은가?”

    사내는 엽전 꾸러미를 마루에 툭 던지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크게 틀고 저녁 밥상을 기다렸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아내는 엽전을 챙겨 황급히 부엌으로 가더니 찬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초가집 지붕에 벌러덩 누워 밤이 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달도 뜨지 않은 칠흑 같은 밤, 나는 우선 부엌 그릇 몇 개를 깨 부부의 잠을 깨웠다. 사내가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오자 나는 이번엔 장독대에 있던 항아리 하나를 부쉈다. 그제야 기겁을 한 사내가 부지깽이를 움켜쥐고 내 쪽을 향해 다가왔다. 나는 그동안 연습한 기술을 잔뜩 부려 무서운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사내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외쳤다.

    “귀, 귀신이냐? 예끼! 예가 어딘 줄 알고? 내가 이래 봬도 장안을 호령하던 홍 판서 댁 막내아드님이시다! 썩 꺼지지 못할까!”

    나는 그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 이렇게 대꾸했다.

    “판서 자식이란 녀석이 오죽 못났으면 돈이나 꾸고 다니느냐! 내 오늘부터 이 집에 붙어살려 한다! 그리 알거라!”

    나는 부지깽이를 휘두르는 사내 머리에 올라타 으스스한 비명을 질러댔다. 마침내 다른 가족들마저 깨어 마당으로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이 희한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들이 결국 나를 인정하고 식구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그날부터 꼬박 열흘이 더 걸렸다.



    재능의 발견

    사내의 성명은 허영생이었다. 영생은 처음엔 나를 불길한 객식구쯤으로 여겨 못마땅해했지만, 귀신과도 차츰 정이 들었는지 어느덧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하게 됐다. 그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자네가 진짜 귀신이라면 날 좀 도와주면 안 되나?”

    귀신 주제에 사람을 돕는단 생각은 꿈에도 한 적이 없기에 나는 대충 못들은 척 넘어가곤 했지만, 어느 하루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영생이 내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내 타고난 성품이 서툴고 주변머리라곤 없네. 그렇다고 공부 머리라도 있느냐면 그마저도 없으니, 결국 여기저기 친인척들에게 손이나 벌리며 살고 있는 것이지. 나 역시 내가 한심하고 부끄럽다네! 자네는 내 살아온 내력을 다 알게 됐잖은가? 좀 도와주시게! 제발!”

    그날따라 무슨 생각에선지 영생이 몹시 불쌍하게 보였고, 나 또한 붙어살 집을 바꿔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터였는지라, 마지막으로 선물이라도 줄 양으로 그에게 살짝 물었다.

    “뭘 어찌 도울까?”

    화색이 돈 영생은 내가 붕붕 떠다니고 있는 허공을 향해 속삭였다.

    “옛말에 귀신처럼 잘 맞힌단 말이 있잖은가? 내 도박은 자주 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그것만큼은 꽤 할 줄 아네. 자네가 상대 패를 읽어 내게 가르쳐 주면 어떤가? 한밑천 쥐면 바로 그만둘 터이니!”

    우리는 그날로 도박판에 뛰어들어 판돈을 닥치는 대로 걷어들였다. 영생은 딴 돈으로 서촌에 집을 새로 지어 이사했고, 그동안 진 빚도 이자까지 합쳐 죄 갚았다. 그러고도 그의 수중엔 수천 냥이 남아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이제 남은 삶은 자네 재주로 살게! 도박판을 더 기웃대다간 패가망신하게 될 걸세.”

    비록 못난 데다가 철까지 없던 그였지만, 귀신 얘기라면 기막히게 잘 따랐기에 영생은 현명하게도 그날부로 도박을 끊었다. 그 무렵 내가 다른 붙어살 집을 물색하고 있다고 말하자 몹시 서운한 낯빛으로 그가 말했다.

    “자네와 이야기하며 참 좋았다네. 사람에겐 할 수 없는 말이 술술 나오더란 말이지! 그렇게 터놓고 내 이야기를 하고 나면, 뭐랄까, 새로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네. 정말 고마웠다네! 꼭 떠나야 한다면 말릴 수 없겠지만, 언제라도 다시 오고 싶으면 서슴없이 오시게!”

    나는 미련을 잔뜩 품은 영생 가족들과 그렇게 기약도 없이 이별했다. 그런데 막상 영생의 집을 떠나 한양 저잣거리로 나서자 홀가분한 기분보다는 쓸쓸한 마음이 더 앞서는 것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라 여기며 나는 다른 누군가를 발견하려고 숭례문 위로 내려가 앉았다.

    영생 다음에 내가 달라붙었던 자는 짐승 가죽을 다루는 무두장이였다. 고집이 세고 남의 말에는 일절 신경도 쓰지 않는 외골수였던 그의 이름은 김응팔이었다. 응팔은 살갑지 않은 성격 탓에 가족들과도 서먹했는데, 실은 그의 마음은 안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 나와 마주친 그는 희뿌연 안개처럼 보였을 나를 향해 퉁명스레 말했다.

    이야기꾼의 신

    “어차피 즐겁지도 않은 인생, 귀신이면 빨리 날 잡아가슈!”

    너무 냉담한 반응에 재미가 없어진 나는 우락부락한 말투로 물었다.

    “인생이 재미없다고? 설마 나처럼 재미없을까. 귀신이 얼마나 지루한지 넌 모르지?”

    피식 웃음을 삼킨 응팔이 대답했다.

    “30년을 가죽만 다룬 나보다 더할까. 가족도 날 외면하고 세상도 날 거들떠도 안 보니, 무슨 낙이 있어 살뜰히 살고 싶겠나? 응? 인생이 고해라더니 진짜 고해야!”

    나는 응팔과 긴 대화를 나누며 그가 천애 고아 출신이고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벙어리가 된 사연을 듣게 됐다. 아들 둘을 낳은 아내는 갑자기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하더니 어느 순간 말을 잃고 벙어리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응팔은 아내가 진짜 벙어리는 아니라고 굳게 믿는 눈치였다. 그에게 내가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진짜 벙어리인지 내가 알아봐 주지! 설마 귀신을 속일까?”

    그날부터 나는 응팔의 아내 뒤를 밟았다. 처음엔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나 의심했지만,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하루 일과를 무한 반복하며 살고 있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자식들 씻기고 그리고 잠을 잤다. 한번은 그녀 귓가에 대고 내 정체를 밝혀보았다. 그러자 기겁을 한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하염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해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발음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자기 가슴을 쥐어뜯으려 했다. 내가 급히 말했다.

    “난 귀신이지만 무섭진 않소. 그냥 얘기를 들어주고 소일하는 귀신이라 보면 되오!”

    그녀는 허공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도리가 없어 내가 살아온 내력을 혼자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그녀는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더니 어느새 기본적인 발음을 하나씩 해내는 것이었다. 그녀가 한 첫마디는 이러했다.

    “어, 엄...마!”

    바로 엄마였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그녀는 예전에 하던 사람의 말을 기억해 냈고 남편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돌아가시고 딱 1년이 되던 날, 전 말을 잃어버렸어요. 무슨 물건을 땅에 놓치듯 그렇게요! 정말 신기한 게, 그러니까 슬픔도 함께 사라지더군요. 전 엄마와 말 두 개를 동시에 잃고서야 삶을 견딜 수 있었어요. 남편은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인지라,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이 마음을 하소연하고 풀 대상이 아예 없었던 거예요. 귀신님께서 나타나 주신 덕에 전 슬픔과 말을 도로 되찾았답니다.”

    나는 응팔 부부가 서로를 끌어안고 우는 장면을 뒤로하고 새로 달라붙을 사람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내다 보니, 결국 나와 가장 죽이 잘 맞을 인간들도 발견해 내고야 말았다. 바로 소설가들이었다.

    소설가들은 내가 다가가면 뛸 듯이 기뻐하면서 어서 새로 들은 얘기를 내놓으라며 몰아세우기 바빴다. 그들 일부는 어서 내가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기조차 했다. 그들은 나를 이야기꾼들의 신이라며 떠받들었다. 그렇다! 어쩌면 나야말로 세상에 남은 유일한 진짜 이야기꾼인지도 몰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이야기꾼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걸 깨닫자마자 귀신으로서의 소임도 함께 끝났다. 나는 엄청난 말을 세상에 토해내고 나서야 겨우 저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됐다. 그것이 이 지루한 글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알리고자 했던, 세상과 작별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독자들이여, 부디 안녕!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야담집 ‘청구야담’ 속 한 작품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 ‘고담기담’은 이번 호가 마지막회입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윤채근
    ● 1965년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外




    고담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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