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민감 사회’… 멀지만 가야 할 길[기고/채정호]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6일 22시 54분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초대 회장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초대 회장
사람은 강하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어도 살아나간다. 그런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 트라우마다. 사실 의학에서는 트라우마를 아주 좁게 정의한다. 범죄, 전쟁, 폭행, 납치, 자연재해 등과 같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나 심한 부상, 성폭행을 경험했을 때, 혹은 이런 일을 직접 목격하거나 아주 친밀한 사람이 당했을 때 겪는 상처만을 트라우마라고 한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몸과 마음에 큰 위협을 받아서 압도당하는 경험을 했다면 적어도 심리적 트라우마를 받은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런 압도감은 그동안 믿어왔던 모든 것을 뿌리째 흔든다. 안전하다고 믿어왔던 세상이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주장처럼 먹고사는 것 다음으로는 안전 욕구, 즉 위험하지 않고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욕구가 가장 강력한데 그것이 좌절된 상태다.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땅이 흔들리면 모든 게 두려워진다. 이처럼 안전하다고 믿었던 여객선이 가라앉고, 길거리에서 압사를 당하고, 여객기가 추락하는 경험은 엄청난 위협이 될 수 있다. 이런 것을 직접 겪었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이유에서든 압도되는 경험을 했다면 충분히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트라우마는 기본적으로 화상과 비슷하다. 강한 햇빛에 노출돼 화상을 입어본 적이 있는가? 평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옷을 입거나 수건을 두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이 온다.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은 온몸에 화상을 입은 것과 같다. 트라우마를 겪지 않았을 때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별것 아닌 자극에도 온몸이 타는 것 같은 아픔을 겪는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견디기 어렵다.

문제는 이런 트라우마를 그 누구라도 겪을 수 있다는 것에 있다.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폭력이 일어나고 예상치 못하게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계속 벌어지는 세상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나쁜 행위가 트라우마를 주는 폭력이다.

게다가 트라우마를 당한 사람에게 또 트라우마를 가하는 것도 폭력이다. 화상 입은 피부에 상처를 더해 감염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서로에게 섬세해야 한다. 내가 만나는 누구라도 언제, 어떤 모양으로 트라우마를 당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상상할 수도 없는 아픔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대해야 한다. 이를 전문용어로 ‘트라우마 민감 접근’이라고 한다. 사람을 만날 때 ‘우리 관계는 안전하고 믿을 만하며 지지해주겠다’는 태도로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다.

트라우마를 겪으면 슬픔과 우울, 불안을 느끼고 울분에 차 후회하는 정서적 어려움 말고도 몸이 불편하고 행동도 바뀌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단절된 듯 느끼는 영적 어려움까지 겪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지 않고 견디기는 어렵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은 후에 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 상실을 가슴에 품고 또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아플 수 있다고 여겨주며 아픔을 존중한다면 어떨까.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세상은 그나마 살 만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사람은 강했다가도 약해질 수도 있지만, 다시 또 서로 지탱하는 힘으로 견디며 더 강해질 수 있다. 이는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자 품격이다.

#트라우마#트라우마 민감 접근#심리적 안전#정서적 어려움#심리학#정신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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