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파티가 호암에 그린 벽화, 전시 끝나면 지운다? [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9월 28일 12시 31분


개인전 ‘DUST’ 개막을 앞두고 8월 26일 호암미술관에서 만난 스위스 출신 화가 니콜라스 파티. 사진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지난 뉴스레터에 이어 오늘도 9월을 맞아 한국을 찾은 해외 미술계 인물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호암미술관에서 지금 개인전을 열고 있는 스위스 출신의 화가 니콜라스 파티입니다.

파티는 보라색 얼굴, 빨간 줄기를 가진 나무 숲, 버섯 머리를 한 사람처럼 엉뚱하고 기괴한 색채와 이미지가 트레이드 마크인 작가입니다.

특히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미술 시장에서 사랑을 받고 있고, 9월 열린 프리즈 서울에서도 ‘커튼이 있는 초상화’가 약 33억 원에 팔려 이목을 끌었습니다.

그런 그가 호암미술관의 고미술 소장품을 만나 어떤 작품을 펼칠지, 저도 궁금증에 부푼 마음을 안고 전시 개막 준비가 한창인 미술관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백지 같은 호암미술관,
‘거울’처럼 같은 듯 다른 두 층
만들겠다는 영감 떠올라

- 한국에 와서 한 달 넘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지냈나요?

네 전체 기간을 다 합하면 6주 간 한국에 머물 예정입니다. 대부분을 호암미술관이 있는 용인에서 보내고, 주말에만 서울에 갔어요.

용인에선 미술관으로 출근해 그림을 그리고 호텔로 가서 잠을 자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호텔이 에버랜드와 가까워서, 그곳에 나들이 온 사람들이 제가 보는 풍경이었어요. 일주일 3번 정도는 강변에서 10km 러닝을 했고요.

서울에선 서촌 한옥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저녁 서촌 재즈 바에 들어갔을 때입니다. 문을 막 닫으려다 사장이 저를 보고 3곡이나 더 연주해주더라고요. 바 사장님이 젊은 분이었는데, 주변의 핫한 칵테일 바에도 함께 가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 서울에서 친구를 만드셨군요.

네. 전시 개막식에도 초청했어요. 좋은 친구였고, 가볼 만한 식당도 추천해줘 다음날 가봤어요. 누가 추천해주는 곳을 가보는 게 정말 재밌는 일이잖아요. 그 식당에선 엄청나게 매운 음식을 먹었지만 즐거웠습니다.

니콜라스 파티 개인전 ‘DUST’ 전시 전경. 사진 김민

- 전시장을 보니 이전 공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 나도록 아치와 복도를 만든 것이 눈에 띄었어요. 직접 생각한 아이디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접근한 건가요?

호암미술관에 와보신 분은 알겠지만 외관은 아주 전통적이고 특색있는 공간인데, 내부로 오면 텅 빈 화이트 큐브에요.

기둥이 있는 큰 방 두 개가 있는 형태라서 자율적으로 공간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저한테 가장 먼저 떠오른 아이디어는 ‘거울’을 만들고 싶다는 거였어요. 1,2층 공간이 똑같은 방식으로 나눠졌지만 다른 컬러와 분위기를 갖도록 말이에요.

- 그러니까 호암미술관 전시장은 좀 더 자유롭다고 느낀 거네요?

맞아요. 리움 미술관을 생각해보시면 그 차이가 잘 드러나죠. 건물에 장식이나 여러 가지 요소가 있으면 거기에 맞춰서 작품을 해야 하는데 호암은 그렇지 않았어요.

김홍도의 군선도,
대가의 여유와 유머 느껴져

니콜라스 파티 개인전 DUST에 함께 전시된 김홍도의 군선도. 사진 호암미술관 제공


김홍도의 ‘군선도’에서 여유와 유머가 느껴졌고, 전시에서 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누드 뒷모습 연작을 옆에 가져다 놓았어요. 또 그림 속 강아지를 가져와서 인물화에 포니테일을 묶은 머리카락처럼 그린 것도 있고요. 그림의 주제는 전통적이고 진지한 것이지만, 분명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그릴 땐 무척 즐거움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전시를 준비할 때, 리움과 호암미술관 소장품을 볼 수 있었잖아요. 소장품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요?

처음 미술관에서 전시 제안을 받고 바로 소장품을 전시에 포함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소장품 중에 근현대 미술 작품도 있지만, 저는 고미술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이유는 제가 한국 전통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림 속의 오브제를 집중해서 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관심 있는 오브제에 대해 미술관과 대화하고 알아가면서 공부하는 시간을 덕분에 가질 수 있었죠.

- 작가님이 고미술을 소재로 삼는다고 했을 때 제가 기대했던 건 이방인의 눈이었어요. 한국인은 교과서에서 김홍도 작품이나 고려 청자를 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맥락을 갖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 없이 이 작품을 보면 색채나 형태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죠.

제가 고미술 작품을 소재로 삼은 것도 같은 이유였어요.

‘십장생도 10곡병’을 보면, 커다란 패널로 이뤄진 붉은 태양과 나무, 폭포가 있는 풍경화잖아요.

저 역시 폭포 같은 것을 그리고 풍경화를 하는 사람이니까 공통점이 있었죠. 나무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요. 그래서 이 그림의 의미는 잘 몰랐지만 같은 풍경이라는 점에서 끌렸어요. 그 상징이나 의미에 대해서 보게 된 건 그 다음이죠.

18세기 ‘십장생도 10곡병’. 사진 호암미술관 제공

이렇게 직관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접근한다는 게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저는 회화나 시각 언어가 음악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문자 언어나 개념보다 더 보편적인. 음식처럼 모든 사람이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요.

18세기 유럽의 역사를 몰라도 모차르트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느끼고 감각하는 건 꼭 맥락을 알아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죠.

그런 점에서, ‘십장생도 10곡병’도 저만의 방식으로 아주 다른 맥락에서 감상할 수도 있음을 제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기자님이 말한 것처럼요. 

군선도와 함께 전시된 니콜라스 파티의 뒷모습 연작. 사진 김상태. 호암미술관 제공

김홍도의 ‘군선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군선도에서 여유와 유머가 느껴졌고, 전시에서 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누드 뒷모습 연작을 옆에 가져다 놓았어요. 또 그림 속 강아지를 가져와서 인물화에 포니테일을 묶은 머리카락처럼 그린 것도 있고요.

그림의 주제는 전통적이고 진지한 것이지만, 분명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그릴 땐 무척 즐거움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니콜라스 파티, ‘청자 주자가 있는 초상’ 작가 및 하우저앤워스 제공 ©니콜라스 파티, 사진: Adam Reich

-군선도에서 영감을 얻은 초상화 중에 고려 청자가 들어간 작품이 있던데요. 청자 위에 여자의 얼굴을 올려 놓아서 마치 사람이 된 것 같아 재밌었는데,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군선도’를 가지고 일종의 놀이를 하고 싶었어요. 그림에 등장하는 신선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제 스타일로 초상화를 8점 그렸는데.

당나귀를 모티프로 한 그림은 군선도에서 출발했지만 프란시스코 고야의 카프리초스에 나오는 당나귀도 가져왔습니다.

또 신선 중 한 명이 호리병을 들고 있는데 그 형태를 뭘로 할까 고민하다 미술관 소장품인 청자에 눈길이 갔어요.

청자의 형태가 여자의 몸처럼 감각적인 느낌을 주었고 손잡이에 개구리가 놓여 있는 건 유머러스하고 독특했죠. 그리고 초상화 속 여자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청자와 상응하도록 한 거에요.

-그림 속 인물이 왜 정면이 아니라 옆을 보고 있나요?

그러게요. 8개 초상화 중 그 작품만 측면을 보고 있는데, 청자의 주둥이가 옆을 향하고 있잖아요.

-리듬을 만드려고 한 건가요?

맞아요. 다른 도자기들도 그려보려 여러 시도를 해봤는데 결국은 이 청자를 택했어요. 가장 유명한 소장품이기도 하고, 유머러스함이 많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면 용이나 개구리처럼 재밌는 모티프도 많아요. 박물관에 전시된 모습이 아니라 이 병이 실제로 사용됐을 때는 여기에 술을 담아 마시거나 즐거운 광경이 펼쳐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벽화 지우는 것 아쉽지 않냐고?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져


니콜라스 파티, ‘가을 풍경’ 작가 및 하우저앤워스 제공 ©니콜라스 파티, 사진: Adam Reich


우선 한국의 그림에서 향나무가 무척 자주 등장하는 게 인상깊었는데, 실제 풍경에서도 향나무가 많아 신기했어요. 얇은 붓으로 그린 것 같은 나뭇잎들. 또 붉은 색을 띄는 나무 껍질이 여름 빛을 받아 노란색이 되는 풍경. 그 위에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같은 것들이 생각나네요. 서울에서 등산을 두 번 했는데 큰 바위가 웅장하게 펼쳐진 모습도 풍경화로 그려진 것을 봤어요. 거기에 매미가 더해지니 아주 강렬한 풍경이었습니다.

-전시장 속 풍경화는 미술관 주변을 보고 그린 건지 궁금해요.

그렇진 않습니다. 4계절을 연작으로 담아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들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다만 서울에 있는 리움미술관과 달리 호암미술관은 주변에 자연이 둘러 싸여 있고, 정원도 세심하게 가꿔진 곳이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조경가 정영선 전시도 보았고, 정원과 건축을 연결 지어 풍경을 만들려고 한 것을 굉장히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미술관 주변을 직접 보고 그렸다기보다, 그런 분위기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한국의 자연 풍경은 유럽이나 미국과도 아주 다르잖아요. 풍경을 그리는 화가의 눈에 자연이 어떻게 보였을지 궁금합니다.

우선 한국의 그림에서 향나무가 무척 자주 등장하는 게 인상깊었는데, 실제 풍경에서도 향나무가 많아서 신기했어요.

얇은 붓으로 그린 것 같은 나뭇잎들. 또 붉은 색을 띄는 나무 껍질이 여름 빛을 받아 노란색이 되는 풍경. 그 위에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같은 것들이 생각나네요.

서울에서 등산을 두 번 했는데 큰 바위가 웅장하게 펼쳐진 모습도 풍경화로 그려진 것을 봤어요. 거기에 매미가 더해지니 아주 강렬한 시각적인 풍경이었습니다.

-매미는 평소보다 더 시끄러웠어요. 올해 기온이 높아서 매미 소리도 더 길고 크게 들렸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매미들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죠. 그런데 저도 등산하다 야외에서 점심을 먹는데 같이 간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긴 했습니다. (웃음)

니콜라스 파티, ‘두 마리 개가 있는 초상’ 작가 및 하우저앤워스 제공 ©니콜라스 파티, 사진: Adam Reich

-또 다른 초상화에서는 군선도에 등장하는 옷을 표현한 붓터치를 모방한 것도 볼 수 있었어요. 이걸 그릴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수채화와 비슷하지만 실크나 종이 위에 잉크를 칠했을 때 고유의 느낌을 흉내내기 위해 아주 자세히 그림을 봐야 했어요.

미술관에 가면 아무리 그림을 오래 본다고 해도 12시간 동안 보기는 어렵잖아요? 저는 그럴 기회가 있었고 그러면 그림과 아주 친밀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되죠. 그런 경험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동양화에서는 선 하나를 그릴 때 아주 집중해서 그리고, 그 선에서 사람의 성격이 드러난다고도 하는데 그런 경험도 할 수 있었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저는 파스텔로 그렸으니까요. 동양화와 달리 유럽 그림에서는 전통적으로 물감을 겹겹이 쌓아 올리고 틀리면 그 위에 덧그리기도 해요. 저도 그냥 모양을 흉내 냈을 뿐 그림 그리는 방식은 달랐습니다.

동양화를 그리기 위해선 상당한 자신감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이유에서 ‘군선도’를 그린 김홍도가 자신만만한 사람이고 그 덕분에 유머도 표현할 수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니콜라스 파티가 그린 벽화 ‘구름’과 함께 전시된 그림 ‘부엉이가 있는 초상’ 호암미술관 제공. 사진 김상태.


-마지막으로 전시장에 머물면서 그린 벽화가 나중에 없어진다고 들었어요. 아쉽지는 않나요?

그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아요. 아쉽지 않습니다. 과정의 일부이고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거니까요. 세상 모든 일과 똑같아요.

당신에게 반려견이 있다면 그 강아지는 15년 가량만 함께할 수 있을 것이고, 거북이는 좀 더 오래 살거고, 화병에 꽃은 며칠 뒤면 시들어요.

결국에 모든 것들은 사라질 거고 제 작품도 제가 사는 동안엔 괜찮겠지만 갑자기 불이 나서 사라질 수도 있는거죠.

-내 작품이 사라진다는 상상을 종종 하나요?

물론이죠. 뉴욕 작업실에서 불과 20걸음 떨어진 곳에 허리케인과 폭우가 내려서 첼시 갤러리나 작가들의 작업실 수장고가 물에 잠겨 작품들이 훼손된 적도 있는 걸요.

수백 년이 지나 살아 남는 사원 같은 곳도 있지만, 서울에도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곳들이 많잖아요. 무언가를 짓는 건 오래 걸리는데 파괴되는 건 금방이죠.

전시장에 놓인 고려시대 금동 용두보당도 원래는 10~12m 높이의 거대한 나무 기둥이었잖아요.

직접 보면 웅장했을테지만 지금은 미니어처만 남아있고, 사이사이 금박이 채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청동만 남았죠.

이걸 만든 사람이 지금 전시된 모습을 보면 “이렇게 만든 게 아니야!”하고 탄식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니까요.

‘폭포’ 앞에 선 니콜라스 파티, 사진 변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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