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호

대통령 탄핵 후유증 극복에 꼬박 3년 걸렸는데, 또…

[특집 | 아…탄핵! 尹 탄핵을 보는 눈]

  • 윤태곤 의제와 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

    입력2024-12-2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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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 3월 탄핵, 2021년 보궐선거 때 기사회생

    • 부정선거 의혹 규명, 좌파 척결이 12·3 계엄 이유?

    • 尹, 강성 우파 유튜버·부정선거론 수장 자임

    • 전략적 사고 못 하는 친윤, 한동훈 공격에 집중

    • 대통령 탄핵이 오히려 정국 불안정성 해소할 것

    2024년 12월 12일 국회 본청에서 원내대표 선출을 위한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한동훈 당시 대표의 모두발언 중 강명구 의원이 일어나 설전을 벌이고 있다. [동아DB]

    2024년 12월 12일 국회 본청에서 원내대표 선출을 위한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한동훈 당시 대표의 모두발언 중 강명구 의원이 일어나 설전을 벌이고 있다. [동아DB]

    2024년 12월 14일 국회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대통령직이 궐위 상태고 헌법재판소를 통해 인용 여부가 결정될 테니 정국이 ‘시계 제로’의 혼란상에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번 탄핵은 오히려 정국의 불안정성을 그나마 어느 정도 해소한 것이다.

    12월 3일 밤 비상계엄 선포, 4일 새벽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결의 이후 윤 대통령은 사실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대통령의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고, ‘2차 계엄설’까지 나왔다. 이에 국방부 장관 대리와 합동참모본부 등 군 수뇌부는 “대통령이 계엄 관련 지시를 내리더라도 따르지 않겠다”고 일종의 ‘조건부 항명’을 천명해야 할 정도로 극도의 혼란상이 전개됐다.

    보수 진영에 악영향 끼칠 불씨

    12월 7일 국민의힘 의원들의 투표 불참에 의한 첫 탄핵 부결 이후엔 미국 주요 당국자들이 “헌법적 절차에 따라 거취가 정해져야 한다”고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첫 번째 탄핵 표결 직전에 2분여 짧은 담화문을 통해 계엄에 대한 간략한 사과와 향후 정국 정상화 방안과 임기 문제 등을 ‘당에 일임’한다면서 국민의힘 뒤로 몸을 숨겼던 윤 대통령은 자신의 탄핵에 대한 두 번째 표결을 이틀 앞둔 12일 오전엔 정반대 내용으로 장문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29분여 동안 진행된 담화문 발표에서 윤 대통령은 목소리를 높이며 계엄의 정당성을 설파했고, 야당뿐 아니라 중앙선관위를 맹공하며 강경 보수 진영, 부정선거 주창론자들의 결집을 꾀했다. 특히 윤 대통령은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고 말한 후 밀려 있던 국무회의 통과 법안, 대통령령 등에 대한 재가까지 진행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이 같은 행동은 여당 내에 존재하던 탄핵 반대의 둑을 무너뜨렸다. 단기적으론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계기가 됐다.

    윤 대통령의 12일 담화는 탄핵 심판 과정, 인용 시 60일 내에 진행될 대통령선거, 대선 이후에까지 국민의힘은 물론 보수 진영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불씨를 남겼다. 윤 대통령이 침묵 모드를 유지하고 먼저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최소한의 법리적 방어에 그쳤더라도 보수 진영의 혼란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부정선거론자들과 ‘12·3 비상계엄은 통치행위’라고 주장하는 강경 보수 유튜버를 우군으로 삼아 정치적 싸움을 벌일 뜻을 분명히 밝혔다. 결과적으로 더 큰 혼란상이 펼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몬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12월 12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대국민담화를 하고 있다. [채널A 화면 캡처]

    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12월 12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대국민담화를 하고 있다. [채널A 화면 캡처]

    ‌12일 오전 대통령 담화 이후 당론으로 탄핵을 가결해야 한다는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대표 앞에서 일부 친윤 의원들은 고성을 지르며 ‘대통령 탄핵’이 아니라 ‘한동훈 사퇴’를 주장했다. 친윤계인 김민전 최고위원은 기자들을 만나 “지도부가 다 붕괴돼야지 (유지하고) 있으면 이상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계를 8년여 전으로 돌려보자.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과 현재 여당인 국민의힘 사이엔 유사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극심한 당청 갈등 끝에 직전 총선에서 과반을 얻은 새누리당이 122석에 그쳐 대패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양호’한 성적이지만 당시엔 충격이 컸다. 야권이 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선거의 여왕’인 박근혜 대통령이 이끌던 여당이 참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배 이후’가 진짜 문제였다. 2012년에 비해 30석을 잃었지만 공천 학살과 영남권 대승 때문에 원내 친박 비중이 더 높아졌다. 새 원내대표 정진석과 수도권 소장파들이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지만 바로 다음 날 충청권과 영남권 친박 초·재선 20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편향된 시각으로 일부 계파에 앞장선 사람들이 중심이 된 것은 문제”라며 위력 행사를 해서 좌절시켰다.

    총선 넉 달 뒤, 정기국회를 앞둔 2016년 8월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선 박근혜 정부에서 정무수석과 홍보수석을 지낸 이정현이 당대표로 선출됐다. 당 지지율이 점점 떨어졌지만 중도보수층이 이탈한 탓에 강성 친박 비중이 높아졌다. 당대표 이정현은 청와대에 가서 “새 지도부를 중심으로 여당은 박근혜 대통령께서 이끄시는 이 정부가 성공할 수 있도록 집권 세력의 일원으로 책무를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해 9월 들어 정기국회를 앞두고 소문과 의혹이 무성하던 미르·K재단이 완전히 수면으로 올라왔다. 10월에는 최순실의 이름이 거론됐다. 야당과 언론의 압박이 거세졌지만 친박 지도부는 연달아 터져 나오는 뉴스를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고 청와대만 바라봤다. 결국 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과 우병우 민정수석 등 청와대 주요 참모들이 쫓겨나듯 한꺼번에 사퇴했다. 그때부터 청와대와 여당 기능이 사실상 마비됐다.

    언론의 연이은 폭로 보도, 대규모 장외 집회, 검찰의 수사, 야당에 여당 의원 상당수가 합세한 국회의 국정조사 등 4각 파도 앞에서 박 전 대통령은 버티지 못했고, 결국 그해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의원 234명의 찬성(반대 56명, 기권 2명, 무효 7명)으로 가결됐다. 요컨대 4월 총선 대패 이후 5월의 개혁 프로그램이 좌초되고 8월에 친박 지도부가 들어섰지만 9월부터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지면서 12월에 탄핵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경우 2022년 5월 취임한 지 한 달 뒤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이후 줄곧 대부분 자충수로 인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총선 국면에서 한동훈 당시 비대위원장 등 지도부와 주로 김건희 여사에 관련된 문제로 갈등을 빚었고, 비대위원장 사퇴를 압박하기도 했다. 이른바 윤·한 갈등이 오히려 당과 대통령실의 디커플링 기제로 작용하고 야당의 공천 갈등까지 겹쳐 한때 총선 선전이 점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김건희 여사의 명품 백 의혹 △이종섭 호주대사 임명 △황상무 수석 망언 버티기 △대파값으로 상징되는 물가 파동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대통령 담화로 이어지는 용산발 악재로 108석을 거두는 데 그쳤다.

    2024년 4월 총선 이후 흐름은 사뭇 달랐다. 총선 패배 이후 친윤 인사들이 비대위원장직을 사퇴한 한동훈을 맹공했지만 오히려 그 공격은 한동훈의 정치적 공간을 열어줬다. 용산 책임론이 재점화되면서 한동훈은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했다. 용산은 원희룡 전 국토부 장관을 대항마로 내세웠다. 다수 의원들과 용산이 색깔론까지 불사하며 공격했지만 한동훈은 당원과 일반 여론 모두에서 60%를 넘는 득표로 압승해 당대표가 됐다. 박근혜는 총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당권을 틀어쥐었지만 윤석열은 실패한 것이다. 이른바 김건희 여사 문자 ‘읽씹’ 논란을 고리로 한동훈을 공격한 것은 친윤 진영의 전략적 사고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드러냈다.

    한동훈 체제 성립으로 당정 불협화음이 높아지겠지만 당이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 같은 파국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대로 결과는 달랐다.

    2016년과 2024년 유사점과 차이점

    2017년 3월 10일 당시 이정미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이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17년 3월 10일 당시 이정미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이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 대통령은 한 전 대표를 노골적으로 패싱하고 추경호 원내대표 등 중진 위주 친윤들과 소통을 강화했다. 야당은 법안 단독 처리와 정부 인사들에 대한 탄핵으로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줄줄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맞섰다. 윤 대통령이 야당 그리고 여당의 한 전 대표와 양면 전선을 펼친 것이다. 어느 한 전선에서도 성과를 낼 수 없었고, 여론은 점점 싸늘해졌다. 주류 보수 언론도 연일 윤 대통령과 용산을 질타했다. 하지만 오불관언. 대통령이 극우 유튜버에 의존하고 유튜버들과 교류 빈도를 높인다는 이야기가 점점 많아졌다. 이후 명태균 파동, 대통령의 육성 전화 통화 파일 폭로 등까지 터졌다. 그런데도 엉뚱하게 친윤 진영은 당원 게시판 문제로 한동훈 전 대표를 공격해 김건희 특검법의 통과 가능성을 높였다. 그런 흐름 속에서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이라는 파국적인 일을 벌였다.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에서 14일 탄핵 통과까지 12일 동안 사태 진척은 매우 급박했다. 하지만 4월 총선, 7월 국민의힘 전당대회 등 이전 정치 일정까지 감안하면 예견된 파국일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골수 지지층, 당에 대한 장악력, 대중적 매력 등으로 당을 다시 틀어쥐어 브레이크 없는 파국을 맞았다. 그에 비해 윤 대통령은 그만큼의 능력이 없어 당을 틀어쥐지 못해 강제적으로 브레이크를 장착당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 브레이크를 견디지 못해 상상 밖의 일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강성 우파 유튜버, 음모론자의 수장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탄핵 가결에서부터 인용, 그리고 60일 이내에 진행될 차기 대선까지 어떤 그림이 펼쳐질까. 일단 과거를 돌아보자. 탄핵 인용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주로 개인적 인연을 바탕으로 변호인단을 꾸려 당과 거리를 두고 법적 대응에 임했다. 박 전 대통령은 줄곧 말을 아꼈고, 구속 수감 후엔 ‘묵언’ 모드를 취했다.

    박 전 대통령의 수동적 태도와 별개로 새누리당은 혼란을 거듭했다. 탄핵 가결 직후 의총에선 친박계 정우택이 원내대표로 당선됐고, 그 직후 이정현 대표가 사퇴했지만 당권은 여전히 친박계 손에 놓여 있었다. 결국 김무성·유승민 등 새누리당 비주류 29인은 공식적으로 탈당을 선언하면서 분당 사태에 이르렀다. 이후 새누리당은 인명진 비대위를 출범시키고, 서청원·최경환 등 상징적 친박 인사들에게 징계를 내리는 조치를 취했다.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꾸고 새누리당 시절에 비해 오른쪽 색채를 강화하면서 대선후보 전당대회를 열었다. 이인제·김진태·홍준표·김관용 네 명의 후보 중 홍준표가 총 54.2%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탈당파 가운데 김무성 등의 속내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대선후보로 옹립해 최대한 박근혜 컬러를 뺀 다음 일전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이 귀국 직후 정치적 미숙함을 노출한 끝에 대선 출마를 포기하자 자중지란에 빠졌다. 유승민이 바른정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하지만 지지율이 문재인·안철수에게 훨씬 못 미쳤고, 홍준표가 우파 색채를 강화해 보수 지지자들을 결집하면서 4, 5위권으로 밀렸다. 이렇게 보수 적통 경쟁에서 밀리자 대선을 일주일여 남겨놓고 비유승민계 의원들 10여 명이 탈당해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하는 데 이르렀다.

    박근혜라는 인물이 직접 개입하지 않았는데도 이런 혼란상이 펼쳐진 것이다. 대선 이후에도 보수 정치의 혼란은 그치지 않았다. 홍준표 후보가 보수 지지층 결집에 성공해 예상 밖 선전으로 24%를 넘는 득표로 2위를 기록하자 구심력이 강화되긴 했다. 바른정당에서 이탈이 가속화하고 안철수 국민의당도 혼란에 빠져 자유한국당이 1야당 위상을 굳히고 다시 홍준표가 당권을 쥐었다. 하지만 좌충우돌, 막말 논란이 그치지 않았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전국 광역단체 중 대구와 경북 두 곳밖에 이기지 못했다. 홍준표는 당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 황교안이 당대표로 선출됐다. 그리고 2020년 2월 총선을 앞두고 미래통합당을 발족, 구 바른당 세력과 통합하고 당외 일부 보수세력을 결합함으로써 보수 재통합을 이뤘다.

    과도한 보수 컬러, 당내 기반이 약한 황교안 대표의 유튜버 의존 등으로 총선에선 또다시 참패했다. 미래통합당은 국민의힘으로 다시 당명을 변경했고 2021년 서울시장, 부산시장 재보선 승리와 2022년 대선 승리에 이르렀다.

    탄핵 후유증 극복에 꼬박 3년 걸려

    2021년 4월 8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가 서울 여의도 당사 개표상황실에서 꽃다발을 들고 두 팔을 번쩍 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21년 4월 8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가 서울 여의도 당사 개표상황실에서 꽃다발을 들고 두 팔을 번쩍 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17년 3월 탄핵 인용으로 완전한 분열에서 2020년 2월 통합까지 3년 남짓 걸린 셈이다. 그나마 이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직접적 개입이 없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탄핵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대통령 지지율이 4%까지 떨어지고 대규모 장외 집회가 연일 벌어지고 언론의 폭로 보도와 특검의 수사가 옥죄어 오는 판국에 당시 새누리당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당시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유지할 능력 자체를 잃은 모습을 보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12일 담화를 통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천명하고 탈당 요구도 거절했다. 지지층을 결집해서 정치적으로 맞서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것이다. 국민의힘 내 친윤 혹은 반한동훈계 의원들은 어정쩡한 태도다. 탄핵 전까진 한 전 대표와 각을 세우고 윤 대통령을 옹호하던 홍준표 대구시장 같은 사람은 ‘윤·한 공동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박근혜 탄핵 이후보다 훨씬 복잡한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윤 대통령이 안 그래도 보수 진영의 골칫거리였던 부정선거론자, 음모론자의 손을 굳게 잡은 것은 엄청난 족쇄가 될 것이 분명하다. 당장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힘이 급하다며 이들의 손을 잡는다면 장기 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2017년 대선을 복기해 보면서 보수 진영은 작은 틈을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당시 문재인 당선자의 득표율은 41.1%에 그쳤다. 박근혜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문재인이냐 아니냐’의 프레임이 떠올랐을 땐 박근혜 탄핵 책임에서 자유로운 문재인의 대항마 격인 반기문에 이어 안철수가 위력적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한때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했다. 그런데 안철수가 미숙한 모습을 보이며 자유한국당 홍준표가 부상하면서 진영 대결 양상이 벌어졌고, 박근혜 이미지까지 겹치면서 문재인이 여유 있게 이겼다.

    배신자 프레임을 살펴보면 박근혜에 대한 것보다 윤석열에 대한 그것이 훨씬 악성이다. 박근혜는 아버지의 유산, 본인에 대한 대중적 연민, 지역 기반 등 아직도 유지되는 강점이 있다. 하지만 윤석열은 그런 것이 없다. 대신 윤석열은 부정선거 의혹 규명, 좌파 척결 등을 계엄 이유로 내세웠다. 배신자론과 의리론, 혹은 반한동훈 전선 구축을 위해 국민의힘 일각이 윤석열의 손을 잡는다면 앞으로 오랫동안 헤어 나오기 어려운 미로 속으로 빠져드는 악수가 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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